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부여헌(扶餘軒) (34)
후에 이 소문을 전해들은 신라 사람치고 육사(六邪)가 날뛰는 조정에서
홀로 우뚝하게 충절을 지킨 도비의 올곧은 처신과 찬덕 부자에 대한 그의 깊은 정리를
찬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미구에는 백성들의 자자한 칭송이 왕의 귀에까지 이르니
눌최가 그 후덕으로 마침내 벼슬길에 나서게 되었다.
해론의 장가를 지었던 이가 도비의 무덤에도 시문을 지어 다음과 같이 칭덕하였다.
양춘화기(陽春和氣)에는 초목이 다투어 꽃이 피나
엄동세한(嚴冬歲寒)이면 오로지 푸른 것은 송백(松柏)뿐이로다
만정(滿廷)의 침묵을 한마디 말로써 깨뜨리고
산 충신과 죽은 충신을 모두 지킨 용기가 진실로 아름답구나
위국단충(爲國丹忠)이 반드시 전장(戰場)에만 있을손가
어진 이의 생사(生死)는 꺼지지 않는 등촉이 되어 만대를 흐를진저
그러나 가잠성을 되찾은 이후로도 신라의 혼미한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충직하고 지조와 절개가 곧은 신하들은 지방의 한직을 맡아 쫓겨났고,
대궐에는 술수와 이재에 밝고 아첨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인의 장막을 이루어
가뜩이나 우유부단한 왕의 성총을 더욱 흐려놓곤 하였다.
권세를 탐하고 대신이 되려는 자들은 궐 밖 백반의 사저에 구름같이 모여들어
백반의 집은 연일 잔칫집을 방불케 했으며,
그곳을 자주 들락거린 자는 반드시 없던 재주며 덕이 생겨나서 천하의 면력박재(綿力薄才)도
금세 불세출의 영걸(英傑)이 되어 하루아침에 거기(車騎)를 타고 대궐을 드나들었다.
백반은 궐 밖에 물러나 있으면서 오히려 자신의 세력을 더욱 공고히 만들고자 애썼다.
가잠성 사건이 있고 나서 특히 그가 집착한 곳은 나라의 병권을 좌우하는 병부였다.
그리하여 자신을 정성껏 따르던 파진찬 염종(廉宗)을 또 한 사람의 병부령으로 천거하여
외주의 군사들을 감독하도록 하고, 역시 자신의 심복인 사찬 석품을 병부제감(兵部弟監) 2인의
윗자리에 두어 훗날 병부대감(兵部大監) 직을 신설할 근거로 삼았다.
염종은 전날 상대등을 지낸 노리부의 차자이자 용춘의 손에 죽은 역부의 아우인데,
그 모계가 왕실의 족친인 까닭에 궐내 3궁(三宮:大宮, 梁宮, 沙梁宮) 가운데 사량궁의
사신(私臣)을 맡고 있다가 병부령을 겸직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병부령을 2인으로 둔 것은 그간의 관례를 뒤엎는 것으로,
백반이 상대등 임종과 의논하면서 새삼스레 진흥왕조의 선례를 들어 병부령을
두 사람으로 해야 한다며 염종을 천거하였고, 임종이 다시 왕에게 말하면서,
“지난번 외주의 군사들이 함부로 움직인 것과 같은 일이 다시 있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하니 왕도 마지못해 허락하게 되었다.
이 외에도 백반은 3궁의 사신을 비롯해 대궐의 움직임을 파악하거나 실권을 행사할 수 있는
요직에는 반드시 자신의 심복을 심어놓았으며,
그러자니 자연 벼슬을 원하는 자들은 많은데 자리가 부족하므로 전조의 선례를 샅샅이
계고하여 실낱 같은 근거라도 있으면 새로운 자리와 직책을 만들곤 했다.
나라의 권력이 오랫동안 왕제 백반에게 있고 항차 백정왕도 나이를 먹고 늙어갈수록
젊었을 때의 분별력이 급속히 떨어져서 만사를 신하들의 결정에 맡겨 정사를 펴는 형국인지라
국력은 쇠하고 민심은 점점 어지러워졌다.
그나마 신라가 일조일석에 망하지 않았던 것은 외주에 나간 몇몇 충신들이 나름대로
향군을 기르고 맡은 강역의 경계를 튼튼히 한 덕택이었다.
그러나 장구한 세월에 걸쳐 외주를 떠돌던 충신 가운데는 천수를 다하여 죽는 사람도 없지 않았고,
또는 당초의 올곧은 절개를 꺾고 백반에게 허리를 굽히는 자도 꽤나 생겨났다.
용춘의 역모 사건이 났을 때 이찬에서 파진찬으로 벼슬이 강등된 이리벌은 임술년(602년)에
백제와 벌인 모산성 싸움과 이듬해 북한산을 공격한 고구려와 대전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웠으나
이후 그 선친의 뒤를 이어 북방 국경의 하슬라주(何瑟羅州:강릉) 군주로 나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병을 얻어 세상을 뜨고 말았다.
또한 갑술년(614년)에 일선주(선산)를 만들고 그곳의 초대 군주로 나갔던 후직의 아들 일부도
끝내 금성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천수를 마쳤으며,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물외한인으로 지냈던
거칠부의 아들 장연도 늘 술로 세상을 한탄하다가 쉰을 갓 넘긴 나이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한편 처음에는 백반에게 반감을 가졌다가 차차 위세를 절감하고 절개를 꺾은 이로는
고우덕지와 덕활의 손자 어생이 있었으며, 이사부와 거칠부 이후 명장 소리를 들어온 건품,
비리야와 같은 늙은 장수들도 이리벌이 죽고 나서는 철마다 백반의 집에 문안 인사를 다니는
처지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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