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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부여헌(扶餘軒) (28)

오늘의 쉼터 2014. 8. 27. 09:45

제16장 부여헌(扶餘軒) (28)

 

 

 

변품의 대답을 듣자 장춘도 무기를 들고 따라 일어났다. 두 장수는 곧 성중의 군사들을 나누어 성문을 열고 달려 나갔다. 신라병들이 구름같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본 백제 진영에서도 마군(馬軍)을 앞세워 응전으로 나왔다. 가잠성 서문 앞에서는 양측 군사들 간에 피를 튀기는 대혈전이 벌어졌다.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수많은 군사들이 얽히고설켜 사방은 금세 아비규환으로 돌변했다. 이쪽저쪽을 가릴 새도 없이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갔다. 칼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한 채 죽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자는 적을 베고 채 돌아서지도 않아서 죽는 수도 있었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가 말발굽에 밟혀 절명하는 자도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도 백제의 달라진 모습은 여실히 증명되었다. 백제는 확실히 전날의 백제가 아니었다. 숫자로는 신라군이 훨씬 많았지만 날쌔고 용맹스럽기로는 백제군이 한결 윗길이라 양측은 한동안 팽팽한 호각지세를 이루었다.

“해론은 들으라! 어서 성안으로 몸을 피하라!”

변품은 현란하게 칼을 휘두르며 졸개들 사이를 헤집고 해론과 부여청이 싸우는 곳으로 달려가면서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백제군의 흑치사차도 부여청을 도우러 거세게 말을 몰아왔다.

“나리께선 이놈들을 제게 맡겨두고 어서 군사를 거두어 성안으로 돌아가십시오! 이 싸움은 저의 싸움입니다!”

해론은 변품의 말을 듣지 않았다. 곧 네 장수가 말머리를 어우르며 한덩어리가 되었으나 모두 무예가 출중한 장수들이라 승부는 좀처럼 갈리지 않았다. 그럴 무렵 멀리서 이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백제 장수 연문진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와 가세하자 변품은 차츰 기력이 달리는 것을 느꼈다.

“이곳은 적진에서 가까운 곳이다! 어서 우리 군사가 있는 곳으로 피하고 저들을 유인하라!”

변품은 해론과 말머리가 겹쳤을 때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해론은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흑치사차의 칼을 막고 거푸 연문진의 칼을 뿌리친 변품은 곧장 장춘의 군사가 있는 가잠성 쪽으로 길을 열어나가며 거듭 해론의 이름을 불렀으나 어찌 된 노릇인지 해론은 점점 더 적진 깊숙이 휩쓸려들어갈 뿐이었다. 변품은 다시 해론의 곁으로 힘겹게 달려가서 흑치사차와 연문진을 유인했다. 바로 그때였다. 해론이 돌연 등을 돌리더니 말 배를 걷어차며 힘차게 달려간 곳은 변품이 그토록 데려오려고 했던 가잠성 쪽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 방향이었다. 변품은 해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방향 감각을 상실한 사람처럼 해론이 서쪽의 백제 진영으로 달려가자 부여청이 급히 뒤를 쫓았다. 하지만 변품은 흑치사차와 연문진을 상대하느라 더 이상 해론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해론은 그렇게 한참 동안 말을 달리며 닥치는 대로 백제군을 무찔렀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해론이 백제 진영 한가운데에서 마주친 자는 백제 장수 길지였다.

“요런 건방지고 한심한 애송이를 보았나, 네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날뛰는 게냐?”

길지가 장창을 든 채 험상궂은 얼굴로 나무랐으나 해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굳게 다문 입술에선 죽음을 각오한 자의 비장감만 감돌뿐이었고, 그런 중에서도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눈빛 같은 것이 숨어 있었다. 해론은 길지를 상대로 칼을 휘둘렀다. 두 사람이 마주친 지 삼사 합. 이날 해론의 검술은 신들린 듯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해론은 더욱 힘이 나는 모양이었다. 마치 일평생 쓸 힘을 그곳에서 모두 써버리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길지의 창끝을 피해 몸을 돌린 해론이 갑자기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며 등 뒤로 칼을 휘두르자 거구의 길지가 짧은 비명을 토하며 말 위에서 뚝 떨어졌다. 해론을 쫓아 달려오던 부여청은 일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단칼에 길지를 쓰러뜨린 해론은 곧바로 말을 몰아 백제 군사들 사이를 무인지경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어떤 영험한 기운에 도취된 듯이 보였다.

“도대체 저놈이 사람이냐, 귀신이냐……”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던 부여청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멍이 들도록 말배를 걷어차며 가까스로 해론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너는 내가 상대해주마! 어서 덤벼라!”

해론은 다시 자신을 막아선 부여청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피를 덮어쓴 해론의 검은 눈에선 새파란 광채마저 번뜩거렸다. 부여청은 해론과 시선이 마주치자 별안간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구든 상관없다. 내겐 죽음이 있을 뿐이요, 맞서는 자는 모조리 저승길의 길동무로 삼을 따름이다!”

해론은 뜻을 알 길 없는 웃음마저 머금은 채로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부여청은 그런 해론을 맞아 다시 10여 합을 겨루었으나 점점 힘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다급함을 느낀 부여청은 해론의 칼을 막는 일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연문진과 흑치사차를 찾았다. 그때였다. 해론은 달리는 말갈기에 고개를 붙이고 쏜살같이 부여청의 가슴팍을 파고들었고, 그와 동시에 부여청은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변품을 따라 성문 쪽으로 갔다가 신라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계속하던 흑치사차가 멀리서 이 모습을 보고 있는 힘을 다해 해론에게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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