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83

오늘의 쉼터 2014. 8. 27. 12:46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83 

 

 

방금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던 사나이가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조용히 앉아 있는 게 좋을걸!”

나직이 내뱉은 목소리와 함께,

뼈가 없는 문어 다리와 같은 곤또 용호의 어깨가 한번 흐느적거렸을 뿐인데,

언제 어디서 뽑아 어느 틈에 내휘둘렀는지 손뼘 길이만한 단검이 막 탁자를 짚고

일어서려는 사나이의 손끝 앞에 탁 꽂힌 것이다.  

일어서려던 사나이가 엉덩방아를 찧듯 주저앉은 것도 당연했는지 모른다.

곤또 용호는 승리에 겨운 듯한 엷은 미소를 띠면서,

그 특유의 흐느적거리는 자세로 한두 걸음 다가가 놈들이 둘러앉아 있는

탁자 끝에 엉덩이를 걸치며 말했다.

“내게 무엇을 요구하느냐고 묻는가? 뭐, 쓸모는 없지만 네놈의 목숨을 요구한다면?”

“내 목숨을? 당신에게 원한을 산 일이 없는 듯싶은데?”

사나이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네가 다께다인가?”

 

“그렇소만…….”

“그래? 하긴 원한을 산 일이 없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제부터 원한을 사지 않는 쪽으로 조심하는 것이 좋겠군.”

“어……, 어……, 어떻게 하면?”

“넌 토목 건축업이란 간판을 내걸고,

노가다 쪽 일보다는 중국인 촌을 무대로 아편 밀매업으로 재미를 보고 있다던데?”

“그런 일은 없소.”

다께다는 펄쩍 뛰듯이 말했다.

“없다고? 없다고 한다고 내가 순순히 물러갈 것 같아?”

“그래서 내 목숨을 노린다는 거요?”

“우리, 똑같이 나눠먹지 않고 혼자서 독차지하려 했다간 목숨을 노릴 수도 있지.”

“헛헛!”

다께다는 열없는 웃음을 너털거렸다.

“아니, 그만한 일로 목숨을 노린단 말요?”

그는 얘기가 길어지니까 다소 안심을 한 모양이었다.

또 단순히 돈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쉽게 얘기를 마무리지을 수 있겠다 싶었는지 모른다.

사색이 되어 있던 그의 얼굴에 비로소 생기가 돌았다.

“거절을 하면, 목숨과 바꾸자 할 수도 있지.”

“하지만 거절을 할 수밖에 없겠군.

목숨은 아깝지만, 아편 같은 것을 거래한 일이 없으니까.”

이제는 다께다 편에서 곤또 용호에게서 무슨 약점이라도 잡은 듯이 고개를 들먹거렸다.

곤또 용호는 일순 주춤했다.

이쯤 하면 쉽게 수그러질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고개를 발랑 젖히고 맞서오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칼을 뽑아 찌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찌르고 일본에서 쫓겨 온 몸이 아닌가.

그는 주저했다.

그러자 역습의 무슨 대단한 계기라도 잡은 듯이

다께다가 제법 다부진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하찮은 일로……. 당장 경찰을 부르겠어.”

그러자 이제 참을 수 없게 된 것은 종로꼬마였다.

 

원래 불처럼 성미가 급한 종로꼬마였다.

그는 처음부터 싸움을 하러 온 것이지,

어떤 흥정을 하거나 이야기를 주고받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일본말을 대충 알아듣기는 해도 유창하게 지껄일 줄을 몰라,

곤또 용호가 대신 트집을 잡고 나선 것이다.

곤또 용호는 과연 일본 야꾸자 출신의 고로스께답게 처음에는 선수를 잘 치고 나섰다.

이죽거리듯 빈정거리는 투며, 내던진 단도의 솜씨도 비상한 듯했다.

그것으로 상대의 기선을 잡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도대체가 말이 긴 것이다.

말이 많고서 싸움이 될 턱이 없었다.

그동안 종로꼬마는 지루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입구 쪽과 가까운 벽면에 걸려 있는 전화기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 시절의 전화기는 요즘의 그것처럼 탁자 위에 놓여 있어

버튼만 누르면 통화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 않았다.

