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1

오늘의 쉼터 2014. 8. 27. 12:55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1

 

 

싸움 한번 크게 붙었다.

1941년(소화 16년) 12월 8일, 일찍부터 감돌던 태평양상의 전운이 마침내 터져

전쟁의 먹구름은 조선 땅까지 휘덮고 말았다.

이날 미명, 일본은 연합 함대 사령장관(聯合艦隊司令長官) 야마모또 이소로꾸(山本五十六)

휘하의 연합 함대로 하여금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眞珠灣)을 기습케 함으로써 전단을 열었다.

기함(旗艦)인 항공모함 아까기(赤城)와 가가(加賀), 쇼오가꾸(翔鶴), 스이가꾸(瑞鶴) 등

2만 6000톤급 최신예 항공 모함 7척, 전함 히에이(比叡)와 기리시마(霧島), 순양함

아부구마(阿武隅), 도네(利根), 지꾸마(築摩), 거기에 다수의 구축함과 잠수함의 대함대가

전투기, 수평 폭격기, 급강하 폭격기, 뇌격기 등 400여 대의 항공기를 거느리고

야음과 안개 속을 헤치고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괴멸시키기 위해 항진을 했던 것이다.

일요일 새벽에 감행된 이 기습 작전은 일본군의 물샐틈없는 보안이 철저히 유지되었고,

야마모또 이소로꾸가 개발한 항공전의 신전술이 주효한 데다가 미군의 태평스러운

만심으로 하여, 세계대전 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호놀룰루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폭 350미터, 수심 12미터인 좁은 진주만에 꽉 들어차 있던

미국 태평양 함대는 불과 1시간 50분 동안 계속된 공격으로 벌써 연기에 휩싸인

한갓 쇳조각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태평양 함대는 그 주력이라 할 전함 8, 순양함 3, 구축함 3, 보조함정 8, 총계 22척

30만 톤의 함정을 잃었고 히캄·호일러, 기타 비행장이 파괴되어 항공기 231대 중

96대가 격파되어 그 기능을 잃고 말았다.

완전 가동이 가능하며 발진할 수 있는 비행기는 불과 7대뿐이었다던가.

군함 승무원의 인명 손실은 1763명이었으며,

민간인까지 포함된 총수는 2335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작전은 그야말로 완전한 성공을 거둔 것이다.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단번에 괴멸시킴으로써 태평양의 제해권을 단숨에 장악한 셈이다.

선전 포고도 없이 자행한 이 기습 작전은 일본의 군국 제국주의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침략 전쟁인 것은 말할 나위 없는 것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인 이 태평양 전쟁을 일컬어

일본은 성전(聖戰),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이라 했다.

이날 이른 아침, 일본 천황의 선전 포고문과 함께 전쟁 총지휘소라 할 대본영(大本營)이

진주만 기습 전과를 발표하자,

일본 국민들은 미친 듯이 들떠 ‘대일본제국 만세’를 부르짖었다.

그것이 잠자는 거인 미국을 흔들어 깨워, 그들로 하여금 분노에 떨고 복수에 치닫게 하여,

군국주의 일본을 마침내 패망의 길로 몰아가게 될 것임을 이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흥분의 파문이 식민지 조선에도 밀어닥치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총독부대로 진주만 전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대동아 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평화를 건설하기 위해 기찌꾸 베이에이(鬼畜 米英)를

격멸하자고 핏대를 올리고 아우성쳤다.

전경성(서울)의 주먹계 두목 김두한이 24세를 보내려는 겨울의 일이었다.

 

진주만 기습에서 대승리를 거둔 일본은 기세등등했다.

개전을 하자마자, 12월 9일에 일본군은 길버트 군도(群島)에,

10일에는 필리핀 루손에, 20일에는 민다나오에, 괌도의 마리아나 군도에는 12일에,

보르네오는 16일에 각각 상륙했다.

문자 그대로 파죽지세(破竹之勢)였다.

