소설방/장군의 아들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2

오늘의 쉼터 2014. 8. 27. 12:59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2

 

 

 

뭐? 점잖은 분이라구? 점잖은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라.

썩 비키지 못해, 건방진 놈. 아고(턱)를 바스러뜨려 놀 테니까.”

무엇에 화가 났는지 종로꼬마는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필사적으로 남자를 감싸고 있는 여급 김윤희를 떼어내려고 달려들었다.

그럴수록 여급은 사나이를 안쪽으로 밀어넣으며 다급한 듯 소리쳤다.

“안 돼요, 안 돼! 이러심 안 돼요!”

그러나 여인의 옹위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고 있는 사나이는 지지 않고 맞섰다.

“뭐? 건방지다고?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는데 건방지다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무리 목소리는 카랑카랑하더라도

그것은 꽁무니를 빼면서 연신 짖어대는 하룻강아지와 같은 형국이었다.

막 문 안으로 들어선 김두한은 히죽 웃었다.

으레 종로꼬마가 여자 문제로 손님과 다투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박사! 왜 그래?”

김두한은 종로꼬마의 등뒤에서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사나이를 에워싸고 있던 종로꼬마와 머리 빠진 개고기, 장대 등이

깜짝 놀라서 한 발짝 물러섰다.

아무리 감정이 복받쳐 오르고 있다 해도, 두목이 나타났으니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두목의 권위인 동시에 두목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아, 글쎄, 어디서 굴러먹는 개뼈다귀인지 모를 놈이 나타나서

남의 좌석이 시끄럽다느니 뭐니, 건방을 떨고 있지 않어!”

종로꼬마는 어른에게 고자질하는 어린애처럼 씨근거리면서 말했다.

김두한은 아직도 여급 김윤희가 에워싸고 있는 사나이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기골이 장대할 것은 없었으나,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단정한 풍모가 귀품스러웠다.

둥글고 넓적한 상이었으나, 빛나는 눈동자며 희뿌연 살결이 한갓 건달패 같지 않은,

한눈으로도 신사다움을 느끼게 했다.

나이는 김두한보다 네다섯쯤 위일까.

김두한은 정말 주먹으로 맞서야 할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뭐, 그렇다고 점잖은 손님하고 다툴 것 없지 않아? 상대가 돼야 상대를 하지.”

김두한은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가볍게 종로꼬마를 나무랐다.

그러나 사건의 경위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자기 부하만 나무라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던지, 희뿌연 안색의 신사 쪽을 보다가 낯익은 여급

김윤희 쪽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점잖은 손님이 조용히 술이나 마시고 돌아가실 일이지,

아이들하고 싸워서 이로우실 일이 뭐 있겠어요?”

그리고 김두한은 종로꼬마 등 부하들을 이끌듯 하고 그 자리에서 돌아섰다.

이로써 사건은 일단락됐다. 또 그랬어야만 했다.

그러나 일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제대로 아물어지지도 않았다.

난데없는 사나이의 일갈이 김두한의 목덜미를 움켜잡는 것이다.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두한아! 네가 김두한이지? 너, 이리 좀 와.”

 

낯선 사나이의 일갈은 김두한을 소스라치도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그가 만용을 부리는가.

전서울을 지배하고 있는 주먹패의 거두 김두한을 그의 아지트로 찾아와서

반말로 오라 가라 하는 자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김두한은 흠칫 놀라서 뒤돌아섰다.

아무리 보아도 낯선 얼굴이었다.

뽀얗도록 흰 살결이 백면서생(白面書生)의 얼굴이지, 주먹패 같지 않았다.

이런 자가, 주먹패들이 바글거리는 속으로 뛰어들어 감히 그 두목과 맞상대를 하려는 것인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이야말로 날달걀로 바위를 깨려고 던지는 격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지만 김두한은 솔직히 그 담력에 놀랐다.

사람이란 누구든 상대방이 너무나 뜻밖으로 강력하게 나오면 우선은 주춤하게 마련이었다.

좁은 골목길 저편에서 먼저 힘있게 달려오는 자가 있으면,

맞은편에서 천천히 걷고 있던 자가 먼저 옆으로 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돌아선 김두한은 뚜벅뚜벅 사나이에게로 돌아갔다.

그의 작은 눈이 뾰족하게 사나이를 쏘아보았으나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일순 장내는 물이 찬 듯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것은 긴박감 이상의 공포의 분위기라 할 만했다.

그러나 김두한도 대뜸 달려들지를 못하고 있었다.

전체의 주먹패를 상대로 맞서고 있는 이 배짱 있는 사나이가 과연 누구인 것일까.

아직껏 얼굴과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주먹의 실력자인 것일까.

아니면 얼빠진 단순한 술주정뱅이인 것일까.

그렇지도 않다면 새로 종로 경찰서에 부임해 온 고등계 형사쯤 되는 것일까.

“당신 뉘시오?”

천천히 사나이의 테이블 앞으로 다가온 김두한은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기가 꺾였다고까지는 할 수 없었으나, 사나이의 담력에 탄복한 목소리인 것에 틀림없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 필요는 없어. 김두한, 네가 누구인가를 먼저 알아야 해.”