대개 벽이나 기둥에 매달려 있었고,

한 대의 전화기에 송화기와 수화기가 따로따로 붙어 있었다.

한번 통화를 하려면 버튼을 누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수화기를 들고 옆에 달린 핸들을 몇 번씩 돌려 교환수를 호출하여

상대방의 번호를 대고, 그런 연후에 통화를 할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많지도 않은 전화만이 가장 신속한 연락 방법이었다.

종로꼬마의 시선이 전화기에 멎은 것은,

만약 싸움이 붙게 되고 이에 열중하게 되었을 때,

일본패들이 전화로 경찰에 연락이나 취하지 않을까 염려되어서였다.

전화통을 부숴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막 수화기를 집어들었을 때였다.

얘기가 길어지면서 어느 만큼 여유를 찾게 된 다께다가 오히려 위협하듯이 말한 것이다.

경찰을 부르겠다고.

그렇지 않아도 이를 염려했던 종로꼬마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게이사쓰(警察)’란 한마디가 그의 청각을 민감하게 자극한 것이다.

“뭐, 경찰을 부르겠다고?”

그는 막 집어든 수화기를 힘껏 낚아채듯 하며 코드째로 이를 후드득 끊어버렸다.

“부를 테면 불러봐.

뱃속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친 것과 동시였다.

코드째로 끊은 수화기를 다께다의 면상을 향해 내던졌다.

다께다는 찰나적으로 날아드는 수화기를 피하려고 탁자 밑으로

머리를 수그리려고 했으나 총알처럼 날아드는 그것을 완벽하게 피하지 못했다.

“으으윽.”

수화기를 피하려고 머리를 수그리다가 오히려 머리 부분에 맞고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면서 한쪽 무릎을 꿇듯이 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곁에 있던 일본패 하나가 다께다를 감싸듯 하고 함께 주저앉았으나

나머지는 깜짝 놀라서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고노 야로(이놈아).”

“무슨 짓이야? 요보(조선인을 멸시한 호칭)인 주제에.”

갑자기 일본패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분노로 인하여 흥분 어린 함성과 함께

일제히 달려들어 반격을 가해 올 기세였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쥐도 고양이에게 덤벼든다지 않는가.

회의실 안에 갇혀 퇴로를 잃은 일본패들이 활로를 열겠다는 듯

일제히 종로꼬마 쪽으로 밀려왔다.

일순 종로꼬마는 주저했다.

순간적으로 중과부적인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고 속수무책, 맨송맨송 당하고 있을 그가 아니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앞장선 놈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일본놈은 ‘윽’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정강이는 급소다.

정강이를 정확하게 걷어채고 쓰러지지 않을 자는 없다.

두 번째로 다가서는 놈의 턱에 전광석화와도 같은 일격을 가했다.  

놈은 턱주가리를 움켜잡으면서 엎어졌다.

다른 한쪽에서도 비명 소리가 들렸다.

곤또 용호가 번갯불같이 칼부림을 한 것이다.

피를 뿌리면서 뒷걸음질치는 놈의 허벅지에 영락없이 S자 형의 상처 자리가 났을 것이었다.

일본패들이 주춤하는 사이 종로꼬마는 언제든지 날아들 자세로 작은 몸을 가누면서,

그러나 다소 꽁무니를 빼고 뒷걸음으로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아무리 중국 십팔계에 통달한 솜씨라고는 하지만,

비좁은 공간에서의 싸움은 불리하다.

워낙 모집이 작기 때문에, 유도(柔道)라도 하는 육중한 사나이에게 붙잡히면,

그 힘에 밀려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종로꼬마가 뒷걸음질친 것은 좀더 넓은 공간으로 유인하기 위해서였다.

회의실과 맞붙은 사무실은 회의실보다 세 배 정도 넓었다.

사무실 안의 사무원들은 그사이 어디로 뺑소니를 쳤는지 텅 비어 있었다.

