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부여헌(扶餘軒) (26)
“부여청은 1천 군사를 이끌고 가잠성으로 가라. 흑치도 1천 군사로 부여청을 도와 공을 세우라. 군사를 내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 청은 덕솔 길지를 부장으로 삼고, 흑치는 연문진을 데려가라. 너희 네 사람의 장수가 간다면 변방의 이름없는 자들이 긁어모은 오합지졸쯤은 단숨에 물리치고 성을 쉽게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왕의 예견은 이 부분에서 빗나갔다. 왕명을 받은 네 장수가 군사들을 이끌고 쏜살같이 가잠성으로 달려갔을 때는 변품과 장춘이 이끄는 한산주와 국원 소경의 1만여 군사가 해론과 합류하여 성루에 개미 떼처럼 진을 치고 있었다.
“예상보다 적군이 많지만 그렇다고 어찌 싸워보지도 않고 돌아갈 수 있겠는가?”
성의 서편에 진지를 구축하고 부여청이 말했다. 큰소리를 쳤던 흑치사차도 부여청과 생각이 매일반이었지만 길지와 문진은 약간 뜻이 달랐다.
“싸워서 이기지 못하는 것은 나라의 예기를 꺾는 일이지만, 싸우지 않고 군사를 물리는 것은 근본이 다른 일이오.”
“폐하께서 따로 대사를 꾸미고 있으니 성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소?”
두 사람의 말을 들은 부여청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예 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예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는 것은 만사람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그는 말을 마치자 홀로 말을 타고 성문으로 달려나가며 벼락같이 고함을 내질렀다.
“신라의 오합지졸들은 들으라! 너희가 감히 백제의 성을 침략하고서도 살아날 수 있을 줄 아느냐? 우리 대왕께서는 소식을 듣고 크게 진노하여 나라의 모든 군사를 동원하라는 영을 내렸거니와, 먼저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너희를 불쌍히 여겨 속죄의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만일 지금이라도 성문을 열고 죄를 빈다면 목숨만은 살려줄 것이지만 대군이 당도한 뒤에는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니 시급히 결정하여 행하라!”
부여청이 외치는 소리를 들은 성안의 변품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군사들에게 일절 대꾸하지 말도록 엄명을 내렸다.
“우리는 본래 잃은 성을 되찾으러 온 것이며 뜻한 바를 이루었으니 그걸로 족하다. 제군들은 성문을 닫아걸고 저따위 수작에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말라!”
왕의 윤허도 없이 군사를 움직인 그로서는 매사에 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싸움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만큼 부담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해론은 달랐다. 그는 성을 공취하는 즉시 찬덕이 머리를 들이받고 죽었다는 아름드리 괴목에 달려가서 나무등걸을 부여잡고 통곡하였는데, 수년이 지난 그때껏 홰나무의 밑둥에는 찬덕의 혈흔이 불그스름하게 남아 있어 해론의 심정을 더욱 찢어놓았다. 혼자서 미친 듯이 동분서주하며 적군 수십 명의 목을 베고 드디어는 꿈에도 그리던 가잠성을 되찾았지만 해론의 분노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허무한 기분이 온몸을 감싸고 한 가닥 알 수 없는 비애마저 가슴을 아프게 짓눌렀다.
“그렇게도 바라던 성은 되찾았으나 돌아가신 아버지와 그리운 가족들은 다시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더란 말이냐!”
해론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그럴 무렵 백제군이 성의 서편으로 몰려와 진지를 구축하고 한 장수가 나와서 약을 올려대자 가슴속에 부글거리던 풀 길 없던 분노가 새삼 뜨겁게 용솟음쳤다. 그는 당장 변품과 장춘에게 달려가서 백제군을 휩쓸어버리겠다고 말했다.
“참게나. 성을 얻었으니 됐네. 저들도 방법이 없으니 저따위 얄팍한 수작을 쓰는 게요, 가만두면 저절로 돌아갈 것이네.”
변품이 만류하자 장춘도 거들었다.
“가잠성 회복의 일등 공신은 누가 뭐래도 자네일세.
돌아가신 찬덕공의 넋도 지하에서 무척이나 기뻐할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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