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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부여헌(扶餘軒) (31)

오늘의 쉼터 2014. 8. 27. 10:15

제16장 부여헌(扶餘軒) (31)

 

 

 

“지금 변품공과 장춘공을 징벌하자는 자들은 결코 전하의 신하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십중팔구 다른 사람을 섬기는 간신배들입니다.

아마도 그런 무리들은 백제나 고구려가 군사를 앞세워 쳐들어오면 제일 먼저 도망갈 자들이

틀림없습니다.

찬덕과 해론 부자인들 어찌 하나뿐인 목숨이 아깝지 않을 것이며, 살고자 하는 욕심이 없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들 부자는 싸움터에서 쾌히 목숨을 바쳤으니 진실로 충절이라 함은 바로 그런 것이옵니다.

충절을 지킨 충신은 역적이 되고 구적을 보고도 몸을 사리는 자들은 나라의 중신이 된다면,

그런 나라가 망하는 것은 필지의 일입니다.

시류가 이와 같은데 어찌 전날 후직과 같은 양신이 나올 것이며,

또한 황종 장군이나 무력 장군과 같은 걸출한 장수가 나오겠습니까?

항차 일전에 3주의 군주를 모두 바꾼 것은 전날 가잠성을 잃은 책임을 물은 것이었는데,

이제 성을 되찾은 사람들에게 상을 내리지는 못할망정 벌로써 다스리려 하니

신은 이 같은 중신들의 공론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입으로 충절을 말하는 자들은 본래 구름같이 많은 법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목숨을 던져가며 충성과 절개를 몸소 행하는 자는 백에 하나, 천에 하나가 어렵습니다.

지금 조정에 수많은 중신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과연 찬덕이나 해론과 같은 이가 하나라도 있을까

의문입니다.

전하께서는 지금이라도 절개가 곧고 덕망이 높은 충신들을 중용하여 이들과 함께 친히 국사를

의논하셔야 됩니다.

신라는 그야말로 진창 속에 빠진 수레의 형국이며 중병을 앓는 병자와도 같습니다.

수족을 자르는 커다란 결단과 아픔 없이는 작금의 환난에서 헤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나라의 명운이 풍전등화와 같음을 부디 살피시고 신의 간곡한 충언을 깊이 헤아려주소서!”

노신 도비의 눈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눈물이 샘솟듯 흘러내렸다.

그는 이미 생사의 문제 따위는 초월한 사람처럼 보였다.

평소 친아들처럼 여기던 해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나자 크게 낙담해 한동안은

음식조차 입에 대지 않았던 그였다.

비록 백반 일패가 장악한 조정이었지만 죽음을 각오한 노신의 충간에 압도된 탓인지

중신들도 마침내는 입을 다물고 침묵하였다.

“공의 말은 과인의 마음을 흡사 바늘로 찌르는 것과 같구나.”

좌중의 침묵을 깨고 드디어 백정왕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장춘과 변품이 왕명도 받지 않고 임의로 군사를 움직인 소행은 비록 국법을 어긴 것이지만,

이는 나라에 보탬이 되고자 한 일이므로 불충이라 말할 수 없다.

게다가 2천이나 되는 군사를 잃었다고는 해도 마침내 성을 얻었으므로 굳이 공과를 논하자면

공이 허물을 덮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들 양인에게는 마땅히 상을 내려 만인의 귀감으로 삼음이 타당하다.

장춘에게는 파진찬의 벼슬을 내리고 변품에게는 아찬의 벼슬을 주어

그대로 한산주에 머물도록 하라. 또한 해론은 그 아버지 찬덕과 함께 양대에 걸쳐

신라인의 위용을 과시하고 아름다운 절개를 만방에 떨쳤다.

그의 시신을 거두어 성대하게 장사지내고 남은 식솔들에게는 후한 상을 내려 구휼토록 하되,

시문에 능한 자를 골라 장가(長歌)를 지어 두 부자의 영령을 함께 위로하게 하라.”

이리하여 장춘과 변품은 가까스로 화를 모면하였고,

 해론의 시신도 그 처자와 같이 금성으로 돌아와 땅에 묻혔는데,

해론의 장사를 지내고 얼마 안 있어 도비에게 돌연 변고가 생겼다.

그날따라 일찍 저녁상을 물린 도비가 갑자기 집에서 일하는 하인을 부르더니,

“오늘은 아무래도 해론이 올 것 같으니 대문을 활짝 열어놓아라.”

하고 말하였던 것이다. 하인이 문득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누가 온다고 하셨습니까?”

하고 묻자 도비가 다시 한 번 또렷한 소리로 해론이 올 거라고 말하므로,

“나리, 해론 도령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 어찌 대문을 열어놓으라 하십니까?”

하니 한참 동안 하인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도비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그래, 그랬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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