뒷걸음질쳐 사무실 쪽으로 나온 종로꼬마는 심청과 다루마찌에게 눈짓으로

산개(散開)하여 싸울 것을 지시하고 자기 자신은 회의실과 가까운 쪽의

빈 테이블 위로 깡충 뛰어올랐다.

만석 번개와 심청이 종로꼬마의 왼쪽으로, 곤또 용호와 다루마찌가 그 오른쪽에

포진하고는 회의실에서 몰려나올 상대를 기다렸다.

그러나 일본패들은 회의실에서 사무실로 얼굴을 내미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

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무엇 우물거리고 있는 거냐? 비겁하게 굴지 말고 어서 나와 맞서란 말야!”

곤또 용호가 일본 야꾸자패 특유의 이죽거리는 어투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의 말에 정말 고무되기나 한 것처럼 고릴라 같은 거구의 사나이가

고릴라 같은 걸음걸이로 사무실 밖에 모습을 보였다.

그 고릴라 같은 걸음걸이야말로, 그 나름대로의 임전 태세인 것이다.

고릴라 같은 놈 뒤로 하나, 둘, 셋, 그래도 용기 있는 놈들이 뒤쫓아 나왔다.

그들도 그래도 노가다판이나 싸움판에서 굴러먹은 한가락 하는 놈들인 것은 분명한 것이다.

탁자 위에 버텨 서 있는 단구의 종로꼬마를 치켜 올려다보면서,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좌우로 흩어져 있는 종로패에 겁먹은 경계를 아울러 하면서,

이들은 꾸역꾸역 회의실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이제 탁자 위에 버텨 선 종로꼬마는 더 이상 기다리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깨달은 것과 그가 탁자 위에서 훌쩍 몸을 날린 것은 동시였다.

그는 몸을 날린 것과 함께,

앞장선 고릴라 같은 사나이의 어깨를 두 발로 짓이기듯 짓밟아버렸다.

고릴라 같은 사나이는 힘도 써보지 모하고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그다지 힘도 들이지 않은 것 같은데 꽈당,

마룻바닥이 깨질 것 같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나둥그러진 것이다.

그러자 사나이의 어깨를 탔던 종로꼬마의 두 발은,

어깨에서 내려옴과 동시에 곁의 놈 둘을 한 발에 하나씩 걷어찼다.

두 놈의 커다란 덩치가 고릴라 같은 사나이의 몸집 위에 겹치면서 쓰러졌다.

맨바닥에서 튀어 올라 상대방의 어깨를 짚고,

그 면상을 걷어찰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는 그가,

높은 탁자 위에서 뛰어내리면서 차는 것은 식은 죽 먹듯 수월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아무 놈이나 닥치는 대로 후려갈기고 걷어찼다.

그의 주먹과 발길이 스쳤다 하면 영락없이 하나씩 쓰러졌다.

그의 양편에서도 번개 만석과 심청, 그리고 곤또 용호와 다루마찌가

종로꼬마에 질 수 없다는 듯 치고 받고 걷어차는 난투극을 벌였다.

그야말로 처절한 백병전이라고나 할까.

언제나 싸울 때면 그러했지만, 종로꼬마는 몰아경(沒我境)에 빠졌다.

일종의 황홀경에 젖어버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분별을 하지 못했다.

그것이 그의 결점이라면 결점이었다.

회의실 안에 있었던 패거리들의 수효도 적지는 않았지만,

돌연 아래층에서 요란하게 계단 소리를 울리면서 뛰어오르는 무리들이 있었다.

으레 밖에서 망을 보고 대기하고 있던 종로 패거리려니 했다.

그러나 2층으로 뛰어오른 것은 뜻밖에도 일본패들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몰려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손에는 저마다 망치며 칼이며 끌과 같은 흉기를 지니고 있었다.

밖에서 망을 보고 있는 김두한이나 그 밖의 종로패들은,

달려온 이들을 제지하지 못하고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사실 이들 노가다패들은 아래층 뒤쪽에 있는 별동 건물에 있었다.

종로꼬마를 위시한 종로패가 2층으로 쳐들어가자,

아래층에 있던 사무원이 별동 건물로 달려가서 위급을 알린 것이었다.

