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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부여헌(扶餘軒) (29)

오늘의 쉼터 2014. 8. 27. 09:48

제16장 부여헌(扶餘軒) (29)

 

 

 

“이놈!”

부남에서부터 부여청과는 한배에서 난 형제처럼 지냈던 흑치사차였다. 그는 부여청이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는 순간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너의 간과 뇌를 씹지 않는 한 나는 결코 돌아가지 않으리라!”

흑치사차는 검은 이를 드러내며 상대를 갈아 마실 듯한 기세로 달려들었고, 뒤이어 양자의 화려한 무예가 어우러져 10여 합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기력이 소진한 탓이었을까. 신들린 사람처럼 현란한 칼솜씨를 자랑하던 해론도 흑치사차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상하좌우를 가리지 않고 예리하게 파고드는 흑치사차의 공격에 비해 그를 막는 해론의 칼끝은 점점 기운을 잃어 가는가 싶더니 한순간 허공을 가르는 세찬 바람소리와 함께 섬광 같은 붉은 피가 한 줄로 치솟았다. 동시에 해론의 상체가 말머리를 향해 푹 고꾸라졌다. 해론의 말이 어디로 갈지를 몰라 허둥대는 사이 사차는 번개처럼 말을 몰아 해론의 등뒤로 달려들었다. 그리곤 핏발 선 눈을 부릅뜬 채 또 한 번 칼날을 비스듬히 내리쳤다. 놀란 말이 앞발을 쳐들고 허우적거리자 칼끝이 지나간 허공의 양편으로 두 동강이 난 해론의 몸이 풀썩 떨어졌다.

“괘씸한 놈 같으니라구!”

흑치사차는 그래 놓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해론의 시신 위에 침을 뱉었다. 그리곤 황급히 부여청이 쓰러진 곳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부여청은 아직 목숨이 붙어 있었다.

“여봐라, 청장군께서 다치셨다! 싸움을 멈추고 모두 진채로 돌아가라!”

흑치사차는 피 흘리는 부여청을 자신의 말에 태우고 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명령은 부장들의 입을 통해 지체 없이 전군에 전달되었고 백제군의 진채에서도 퇴각을 알리는 징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피차 승산 없는 싸움이었다. 백제군이 싸움을 그치고 물러서는 것을 본 신라에서도 굳이 이들을 뒤쫓지 않았다.

흑치사차의 등에 업혀 진채로 돌아온 부여청은 가슴에 입은 부상이 워낙 깊어 회생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지혈에도 불구하고 한 말이나 되는 피를 흘려대다가 마침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가만히 흑치사차의 손을 붙잡았다.

“부남에서 예까지 수만릿길을 달려왔거늘 백제의 부흥을 직접 보지 못해 한스럽네. 나는 먼저 가네만 자네는 남아서 부디 대왕 폐하의 왕업을 끝까지 보필하게나. 오늘 가잠성에 와서 겪어보니 신라가 비록 꺼져가는 등촉과 같다고는 해도 아직은 만만히 볼 나라가 아님세. 대궐에 가거든 나의 이 유언을 대왕께 반드시 전해주시게.”

가까스로 말을 마친 부여청이 스르르 눈을 감으니 애통함을 이기지 못한 흑치사차는 몇 번이나 그를 흔들며 고함을 질러대다가,

“내 어찌 저것들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벌떡 일어나 결사항전의 태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연문진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이 한사코 만류하면서,

“길지 장군도 죽고 이미 군사의 절반을 잃었습니다. 냉정을 찾으십시오.”

하는 말을 듣자,

“길지도 죽었단 말이냐?”

하고 크게 놀랐다. 병법에 능한 그로선 결국 울분을 삼키며 철군을 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인년(618년) 여름에 벌어진 양국간의 가잠성 싸움에서 신라는 잃었던 성을 6년여 만에 되찾는 대신

2천 명이나 되는 적잖은 군사와 젊은 장수 해론을 잃었고,

백제가 잃은 군사는 그보다 적은 1천 명 남짓이었지만 성을 잃고

또한 두 사람의 이름난 장수를 잃었으니 피차 득보다는 실이 많은 싸움이었다.

백제군이 잔병을 이끌고 사비 도성으로 돌아가자

장왕은 부여청과 길지의 시신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내 어찌 신라를 용서할 수 있을 것인가!”

하며 분을 삭이지 못하였다.

그리고는 두 사람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러주고 그 식솔들을 불러 친히 재물과 전지를 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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