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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부여헌(扶餘軒) (30)

오늘의 쉼터 2014. 8. 27. 09:54

제16장 부여헌(扶餘軒) (30)

 

 

 

그러나 신라에서는 사정이 이보다 약간 더 복잡했다.

성을 되찾은 것은 뒷전이고 오직 문제가 된 것은 변품과 장춘이

외주의 군사들을 함부로 움직였다는 점이었다.

“이는 반역에 버금가는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땅히 두 사람을 대궐로 불러 엄중히 문책하고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옳을 줄 압니다.”

병부령 칠숙의 주장에 상대등 임종도 백발을 조아리며 편을 들었다.

“만일 이같은 일을 벌하지 않는다면 장차 불충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변품과 장춘을 징벌하는 것은 국기를 바로잡는 일로, 이는 변방의 성곽 하나를 얻거나 잃는 것과는

그 격이 다릅니다.

더구나 가잠성 하나를 되찾으며 2천이나 되는 막대한 군사를 잃었으니 어찌 이를 공이라 하겠나이까.

병부령의 주청을 가납하심이 심히 옳겠습니다.”

두 사람의 말은 곧 백반의 뜻이었고, 편전의 앞줄에 앉은 대부분의 조정 대신들은

백반의 사람들이었으므로 중론이 그쪽으로 흐른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왕은 내심 중론이 탐탁치 않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자신의 뜻을 밝히지 아니한 채,

“다른 의견은 없는가?”

하며 좌중을 둘러보았는데, 이때 말석에서 노신 하나가 앞으로 나서서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두 군주를 벌하자는 말은 도대체가 천부당만부당한 소리입니다!”

모든 사람이 소리나는 곳을 보니 그는 다름아닌 대내마 도비였다.

도비는 눈물을 글썽이며 땅에 머리를 박고 극간하였다.

“신은 서른 살 젊은 나이에 병부령 후직공의 천거로 벼슬길에 나선 이래

지금껏 본조에 몸담아 지낸 지가 어언 마흔여 성상이 가까웠습니다.

신이 처음 벼슬살이를 시작할 때만 해도 백제는 서쪽 변방의 보잘것없는

한줌 도적 떼에 지나지 아니하였고, 북방의 고구려도 우리 신라를 두려워하기를

마치 마소가 범을 두려워하듯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도 익히 아시다시피 진흥대왕 시절에 백제의 왕녀는 재물과 함께

신라에 공녀(貢女)로 바쳐져서 한낱 왕실의 노리개가 되었을 뿐이며,

관산성에서는 저들의 왕이 죽임을 당하여도 감히 보복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나라가

바로 백제였습니다.

그러나 죄만하옵게도 신이 전하의 녹봉을 받는 그 마흔 해 동안에 사정은 판이하게 변하여

고구려와 백제가 번갈아 우리를 괴롭힐 뿐 아니라,

더욱이 근자 10여 년 간에 양국에 잃은 땅이 3성 15현에 달하고, 죽은 군사가 수천이며,

사로잡혀간 백성들의 숫자 또한 기천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앞에 나서서 잃어버린 땅과 백성을 되찾으려 하지 않고,

조정의 대신들은 오로지 문벌을 높이고 남을 탄핵하는 일에만 순번을 다투어 앞장설 뿐이며,

설혹 드물게 충신이 있어 목숨을 걸고 잃어버린 구토를 회복한다 하여도 돌아오는 것은

만대에 길이 남을 역적의 혐의가 전부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면 장차 어느 누가 우리 신라를 위해 창칼을 들려고 하겠습니까?

지금 중신들은 외주의 군주들이 윤허 없이 군사를 움직인 것을 들어 이구동성으로 앞날의 불충을

근심하지만, 신이 보기에 가장 큰 불충은 땅과 백성들을 잃고도 조금도 애통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신하들의 후안무치이올시다.

이제 한산주와 국원 소경의 군주를 불러 벌을 내린다면 신이 목을 걸고 장담하거니와

신라의 사직을 위해 싸울 사람은 영원히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은 이와 같은 일들이 오랫동안 누적되어 적들이 우리를 공공연히 모만하는 지경에까지 왔음을

전하께서도 아셔야 합니다.

오죽하면 사비성의 코흘리개 아이마저 우리 신라를 얕본다는 말이 나돌겠습니까?”

도비는 분을 못 이겨 사지를 부들부들 떨어대면서도 음성만큼은 분명하고 자못 비장한 데가 있었다.

여기저기서 도둑놈 개 꾸짖듯이 책망하는 소리들이 웅성웅성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도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도리어 그는 더욱 언성을 높여 끊어진 말허리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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