이를 거리 요소요소의 길목을 지키고 있던 김두한패가 알아챌 방법이 없었다.

갑자기 협공을 당하게 된 셈이다. 종로꼬마는 번뜩 제정신이 들었다.

“빨리 두한에게 알려!”

그는 다루마찌 쪽을 향해 소리치면서,

계단 위로 뛰어오른 무리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훌쩍 뛰어오르는가 싶었던 그는 그대로 허공에서 수평이 되다시피 몸을 누이고는

꼿꼿하게 뻗은 예리한 두 발끝을 앞장선 놈의 앞가슴에 그대로 꽂았다.

망치를 쥐고 있던 놈이 이를 한 번도 휘둘러보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막 계단을 뛰어오르던 무리들이 주춤 물러섰다.

그러자 다루마찌가 재빨리 바닥에 굴러 떨어진 망치를 주워들었다.

무서운 흉기를 빼앗긴 일본패들이 겁에 질린 듯 눈이 휘둥그레지고 사색이 되었다.

그러나 다루마찌는 일본패를 향해 망치를 휘두르지는 않았다.

민첩하게 창가로 다가가더니, 유리창을 창틀째로 때려부수는 것이었다.

쨍그렁 와장창, 유리창 틀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박살이 났다.

깨어진 창틀 안으로 겨울을 재촉하는 저녁 바람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어느덧 어슴푸레한 황혼이 깃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다음 순간, 다루마찌는 날렵하게 창턱으로 뛰어오르더니

2층에서 투신 자살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대로 아래쪽 길을 향해 몸을 날리는 것이었다.

이미 언젠가 소개한 일이 있는 것처럼 ‘다루마찌’란

그 시절 미국의 활극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이었다.

빌딩과 빌딩 사이를 고양이처럼 뛰어넘고,

까마득한 고층 건물에서 가뿐하게 뛰어내리는,

요즘의 아동물 환상 영화의 주인공 ‘황금박쥐’나, ‘6백만 불의 사나이’ 같은 슈퍼맨이었다.

그 활극 영화의 주인공 이름을 별명으로 딴 다루마찌도,

지붕과 지붕 사이를 타고 다니고, 높은 담을 깡충깡충 잘도 뛰어넘었다.

그의 주업인 좀도둑질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진짜 다루마찌처럼 빌딩과 빌딩 사이를 뛰어다니지는 못했다.

까마득한 고층 건물에서 가뿐하게 뛰어내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2층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누워서 팥떡 먹기 정도로 수월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는 2층 정도에서 뛰어내릴 때면, 모둠발로 뛰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앙감질로 뛰어내렸다.

모둠발로 뛰어내리면, 뛰어내린 뒤 다음 행동이 한 박자 늦기 때문이다.

오른발 하나로 뛰어내린 뒤, 다음의 왼쪽 한 발은 벌써 뛰기 시작하는 것이다.

가히 다루마찌의 별명이 어울릴 만했다.

바람처럼 2층에서 뛰어내린 다루마찌는, 뛰어내린 여세로 구르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호떡집에서 호떡을 먹으면서 기다리고 있는 김두한과 그 패거리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호떡집에 이르기도 전에 김두한과 그 패거리와 마주쳤다.

이미 다께다구미 사무실에서 후닥닥, 우지끈, 와장창, 맞붙어 싸우는 소리를 듣고

길목을 지키고 있던 똘마니가 보고를 한 모양이었다.

유난히 호떡을 좋아하는 그가 이를 쭉쭉 찢어 먹고 있을 때였다.

“뭐, 종로꼬마가 어련히 알아서 싸우려구…….”

보고를 듣고서도 김두한은 그다지 서두르지 않았다.

남은 호떡을 마저 입 안에 쑤셔넣고 난 다음에야 그 커다란 엉덩이를 일으켰다.

아직도 입 안에 든 것을 우물거리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는 어느 결에 뒷주머니에서 홑겹의 얇은 가죽 장갑을 꺼내 끼는 것이었다.

 싸울 때면 항상 애용하는 바로 그 가죽 장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