영국이 불침 전함(不沈戰艦)이라고 자랑하던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일본의 어뢰 공격을 받고 침몰한 것이 10일이요,

태국의 방콕이 12일에,

영국의 극동 지역의 최대 거점인 홍콩이 일본군에 점령당하고 말았다.

홍콩의 영국 주둔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을 했다.

해를 넘긴 1942년 1월에 접어들면서 일본군은 말레이시아를 총공격,

불과 4주일 만에 이를 정복하고 영국군을 싱가포르로 몰아냈다.

한편, 필리핀에 상륙한 일본군은 1월 7일 수도 마닐라를 점령하였다.

이어 뉴기니의 라바울과 셀레베스 군도, 몰루카 군도에도 상륙,

전선을 동남아 일대로 넓혀 나갔다.

일본 사람들은 서전의 이러한 승전보에 광희(狂喜)했다.

마치 이것으로 전쟁이 끝나기나 한 것처럼.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아온 조선 사람들은 착잡한 심정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숨어사는 일부 지식인 가운데는, 일본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주의가

끝내는 패망할 것을 예견하고 머지않아 조선이 해방되리라고 믿는 선각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식민지 교육에 젖어버린 어린 학생들이나 무학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일본의 승리가 곧 조선의 승리이기나 한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도 없을 수 없었다.

배움이 없고, 싸움을 일로 삼는 주먹패들의 대개도 이러한 범주에 속했다 할 수 있겠다.

“햐! 일본놈들 맹랑한데! 작은 고추가 맵다더니 악바리야, 악바리!

아, 미국놈도 영국놈도 덩치만 컸지, 별게 아니구먼.”

“몸집 작은 종로꼬마 앞에 덩치만 큰 왕발이 오금을 못 펴는 것과 마찬가지지 뭐야, 핫핫핫!”

“핫핫핫!”

종로의 주먹패들은 모여 앉아 그런 농담까지 주고받았다.

일본인들이 승리감에 도취해 가자,

조선의 건달패도 덩달아 동화되어 갔다고나 할까.

김두한은 일본의 승리가 곧 조선의 승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이 싸움의 승자 편인 일본 쪽에 서 있다는 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다행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찌 됐든 싸움에는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미국의 함대를 단숨에 쓸어버리고,

이미 넓은 중국 땅에 많은 병력을 내보내놓고 필리핀으로,

말레이시아로, 태국으로 치고 들어가 멋있게 승리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이

싸움꾼의 감각으로는 후련하고 장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물론 김두한은 남다른 민족 감정을 갖고는 있었다.

조선을 지배하고 있는 일본에 말할 수 없는 저항감을 갖고는 있으면서도,

일단 일본이 대국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이상,

우선은 일본 편에 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 것이다.

조선 사람이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싸우는 일본 편에 서야 한다고 생각한

김두한의 ‘생각’은 그저 막연한 관념, 단순한 기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지

사상적으로 체계화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도시, 배움이 모자라는 그에게 그러한 논리적인 사상이 머리에 박혀들 수도 없었다.

하지만 사실 그러한 생각이 ‘생각’으로 뿌리 박혔다 하더라도,

크게 나무랄 일이 못 되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서울을 지배하는 주먹패의 두목이기는 했지만,

그는 싸움밖에 모르는 ‘무식쟁이’였으니까.

이에 비해 얼마나 많은 친일의 지식인 군상들이

일본인의 앞장을 서서 어깨를 으쓱거리며 설쳐댔던가.

굳이 작자의 이름을 밝히고 싶지는 않지만,

 1942년 1월호 《신시대(新時代)》지에 실려 있는 시 한 편을 예로 들어보자.

