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86

오늘의 쉼터 2014. 8. 27. 12:52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86 

 

 

내심 조센진이라고 멸시해 왔고,

그것을 이유로 그를 거세하려 했던 바로 그 인물에게 조정을 부탁하다니.

다께다는 달갑지가 않았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했다.

그래도 김두한에게 또다시 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종로패를 역습해서 복수를 할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그 길이 낫지 않은가?

“하야시에게 그런 길이 있을까?”

다께다는 스스로 약점을 드러내놓고 말았다.

“그야, 그분은 워낙 발이 넓으시니까…….”

“하지만 하야시가 나를 위해 협조를 해줄까?”

“물론이죠. 그분은 도량도 넓으시니까…….”

“그렇다면, 내 쪽에서 찾아가는 것도 어색하고…….

당신 쪽에서 좀 부탁을 대신해 줄 수 없을까?”

양측의 나와바리 경계선이 되는 남대문통, 메이지 입구에 이르자 다께다는 말했다.

한때 기고만장했던 다께다구미의 두목다운 면모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해보도록 하지요.”

둘은 악수를 나누는 일 없이 헤어졌다.

물론 이 소식은 즉각 하야시에게 보고됐다.

하야시는 내심 무릎을 칠 듯이 기뻐했다.
자신의 계획·작전이 여지없이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혼마찌깡의 힘을 하나도 들이지 않고 적과 적인 다께다구미와 종로패끼리 싸우게 하여,

앉아서 승리의 효과를 거두었으니까.

다께다의 콧대는 이제 꺾일 대로 꺾이고 말았다.

다시는 혼마찌깡에 맞서오지 못할 것이었다.

“우메하라 군을 불러.”

김동회가 두목 앞에 불려간 것도 당연한 순서였을 것이다.

그는 두목으로부터 다께다구미와 종로패의 협상을 중재하는 전권을 위임받았다.

“잘 해봐.”

하야시는 자기보다도 큰 김동회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김동회는 이 임무를 퍽이나 기뻐했다.

누이 좋고 매부 좋다던가.

두목인 하야시에게 좋은 일이며, 친구인 김두한에게 좋은 일이니,

이처럼 신나는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는 단숨에 다께다에게 줄달음쳐 갔다.

김동회는 다께다와 이미 구면이었다.

경성일보의 논설위원이며 그와 의형제를 맺은 바 있는

사끼무라의 소개로 우메하라 양복점을 단골로 삼고 있는 고객이었다.

그런 만큼 그는 다께다에게 정중했다.

“분부하신 대로, 김두한에게 전했습니다.”

“그래, 뭐라고 해?”

“오늘 다방원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다방원? 중국집이라면 이 근처에도 많은데 하필? 하지만 상관없지.

우메하라 군이 동석해 준다면 어딘들 상관 있겠어?”

“저 이외에 또 몇 사람이 합석했으면 좋겠습니까?”

 

“몇 명이면 좋을까? 차라리 김두한과의 단독 회담이라면 어떨까?

통역과 증인으로 우메하라 군이 하나 끼면 더 좋을 테고…….

그래도 단독 회담이면 어색할까?

기왕이면 하나쯤 더 붙여서 쌍방 두 명씩으로 하지…….”

다께다는 마치 꽉 막혀서 답답했던 일이 저절로 풀리기나 한 것처럼

좀 어수선해 보일 정도로 다변했다.

“좋습니다, 쌍방 두 명씩. 곧 돌아가서 김두한에게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김동회는 다께다 앞을 물러났다. 김두한은 이 제의를 쾌히 받아들였다.
다방원은 당시 이름 있는 서울의 중국 요릿집이었다.

당시 서울의 큰 중국 음식점으로는 아미원(雅味園, 현재의 소공동)·

금곡원(金谷園, 소공동)·열빈루(悅賓樓, 종로)·복순흥(福順興, 충무로)·

봉래각(蓬萊閣, 명동)·중화정(中華亭, 명동)·복희루(福囍樓, 남대문로)·

회영각(會英閣, 묵정동) 그리고 지금의 다동에 있었던 다방원(茶芳園) 등이었다.