김두한의 목소리가 차분했던 것에 비해, 사나이의 목소리가 오히려 거칠었다.

김두한의 몸가짐이 비교적 공손했던 것에 비해 사나이는 더 불손했다.

김두한의 비위가 서서히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의 볼때기가 경련을 일으키듯 가볍게 떨렸다.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가에 따라 주먹이 날아갈 기세였다.

그 기세를 알고 있는 것인지 모르고 있는 것인지,

알고도 그러는 것인지 희뿌연 얼굴이 더욱 창백해지면서 소리치는 것이었다.

“거리를 주름잡는 주먹패의 두목,

가다(어깨: 주먹패를 어깨로 부르게 된 것은, 주먹패를 말한 일본말을 직역한 것)의

오야붕으로 행세하면 다냔 말야!”

김두한의 자존심은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고양이가 날려고 네 다리의 오금을 순간적으로 움츠리는 것처럼

그가 발가락 끝에 힘을 주려 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넌, 넌, 김좌진,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란 것을 알아야 한단 말야!”

사나이는 뇌성과도 같은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순간, 김두한은 강한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흠칫했다.

뒤통수를 강타당한 것처럼 눈앞이 아찔하고,

다리 아래가 후들후들 떨리면서 비틀거렸다.

(김좌진 장군! 아버님, 김좌진 장군!)

김두한은 아버지 김좌진 장군에 대해서 꿈속의 꿈처럼 생각나는 기억이 있었다.

꿈속의 꿈이라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뚜렷하고 생생한 기억이었다.

그것은 그의 나이 여섯 살 때의 일이었다.

그는 외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아버지 김좌진 장군을 만나러 만주로 넘어간 일이 있었다.

대한 독립군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


이역 땅 요동(遼東) 벌판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살얼음판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우고 있던 장군도 필경에는 피와 눈물이 있는 한 인간이었다.

고국에 남겨놓고 온 김계원(金桂園)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아들 두한을 생각하면,

가슴 저려오는 향수와 함께 아들을 한번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바람결처럼 전해 오는 소식에 의하면 김계원 여인은 일경의 고문에 못 이겨

이미 세상을 떴다고 하지 않는가.

어떻게 해서 만난 여인이며, 어떻게 해서 가진 아들이었던가.

일본 헌병을 때려죽이고, 이들에게 쫓겨 담을 뛰어넘어 들어간 집.

퇴관한 박 상궁(신 상궁이라는 기록도 있다)의 집이었다.

박 상궁과 그의 딸 김계원 여인은 김좌진을 다락방에 숨겨 위기를 모면케 해주었다.

그는 박 상궁 집에서 몇 개월이나마 편안히,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김계원 규수와 숙명적인 사랑에 빠졌고 불과 몇 개월의 밀월 생활을 즐긴 셈이었다.

그러나 혁명가로서의 그는 언제까지 다락방에 숨어 지낼 수 없었고,

또 언제까지 여인과의 밀월 생활에 빠져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만주 땅으로 망명길에 오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백발노인으로 변장한 그가 막 대문을 나서려 할 때,

따라 나온 김계원 여인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보였다.

“대장부가 나라 위해 나서는 마당에 아녀자가 눈물을 보여서야 되겠소?

좀 참고 기다리시오. 나라를 되찾는 그날,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하지만 저는 지금, 홀몸이 아닌걸요…….”

“뭐, 뭐라고?”

김좌진은 적이 놀랐다.

자기 아이를 가진 김계원 여인이 더욱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가슴 두근거리는 불안감과 함께 또한 순수한 기쁨도 느꼈다.

하지만 놀라움도, 여인에 대한 소중한 감정도, 불안감과 함께 가진 순수한 기쁨도,

젊은 혁명가의 발을 묶어놓지 못했다.

“몸 성히 잘 있으시오. 어쩐지 꼭 아들을 낳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구료.

아들을 낳거든 꼭 두한이라 이름 지어주시오.”

그러곤 홀연히, 매몰차게 대문을 뛰쳐나오지 않았었던가.

김좌진이 김계원의 다락방에 피신해 있는 동안에도 그의 목에는 현상금이 걸려 있었고,

일본 관헌은 그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애인이자 생명의 은인이라 할 김계원 여인이 자기 아이를 잉태했다는

말을 듣고도 떠나야만 했던 것은 이러한 절박한 사정 때문이었다.

불과 몇 개월 동안의 밀월 생활을 가진 것뿐인 김계원 여인은 김좌진을 피신케 했다는

사실이 탄로되어, 그 죄값으로 모친 박 상궁과 함께 일경의 유치장 순례를 거듭한 끝에

그만 병사를 하고 말았다지 않는가.

조국의 광복도 보지 못하고, 머리도 제대로 얹지 못했으며 생이별을 한 남편과 재회의

기쁨도 가져보지 못한 채 한 많은 세상을 쓸쓸히 떠난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전해 들은 김좌진 장군은 마음속으로 통곡을 했다.

김계원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아들 두한이라도 한번 보고 싶었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아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것은 자연스런 부정(父情)이었다.

