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부여헌(扶餘軒) (33)
이에 집안 식솔들이 모두 걱정하며 지내는 가운데 8월 보름이 돌아왔다.
명절 전날 해론의 처가 아장아장 걷는 자식을 앞세우고 도비에게 인사를 오니
도비가 해론의 아들을 무릎에 앉힌 채로 오랫동안 눈시울을 붉히다가,
“내일은 용춘공의 댁에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가봐야겠다.
아무래도 그가 너무 오래 은둔하는 것 같구나.”
하고서,
“너희도 오늘 내 집에서 자고 날이 밝거든 용춘공의 댁에를 같이 가자.
전날 찬덕이 용춘공의 낭도였으니 너희가 가면 되우 반가워할 것이다.”
하여 그러기로 하였는데, 바로 그날 밤 도비의 집 별채에서 잠자던 해론의 처가 들으니
안채에서 별안간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한밤중에 난데없이 웬 웃음소린가 궁금도 하려니와 그러구러 차차 소피도 마려워져서
살금살금 별채를 빠져나오니
때마침 안채의 방문이 열리고 건장한 남정네들이 걸어 나와 마당에 내려섰다.
아직 젊은 해론의 처가 야밤에 남자들과 맞닥뜨리기 기탄스러워 얼른 걸음을 멈추고
담벼락에 숨어 보니 구름에 가린 어스름 달빛 아래 세 사람이 등을 돌린 채로 섰는데,
한 사람은 젊고, 또 한 사람은 젊지도 늙지도 아니하고,
맨 마지막에 나온 늙은 사람은 도비가 분명했다.
“길이 한두 마장이 아닙니다. 정말로 같이 가시렵니까?”
제일 먼저 나온 늙지도 젊지도 않은 사람이 뒤를 돌아보며 묻자
도비가 허공에다 대고 팔을 휘휘 내저었다.
“장부 일언일세. 어서 앞장서게나!”
“가는 것은 좋지만 한번 가면 오지 못할 길인데 식구들이나 두루 만나보고 천천히 오시지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만 기왕 자네들이 왔으니 동무 있고 마음먹었을 때 나서지.”
그러자 그때껏 잠자코 있던 젊은 사람이 활발한 몸짓과 우렁찬 소리로,
“생각 잘하셨습니다!
어차피 인간지사가 물에 비치는 그림자요,
생사의 나무 그늘 아래서 꾸는 한판 허무맹랑한 춘몽이온데
이놈의 손바닥만한 나라에 살며 아웅다웅할 까닭이 있습니까?
소자가 두 분 어르신을 뫼시고 좋은 곳을 찾아갈 테니 따라만 오십시오!”
말을 마치자 활개를 치며 앞장을 섰다.
바로 그때 고개를 살며시 빼고 구경하던 해론의 처가
그만 자지러질 듯이 놀라 맨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비록 어스레한 달빛 밑이긴 해도 그 젊은 사람은 틀림없이 죽은 해론이었던 것이다.
“내가 꿈을 꾸는 거야, 아무렴 꿈이고말고……”
한동안 넋을 잃은 채로 몇 번이나 제 살점을 꼬집어보던 해론의 처가 한참 만에
그것이 생시인 줄을 알고는 황급히 그들을 쫓아가서 보니
대문은 활짝 열려 있고 천지는 적막한데 집을 나간 사람들의 종적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오밤중의 소란을 듣고 깨어난 사람은 비단 해론의 처만이 아니었다.
문간채에 있던 종명궁 벌구도 안채의 웃음소리에 잠을 깼다가 대문 여는 소리에 놀라
달려 나와 보니 해론의 처가 문간 앞에 사색이 되어 서 있는 게 보였다.
“주무시다 말고 어인 일입니까?”
벌구의 기척에 해론의 처가 화들짝 놀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보소, 내가 방금 전에 희한한 일을 다 보았소.”
하고는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벌구가 해론의 처한테서 도무지 믿기 힘든 소리를 듣고서,
“에이, 그럴 리가 있습니까요.”
하며 빙긋이 웃긴 했으나 대꾸를 하는 도중에 문득 기이한 느낌이 들어,
“하긴 소인도 이상한 소리를 듣고 나오는 길입니다요.”
하고는 그 길로 눌최에게 달려갔다. 벌구의 얘기를 들은 눌최가,
“기력도 없으신 어른이 이 야밤에 어디로 가셨단 말이냐!”
하며 허겁지겁 안채로 달려갔다.
“아버님, 안에 계십니까?”
“별일이 없으신지요?”
눌최가 어간대청에 서서 두어 차례 거푸 기척을 내었지만
등촉이 환히 켜진 도비의 방에서는 아무런 응대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문을 살며시 열었더니 대문으로 나갔다는
도비가 등을 보인 채로 베개를 베고 모로 누웠는지라,
“그럼 그렇지, 가긴 어딜 가셨다고 그래. 아이 엄마가 잠결에 헛것을 본 게야.”
비로소 안심을 하고는 문을 닫고 나오려다가 아무래도 미심쩍어 다시 들어가서 살펴보니
이미 도비는 이승 사람이 아니었다.
충신 도비의 최후가 그러했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6장 부여헌(扶餘軒) (35) (0) | 2014.08.27 |
---|---|
제16장 부여헌(扶餘軒) (34) (0) | 2014.08.27 |
제16장 부여헌(扶餘軒) (32) (0) | 2014.08.27 |
제16장 부여헌(扶餘軒) (31) (0) | 2014.08.27 |
제16장 부여헌(扶餘軒) (30) (0) | 2014.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