명기하라 12월 8일

역사가야 붓을 버려라
네 붓이 너무 무질렀다
역사가야 책을 던져라
네 책이 너무 낡았다

새 붓을 예비하여라
새 책을 펼쳐놓아라
새 먹을 갈아서
새로운 시대의 첫 페이지를 열어라

2천하고 6백 또 1년
섣달 초여드레
이날 미명에
태평양의 물결이 끓었느니라
역사가야 이렇게 쓰려느냐
아니다 아니다

이날 하루에
폭루 미국(暴戾米國)의 태평양 함대가
순식간에 반신 불수가 되니라
이날에
루스벨트는 간을 얼리고
처칠이 담을 헐어뜨리니라

이날에
말레이 반도와 루송에
불비가 나리니라
이렇게 그대는 첫 페이지를 쓰려느냐
아니다 아니다

이날에
영미의 세대가 끝나고
아세아의 세대가 시작되었다
오직 그대는 이렇게 써라
역사가야

이날에
침략의 악몽이 막을 내리고
공영의 여명이 터오니라
오직 이렇게 써라
역사가야

새로운 역사의 첫 페이지에
명기하라 12월 8일
아세아의 붉은 태양이
세계를 비추려 떠오른 날을
폭탄의 세례와
프로펠러의 선율 속에
새로운 시대의 탄생곡을
분명히 파악하여라
그대 역사가야

행진곡을 붙여야 어울릴 것 같은 씩씩한 시가 아닌가!


이 씩씩한 시는 일본 시인이 쓴 것이 아닌 것이다.

저명한 조선의 시인이 쓴 ‘작품’인 것이다.

처녀가 아이를 배도 할말이 있다던가.

갈수록 심해 가는 일제의 모진 탄압과 회유 아래 있는

이 땅의 지식인들에게도 고민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시를 쓰지 않을 수 없는 나름대로의 궁색한 변명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위대한 시인이 이러했을 때,

몽매한 일반 대중은 어떠했을까.

승승장구, 남방 전선을 마구 휩쓰는 일본군의 승리는 정말 눈부신 것이었다.

특히 개전한 지 불과 3개월도 안 된 1942년 2월 15일,

영국의 극동 지방 최대의 거점인 싱가포르를 점령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것이다.

싱가포르의 실함은 연합군의 패배 중에서도 가장 치욕적인 패배였으며,

또 가장 충격적인 패배의 상징으로 전사(戰史)에 남게 된 것이다.

영국군의 항복 장면 자체가 비참하리만큼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군 사령관 야마시다(山下奉文) 중장은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들이면서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그 무조건 항복에 조건이 따랐다.

다름 아닌 영국군 사령관 퍼시발 중장 자신이 직접 일본군 진영으로 출두를 해야 하며,

더욱 가혹하게도 백기와 함께 영국 국기를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퍼시발 장군은 그렇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사태는 절박했던 것이다.

머리를 박박 깎은 땅딸막한 몸집의 야마시다 중장은 항복 협상 테이블에 마주한

퍼시발 중장에게 탁자를 두드리며 육박한다.

“무조건 항복, 예스냐 노냐?”

늘씬한 키에 온후한 장군으로 알려진 퍼시발은

눈을 슴벅거리며 생각하다가 무겁게 입을 연다.

“대답은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주었으면 좋겠소.”

“내일 아침까지? 그렇다면 내일 아침까지 포격을 계속하겠소.”

야마시다는 다시 으름장을 놓으며 ‘무조건 항복, 예스까 노까?’를 다그치는 것이었다.

퍼시발은 더 견디지를 못하고 ‘예스’ 하고 마는 것이다.

백기와 영국기를 들고 일본군 진영으로 찾아가는 장면과 항복 사진은

전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대영제국 편에서는 다시없는 치욕이었겠지만,

일본 편에서 보면 이처럼 신나고 멋진 장면이 없는 것이었다.

야마시다 장군은 일약 국민의 영웅이 되었고,

퍼시발 장군은 무기력한 머저리 패장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무조건 항복, 예스까 노까?’는 아이들, 어른들 할 것 없는 유행어처럼 되었다.

일본은 싱가포르 점령에 광희했다.

