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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부여헌(扶餘軒) (35)

오늘의 쉼터 2014. 8. 27. 10:29

제16장 부여헌(扶餘軒) (35)

 

 

 

백반은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가차없이 굴었지만, 허리를 굽혀 찾아오는 자들에게는 언제나 응분의 대접으로 환심을 샀다. 특히 한때 반감을 가졌던 이들의 훼절에는 더욱더 그러했다. 그는 변방의 한직으로 나가 있던 고우덕지가 비번인 날을 택해 인사를 오자 웃음소리가 울 밖에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기꺼워하며,

“자네가 외관에 너무 오래 있었지? 내가 조정에 있을 때는 전하께 가끔 자네 말을 하였는데 아직 그대로인 걸 보니 아무래도 성총이 전만 같지 않은 모양이야.”

마치 모든 것이 왕의 책임인 양 말하고서 즉시 사람을 보내 위화부 책임자인 이찬 대일을 불렀다. 대일이 기별을 받고 허겁지겁 달려오자 백반이 새삼스럽게 전날 성왕의 목을 벤 고우도도의 일을 말하며,

“공은 내일 입궐하는 대로 전하께 삼산 장군의 일과 그 자제가 오랫동안 외관에서 고생한 것을 함께 아뢰고 문벌을 높여 금성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힘을 써보오. 내 생각으로는 품주(후일의 집사성)의 전대등(典大等:次官) 직이 어떨까 하오.”

자신이 직책까지 정하여 일렀다. 고우덕지가 돌아가고 나자 대일이 백반에게,

“품주는 나라의 기밀사무를 보는 곳이요, 그곳의 전대등은 궐내 요직 중의 요직입니다. 고우덕지는 용춘공이 천거하여 벼슬길에 나선 자인데 과연 그래도 후탈이 없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백반이 호탕하게 껄껄 한참을 웃고 나더니,

“거자막추(去者莫追)요 내자물거(來者勿拒)라,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 것이 평소 나의 소신이 아니었소? 아마 모르긴 해도 저 자는 용춘의 천거로 벼슬길에 나선 것을 원망한 지 오래일 게요. 그런 자가 어디 한둘이겠소? 이제 두고 보면 알겠지만 앞으론 낯선 자들이 많이 찾아오지 싶소. 절문이 번성하자면 부처도 먼저 오는 자에게 영험을 주어야지.”

하고서 문득 웃음을 거두며,

“품주의 대신이 임종공의 아우 월종이요, 그가 이미 내 집을 조석으로 드나드는 사람인데 전대등을 누구로 삼은들 무슨 후탈이 있겠소?”

하고 반문하였다. 20년 소수나 벽지 외근을 전전했던 고우덕지가 백반에게 인사를 다녀온 지 불과 열흘 안쪽에 벼슬이 올라 품주의 전대등으로 왕명을 받고 부임하자 그와 친했던 어생도 며칠을 고민하다가 끝내 백반을 찾아갔고, 역시 변절의 덕으로 영전하여 금성에서 예부의 관직을 맡아 다니게 되었다.

본래 벼슬이란 한 나라의 근본이요 정사를 펴는 벼리라 그 운용이 다른 어떤 일보다 공명정대해야 하는 법인데, 백정왕의 신라는 말년으로 갈수록 바른 길을 버리고 사사로움과 횡도를 취할 따름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왕의 주변에는 나날이 간신배와 아첨꾼이 꼬여들고 정직한 이는 자연히 도태되거나 수난을 당하게 마련이었다. 그것이 두려우면 스스로 관직을 버리고 물러나거나 혹은 옳지 못한 일을 보고도 침묵하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신하들간에도 서로 중상과 모략이 횡행하고 비방과 탄핵이 꼬리를 물어 식구가 아니면 사담조차 함부로 나눌 수 없는 살벌한 풍토가 조성되었다. 죽은 도비와 함께 벼슬길에 나섰던 내마 설담날은 궐 밖 사석에서 나랏일을 걱정하다가,

“대개 나라에서 산곡간을 뒤져 사람을 구할 때는 성세요, 사람이 벼슬을 원하여 궐로 모여들 때는 난세인데, 지금은 오방 잡처에서 벼슬을 얻으려고 운집한 자들로 경사가 붐비니 참으로 걱정일세.”

하고 말한 일이 있었다. 일생을 백정왕의 조정에 바친 노신으로선 으레 할 법한 걱정이었으나 그는 임금에게 불경한 죄를 저질렀다며 크게 모욕을 겪었고, 드디어는 그 일로 말미암아 맡고 있던 관직에서 파직되었다. 그나마 귀양살이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담날의 형이자 젊어서부터 발이 넓기로 소문난 설문보가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아우의 선처를 부탁한 덕택이었지만, 문보도 이 일이 있고 나서 더는 험한 꼴을 보기 싫다며 벼슬을 내놓고 스스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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