이 가운데, 중화정만이 광동 요리이고, 나머지는 거의 북경 요리였다.

그다지 맛은 다르지 않았지만,

맛이 익어서인지 북경 요리가 조선 사람들의 구미에 맞았다.

복희루는 경영인이 일본 사람이기도 했지만,

맛 자체가 일본인 취향에 맞도록 변질되어서 조선 사람은 찾지 않았다.

대신 다방원은 조선 기생도 출입하는 조선인 취향의 중국집이어서,

조선 사람들이 많이 꾀어들었다.

다께다가 애초에 다방원을 꺼린 것은 이 때문이었다.

김두한은 약속된 7시가 좀 지나, 종로꼬마와 단둘이서 다방원에 이르렀다.

김두한도 종로꼬마도 승리자 편에 선 자답게 의기양양했다.
다께다는 역시 패장이었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그는 김두한이 들어서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맞았다.

“요오꼬소(어서 오십쇼)!”

그러고는 옆에 선 제법 굵직하고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를,

김동회를 통해 소개하는 것이었다.

“요시다 겐(吉田絃)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요시다도 별수 없이 김두한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래, 왜 날 만나자 했지?”

김두한은 커다란 엉덩이로 털썩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앉았다.

원래 예의범절 같은 것을 따질 줄도 몰랐지만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 몰예의하고 무뚝뚝한 말을 김동회는 통역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두한을 타이르듯 말하는 것이었다.

“아따 성미도 급하기도 하지! 그러다가 우물가에서 숭늉 달라 하겠네.

어차피 이 사람은 네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니까,

천천히 배갈이라도 마셔가면서 얘기하자구. 기생이라도 부를까?”

“기생? 취미 없어. 얘들과 한가하게 배갈을 나누어 먹을 기분도 아니구 말야.

그보다는 얘네들, 아편 밀수를 하지 않고 있다고 잡아떼고 있다며?

나쁜 놈들 아냐? 바른 대로 말하라고 해!”

김두한은 김동회를 향해 소리치듯 말했다.

그러나 김동회는 곧이곧대로 통역을 할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승자로서의 고자세로 강압적으로만 나오면

협상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를 염려한 김동회는 김두한의 말을 통역하는 체하고 전혀 딴말을 했다.

어차피 김두한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테니까.

“지난번의 충돌 사건은 조그만 일이 크게 벌어진 것으로,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로 쪽에서는 전혀 아헨(아편) 밀수에 가담한 바가 없는데

경찰로부터 오해를 받고 있어, 이를 좀 따지러 가려 했던 것이…….”

김동회는 쌍방의 분위기와 협상의 원만한 타협을 위해 전혀 엉뚱한 통역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두한은 ‘아헨’이란 한마디만 듣고도 제대로 통역이 되고 있는 줄 알고

안심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펄쩍 뛰듯 한 것은 오히려 다께다였다.

“천만의 말씀!”

그는 깜짝 놀란 듯 엉덩이를 들썩이며 일어섰다.
아편이라는 한마디에 조건 반사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라고나 할까.

“지난번의 충돌 사건은 없었던 것으로 하십시다.”

아편 문제를 들썩이는 것이 싫어 빨리 타협을 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없었던 것으로 하다니?”

김두한의 작은 눈이 꿰뚫어보는 듯 다께다를 노려보았다.

“지난번 경찰이 달려온 것은 우리들이 연락을 해서 온 것이 아니랍니다.

아마 지나가는 행인이 신고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찌 됐든 없었던 사건으로 돌립시다.

경찰 쪽에도 우리 쪽에서 없었던 일로 무마하도록 하겠으니까요.”

“그 대가로 무엇을 요구하려는 거요?”

