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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부여헌(扶餘軒) (32)

오늘의 쉼터 2014. 8. 27. 10:18

제16장 부여헌(扶餘軒) (32)

 

 

 

벌구(伐仇)라는 그 하인은 늘 도비의 아들인 눌최를 따라다니는 충복이었는데,

기운이 세고 특히 활을 잘 쏘아 ‘종명궁’이란 소리를 들었다.

벌구가 처음에는 마소도 먹이고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며 살았으나 기질이 괄괄하고

욱하는 성미가 있어 그를 좋게 말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하루는 눌최가 별배들 틈에서 대나무 가지로 장난삼아 궁척(弓尺) 놀이를 하던 벌구를 보고는

그 재주가 비범한 것을 알고,

“너는 비록 하찮은 신분이나 남이 부러워하는 재주를 지녔구나.

재주가 어찌 반드시 부귀빈천을 따라서만 생기겠느냐.

내가 어른들께 잘 말씀을 드려 집안의 궂은 일에서는 빼줄 터이니

앞으로는 나를 따라다니며 재주를 마음껏 갈고 닦도록 해라.”

하니 벌구가 좋아 어쩔 줄을 몰라하였는데, 이때부터 눌최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벌구가 있고,

벌구가 나타나는 곳에는 반드시 눌최가 있었다.

그러나 벌구가 본래 생긴 것이 우락부락하고 눌최 외에는 다른 누구 앞에서도 공손하게 구는 법이 없자 주위 사람들이 쑤군덕거리기를,

“종놈 주제에 건방지다.”

“제까짓 놈이 아무리 재주가 있어봐야 개 발에 편자지.

만년을 살아봤자 남자 애 낳는 것을 보겠는가, 종놈이 활질 할 일이 있는가?”

“그놈 참 볼수록 가관일세. 종놈 재주도 재주라고 상전이 자꾸 추어주니

꼴에 벼슬이라도 나갈 양으로 믿는 모양이지.”

이런 소리들은 당자가 듣지 않는 데서 하였고,

“저 종은 눈매가 검측스럽고 포악한 데가 있어 결코 좋은 상이 아니요,

또한 소인으로서 특이한 재능이 있으면 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드무니 마땅히 멀리해야 될 것이오.”

더러는 눌최의 귀에 대고 점잖게 충고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마다 눌최는 그저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한번은 눌최가 처음 용화향도가 되어 수련을 갈 적에 벌구를 데려가서 함께 지내려고 하였는데,

본래 천민들은 풍월도를 따르지 못하는 법이라 낭도들이 벌구가 종인 것을 알고는

모두 노발대발하여 하는 수 없이 돌려보낸 일도 있었다.

종명궁 벌구가 도비한테서 석연찮은 느낌을 받고 곧장 눌최에게로 달려가 자초지종을 고하니,

해론을 잃고 역시 실의에 잠겨 지내던 눌최가 황급히 안채로 달려갔다.

그런데 자려고 누웠던 도비가 달려온 눌최를 보더니 별안간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벌떡 일어나서,

“어서 오너라. 그러잖아도 내가 오늘 너 올 줄을 알고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다.”

하고는 눌최의 손을 와락 거머쥐고 손등을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금산서 고생은 아니했느냐?”

“어디 보자, 몸이 많이 축이 갔구나.”

“그래, 처자는 다 무고하지?”

도비가 눌최를 붙들고 자불자불 다감스럽게 물어보는 품이 영락없이 죽은 해론에게 하는 말이었다.

눌최가 억장이 무너지는 참담한 심정으로 늙은 아버지를 대하고 섰다가,

“소자, 눌쵭니다.”

하니 도비가 그때서야 화들짝 놀라며 아들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해론은 어디 갔느냐?”

“아버지, 해론의 일은 이제 그만 잊으십시오. 엊그제 장사를 치르지 않았습니까?”

“……그랬느냐.”

그리고 도비는 시무룩이 풀죽은 모습으로 자리에 가서 누웠는데,

뒷날서부터 출면도 못할 정도로 기력이 나빠져서 관에 등청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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