싱가포르 시를 소남시(昭南市)로 개칭했고,

연일 연야 축제 분위기에 들떴다.

서울(경성)에서도 낮에는 깃발 행렬,

밤에는 등불 행렬에 꽃전차가 달리며, 승전을 축하하면서 난장판을 이루었다.

소학교 아이들 전체에게 점령지 남양에서 따온 것으로 만들었다는

고무공을 선물할 정도였으니까,

일본이 이 승리에 얼마나 도취했는가 짐작할 만하다.

이 도취에 조선의 주먹패들까지 덩달아 날뛰었다고나 할까.
 
그러한 어느 날 밤의 일이었다.

군가와 행진곡이 울려 퍼지는 서울의 밤거리, 종로.

손에손에 등불과 일장기를 휘두르는 등불 행렬이 끝도 없이 넘실거리듯 흐르고 있었다.

휘황하게 등불을 밝히고 화려하게 단장한 꽃전차가 등불 행렬과 병행해서 질주를 한다.

‘덴노우헤이까 반자이(天皇陛下 萬歲), 대일본 제국 만세! 야마시다 장군 만세……

만세, 만세!’로 서울의 밤은 깊어가는 것도 잊은 듯했다.

싱가포르를 함락시킨 축제는 연일 연야 계속되어도 지칠 줄을 몰랐다.

일본 사람은 말할 것 없지만 조선 사람까지 덩달아서 술에 취한 양 들떠 있었다.

여기는 가찌도끼 바. 낮이면 김두한과 그 패거리들이 아지트로 삼고 있는 술집이었다.

김두한이 여기서 술을 들게 되는 경우도 드물지는 않았지만,

일본패까지 그의 영향권 아래 둔 서울의 실력자로 군림하게 된 이후로는

지난날처럼 자주 들르지는 않았다.

명월관이다, 국일관이다 하고 보다 큰 요정으로 술을 마시러 다녔다.

일본패인 혼마찌깡패나 다께다구미 등과 협상이 이루어진 이후

그들이 약속을 잘 이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두한패는 좀 한가해진 셈이었다.

 비교적 오랫동안 평화가 유지된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충돌조차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넓은 지역에 부하들이 골고루 퍼져 있다 보니 작은 충돌은 수시로 발생했다.

주먹패와 주먹패끼리는 서로 타협을 했다고는 하지만,

일반 시민인 일본 사람과 조선 사람이 타협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가뜩이나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있어 콧대가 높아진 일본놈들은

조선 사람들을 더욱 무시하고 경멸했다.

지배자로서의 행세로 더욱 행패를 부렸다.

이에 화가 난 조선 사람과 일본 사람의 싸움은 뻔질나게 일어났다.

그렇게 되면 자연 주먹패들이 싸움에 말려들게 되는 것이었다.

김두한이 그런 작은 싸움마다에 참견할 수는 없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바삐 뛰어다니곤 했었다.

이날도 김두한은 어떤 사소한 싸움을 잘 해결해 주었다는 사례로

혼마찌깡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고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온 길이었다.

혼마찌깡패인 김동회와의 동행이었다.

거리에 넘쳐흐르는 군가와 행진곡, 만세 소리에 동화되어 버린 것처럼

그는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듯한 들떠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모처럼 관철동 골목에 들어선 김에 가찌도끼 바엘 들렀다.

문을 밀고 들어선 순간, 그는 바 안의 이상을 직감했다.

바 안이 어둠침침하여 아직 눈에 익지는 않았지만,

주먹패들이 한 테이블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었다.

보아하니, 종로꼬마와 머리 빠진 개고기 등이

어떤 낯모르는 손님을 상대로 닦달을 하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여급 하나가 자리에 앉은 채 필사적으로 손님을 감싸고 종로꼬마에게 애원을 하고 있었다.

“이러시면 안 돼요. 이분은……, 이분은 아주 점잖은 분이시란 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