김두한의 머릿속에 하야시가 수표교 싸움을 무마시킨 조건으로

자기에게 요구해 온 일이 머리에 떠오른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다께다구미를 치는 것이 아니었는가.

“대가라니, 당치도 않은 말입니다.

그저 앞으로 선린(善隣)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그저 그뿐입니다.”

“이웃끼리 친하게 지내자 이 말인가? 아편 밀수로 재미는 혼자 보면서 말야.”

김두한은 어디까지나 고자세였다.

이웃끼리라고 해서 그대로 친하게 지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기회에 분명한 다짐과 함께 실속을 차릴 생각이었다.
실속이란 물론 돈이었다.

그의 속마음을 김동회가 모를 까닭이 없었다.

그는 또다시 멋대로 통역을 했다.

“다께다구미가 아편 밀수를 하고 있다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 때문에 종로패에서 피해를 보고 있으니까요.

어떻습니까, 다께다 상. 기왕에 선린 관계를 유지하려는 마당에

응분의 보상을 하겠다고 말씀하시면?”

이쯤 되면 통역이 아니라 은근한 협박일 수도 있었다.

다께다는 이내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응분의 보상이 어느 만큼의 것인지 판단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편 밀수 사실을 스스로 시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채로 그는 김두한 쪽보다 잠자코 손장난을 하고 있는 종로꼬마 쪽을 바라보았다.

종로꼬마는 이제까지 세 사람의 대화에 무관심한 채, 딴전을 부리고 있었다.

일본말을 지껄일 줄은 모르지만, 대충 알아듣기는 하는 그는,

김동회가 제대로 통역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짐작은 했다.

하지만 그것이 종로패에 불리한 것만도 아니어서 잠자코 있기로 했다.

그러나 김동회가 마침내 보상 문제를 들고 나선 것이다.

보상을 하라고 다께다에게 종용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은근히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종로꼬마는 이에 가세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불끈 쥔 주먹으로 가볍게 탁자를 토닥거리는 손장난을 했다.

그 손을, 그 주먹을, 다께다가 쳐다본 것이다.
종로꼬마의 그 작은 몸집에 어떻게 주먹만은 그렇게 클 수가 있는가.

김두한의 주먹보다도 더 커 보였다.

그 주먹이 무엇을 치고 무엇을 때려서 굳어진 것인지,

주먹의 마디마디에는 단단한 더께가 앉은 것처럼 군살이 뭉쳐 있었다.

다께다는 그 주먹을 알고 있었다.

이 조그만 놈이, 바로 자기에게 전화 수화기를 내던진 놈이 아닌가.

이놈이 테이블 위로 뛰어오르고 뛰어내리면서,

벼룩처럼 튀어다니며 발길질로 치고 박고 문대곤 했다.

그의 주먹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일본패의 거구가 꽈당꽈당, 나가 떨어졌었다.

 다께다는 그 주먹만 보고서도 다시 기가 죽었다.

“다께다 상, 모처럼 선린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뜻이 있으시면,

이 기회에 성의 표시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김동회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면서 말했으나,

그의 말 속에는 단단하고도 뾰족한 가시가 들어 있었다.

“내…… 내…… 내놓죠, 내놓겠습니다.”

다께다는 김동회의 말보다도 종로꼬마의 주먹을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잘 결정을 하셨어요. 응분의 보상이 어느 선이면 좋을까,

김두한하고 상의를 해보지요.

그 대신, 종로패가 다시는 다께다구미에 습격을 가하는 일이 없도록 다짐을 받아두지요.”

이쯤 되면 김동회는 통역이 아니라 차 치고 포 치고 하는 혼자 놀음이었다.

“다께다 상이 보상금을 내놓겠다 하는데 얼마쯤이면 좋을까?”

김동회가 떠보듯이 물었다.
그러자 김두한은 깊이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게 힘도 들이지 않고 말했다.

“200원으로 하지.”

“200원?”

김동회는 깜짝 놀란 듯이 되받았다.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아편 밀수를 트집 잡고, 한바탕 거세게 몰아붙이는 협상 테이블에서의

요구액치고는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김두한은 의외로 욕심이 적다고 생각했다.