장군은 밀정을 시켜 조선 땅에 잠입하여 두한 소년을 만주 땅으로 데려오도록 일렀다.

개구장이 두한 소년이 밖에서 뛰어놀다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외할머니는 말없이

소년의 옷을 갈아입히는 것이었다.

두툼한 솜바지저고리에 솜두루마기, 방한모에 목도리까지 둘렀다.

그 길로 밀정의 안내를 받으며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만주 땅으로 향해 갔던 것이다.

기차로 청진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어선에 올랐다.

고깃배 밑창에 숨어 탄 것이었다.

하루가 지났는지 이틀이 지났는지 기억에는 없지만 아무튼 배에서 내린 후,

다시 기차 여행을 했다.

그리고 내린 곳이, 후에 들은 얘기로 모란강(牧丹江)이라 했다.

소년이 아버지를 처음 만난 날은 퍽이나 춥고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거기가 어딘지 기억에는 없었지만, 모란강 역두였을 것이다.

김좌진 장군은 좌우에 여럿의 참모를 거느리고 아들 두한을 맞았다.

다른 기억은 없지만 털모자에 털 망토를 걸친 모습이었다.

두한 소년은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한눈으로 그가 아버지라고 직감하고 그 앞으로 달려갔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으스러져라 껴안고는 하늘로 높이 치켜들었었다.

아버지는 외할머니와 소년 두한을 마차에 태우고는 어떤 깊은 산 속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얼마 동안 머물렀는지 모른다.

왜 다시 아버지와 헤어져야만 했는지 또한 모른다.

소년은 다시 외할머니와 함께 조선 땅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소년은 외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아버지에게 큰절을 했고,

그때 슬픔에 잠긴 듯 바라보던 아버지의 눈매…….

그것이 부자간의 최초이자 마지막의 상면이었지만,

이것 모두가 꿈속의 꿈처럼 떠오르는 기억의 전부였던 것이다.

이 밖에 아버지가 독립 운동을 하는 장군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

더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렇다 할 지식이 없는 채 아버지 김좌진 장군은 그대로 두한의 신앙이었다.

신앙처럼 섬기는 아버지 김좌진 장군을 이 백면서생 같은 사나이가 서슴없이

입에 올린 것이 아닌가!

기억 속에 그다지 많지도 않은 아버지 김좌진 장군.

그동안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고 당해야만 했던 고초가 얼마나 됐었던가.

김두한이 경찰의 요시찰 인물이 되었던 것도 주먹계의 두목이란 이유만이 아닌,

독립 운동가의 아들이란 이유 때문이 아니었던가.

심지어 같은 안동 김씨 안에서도 김좌진 장군의 인척이라는 것을 꺼리고

내왕까지 꺼리는 자가 있지 않았는가.

김좌진 장군이란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하는 때인 것이다.

그런데 이 젊은 신사는 거리낌도 없이 김좌진 장군을 목청껏 소리쳐 외친 것이다.

아무리 배짱이 좋기로서니 그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고등계 형사의 끄나풀이 어디에 박혀 있는지도 모르는 처지에

이것은 대단히 무모한 짓이었다.

(이분은 누구이신 것일까? 아버지의 성함을 아는 이분은 누구이신 것일까?)

김두한은 아버지 김좌진 장군을 아는 이 젊은 신사 앞에 당장 무릎이라도 꿇고

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그의 허리에 매달려 무턱대고 용서부터 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다……, 당신은?”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김두한은 제대로 말도 잇지 못했다.

“일본이 싱가포르를 함락했기로……, 철딱서니 없게 뭐가 좋다고…….”

젊은 신사는 일갈했을 때와는 달리,

한층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말하고서는 돌아서 나가는 것이었다.

더 이상 나눌 말도 없다는 듯이…….

김두한은 넋을 잃은 듯이 그를 뒤쫓지도 못하고 멀거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께서는 누구십니까?”

“나, 박……요.”

너무 감동을 하고 흥분을 했기 때문인지 성만 알아들을 수 있었을 뿐,

이름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젊은 신사 편에서 잠시 발을 멈추고는 차분하지만

굵직한 목소리로 덧붙이는 것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거든 바로 옆의 ‘삼천리사’로 언제든지 찾아오시오.

좀 하고 싶은 말도 있으니까…….”

야무지게 말을 맺은 젊은 신사는 다소 주기가 있는 듯 휘청거리는 걸음이었다.

그러나 어깨로 바람이라도 일으키는 듯 위세 좋게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 비틀거리는 걸음의 뒷모습이 어느 대인·대자의 모습보다도 더 거룩하게 보였다.

김두한은 멍청히 그 뒷모습만 바라볼 뿐 뒤쫓지도 못했다.

“네.”

그는 자기도 알아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이미 밖으로 나가고 없는 젊은 신사 쪽을 향해 꾸벅 고개까지 숙였다.

깊은 산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홀연히 산신령을 만났고,

산신령의 교시를 받은 다음, 또 홀연히 사라진 산신령 쪽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바 안이 비로소 다시 소연해졌다.

김두한은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여급 김윤희의 곁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누……, 누님. 도대체 그분이 누구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