“왜, 너무 많은가? 하지만 혼자 해 먹도록 아편 밀수를 눈감아주기로 하는 건데,

그쯤은 받아야지. 매달, 달마다 말일에 우리가 또박또박 받으러 가겠다고 말해.”

김두한은 팔짱을 끼고 단호히 말했다.

종로꼬마는 여전히, 불끈 쥔 주먹으로 탁자를 가볍게 토닥거리는

손장난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이제껏 여유가 있던 김동회는 다시 막막해지는 기분이 되었다.


달마다 200원이라면 결코 적은 액수는 아니다.

일순, 다께다의 미간이 흐려졌지만,

옆에 앉은 요시다의 눈이 깜짝 놀란 듯 휘둥그레졌다.

탁자를 토닥거리는 종로꼬마의 손장난에 점점 속도가 붙었다.

그것이 마치 어떤 단안을 내리기를 독촉하는 시각(時刻) 소리처럼 들렸다.

단순한 손장난 이상의, 권법(拳法)적인 비법이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다께다는 김두한의 쏘아보는 시선에 밀리면서 심경이 다급해졌다.

하기야, 달에 200원이라면 자신의 재력으로 감당 못 할 처지가 아니지 않은가.

다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김두한패가 달마다 사무실로 돈을 받으러 온다면 그건 정말 곤란하다.

첫째로 꼴사나운 일이다.

다께다구미의 체면이 뭐가 된단 말인가.

차라리 일시금으로 듬뿍 집어주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그렇게 하도록 해주시오!”

다께다의 뜻은 김동회를 통해 김두한에게 전달되었다.

“단번에 한몫으로 듬뿍 받아두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단번에 내놓으면 얼마나 내놓겠어?

한꺼번에 내놓자면 부담도 클 테고……,

이웃끼리 친하자면서 자주 만나는 것이 싫다면,

그럼 앞으로 친하지 말자 이건가?

일시불은 일시불대로, 한…… 500쯤 내놓고 달마다 200씩 내놓으라니까.

그러면 다시는 다께다구미를 치러 가지 않을 것을 약속하지!”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조용하게 말하던 김두한은 말하는 자기 자신이

오히려 타협을 간청하고 있는 것만 같아 스스로 비굴하게 생각되어

화가 난 듯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언성을 높였다.

“싫으면 그만두라고 해!”

통역이란 참 불편한 것이어서 상대방에게 의사가 직접적으로,

즉각적으로 전달이 되지 못하는 흠이 있다.

생각할 여유까지를 준다.

그것을 염려한 듯 김동회는 통역을 끝낸 다음 한마디 덧붙였다.

“다께다 상! 싫으면 그만두라고 하는데,

모처럼 나온 얘기니 이웃끼리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순순히 받아들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다께다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듯싶더니,

마침내 단안을 내린 듯 잘라 말했다.

“내놓지! 내놓겠어!”

그 한마디로 김두한의 표정도 풀렸고, 종로꼬마의 손장난도 멈추었다.

“그런데 말이오, 부탁이 하나 있소.”

모처럼 풀린 김두한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돈을 받으러 오더라도 낮에는 오지 마시오.

아무도 없는 밤 시간에 와주시고……,

이 소문이 밖에 새나가지 않도록, 우리끼리의 비밀로 덮어둡시다!”

“그것은 약속하지! 나도 의리가 있는 야꾸자니까, 핫핫핫!”

김두한은 비로소 헌걸차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야말로 온 서울 장안의 조선의 주먹계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 주먹패 혼마찌깡이나 남대문 시장패,

중국인 촌의 다께다구미까지 손아귀에 넣은 승리자의 너털웃음이었다.

그야말로 김두한은 하늘을 나는 흑룡의 기세였다.

하지만 어찌하랴.

세상이 언제까지나 그를 승리자로서 태평성대를 누리게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