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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부여헌(扶餘軒) (25)

오늘의 쉼터 2014. 8. 27. 09:38

제16장 부여헌(扶餘軒) (25)

 

 

 

졸음에서 깨어난 초병들이 그제야 고함을 지르며 정신없이 북과 징을 두드려댔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선잠에서 깨어난 백제군들이 미처 무기를 찾아 들기도 전에 성안으로 들이닥친 신라군들은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고 단창을 찔러대며 무자비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피가 튀고 비명과 신음소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우왕좌왕 살 곳을 찾아 달아나는 백제군과 그를 뒤쫓는 신라군들이 뒤엉켜 가잠성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저들은 지난 신미년에 이곳을 짓밟으며 젖먹이 어린아이에 노인까지 굶어죽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성안의 사람들로 하여금 육친의 시체까지 뜯어먹도록 하였다! 제군들은 부모형제의 원수를 갚는 심정으로 한 놈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 없애라!”

해론은 얼굴에 피를 뒤집어쓴 채 아귀처럼 울부짖었다. 해론의 말을 들은 신라군들은 더욱 포악해졌고, 도망가는 백제군들은 오금이 떨려 발걸음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이때 가잠성의 성주는 태안(台雁)이란 자였다. 그는 백제의 6품인 내솔 벼슬로 장왕이 즉위한 후 나라에 발탁된 장수였는데, 꾀가 많고 무용이 뛰어나 부남에서 온 부여청을 보좌하며 그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장왕이 가잠성을 공취한 뒤 으뜸 공로가 부여청에게 있다며 성주를 맡길 적임자를 물으니 부여청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태안을 천거하였다. 그러나 제아무리 꾀 많은 태안도 자다가 당한 봉변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침소에서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와 허둥지둥 도망가다가 독기를 품고 달려든 해론의 단칼에 그만 목이 떨어져 불귀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성주가 그럴 판이니 다른 사람들이야 더 중언부언할 것이 없었다. 가잠성은 신라군의 기습을 받은 지 불과 한두 점 만에 여지없이 무너져 쌓인 시체가 산더미와 같았고, 동천이 희붐하게 밝아올 오경 무렵에는 백제군의 깃발 대신 성루에 신라군의 깃발이 힘차게 펄럭였다.


소식은 즉시 사비 도성으로 전해졌다. 비보를 접한 장왕은 황급히 신하들을 불러 가잠성의 일을 의논했다. 조정의 중신들 가운데 누구보다 격분한 사람은 부여청이었다.

“신에게 1천의 군사만 주시면 당장에 달려가서 가잠성을 되찾고 태안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부남에서 온 후 그 비범한 능력을 인정받아 달솔에 봉해진 부여청이 목청을 돋우자 왕은 짐짓 내키지 않는 듯 대답했다.

“가잠성은 치기보다 지키기가 갑절은 힘든 곳이다. 차라리 가잠성을 포기하고 적당한 기회를 보아 다른 곳을 치는 것이 어떠한가?”

그러자 역시 부여청과 함께 온 은솔 흑치사차가 앞으로 나섰다.

“가잠성이 비록 크게 쓸모는 없을지언정 도성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라 그곳이 적의 수중에 있는 한은 항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신이 내지에 온 후로 신라와 몇 차례 싸워 한 번도 패한 일이 없거니와, 이는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신라군의 습격을 받고도 즉시 응징하지 않는다면 모처럼 나라 전체에 감도는 국운의 흥성함과 군사들의 충천한 사기가 꺾일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매서운 보복으로 폐하의 왕업이 굳건함을 내외에 두루 보여주어야 옳을 줄 압니다.”

흑치사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출중한 장수들이 다투어 두 사람의 뜻을 거들고 나서자 왕은 하는 수 없이 조정의 중론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장왕에게는 따로 계획이 있었다.

“과인은 조만간 적당한 때를 보아 신라와 큰 싸움을 벌일 생각인데, 가잠성의 일은 갑작스럽게 생긴 것으로 이는 과인의 뜻에 없던 일이다. 짐은 장차 있을 큰 싸움에 대비하여 이런 하찮은 일에 국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지만 경들이 모두 그렇게 말하니 어쩔 수가 없구나. 아닌게아니라 흑치의 말처럼 군사들의 충천하는 사기와 흥성하는 국운이 꺾이는 것도 두려운 일이긴 하다.”

그리고 왕은 이렇게 덧붙였다.

“과인이 알기로 신라의 사정은 마치 기름이 다한 등촉과 같아서 조정과 백성들의 마음이 서로 맞지 않고 대궐에선 육사3)가 우글거리며, 그로 말미암아 내정은 해가 다르게 어지럽고 국법은 날로 문란해지고 있다. 대개 사정이 이와 같을 때는 누구라도 함부로 군사를 내지 못하는 법이다. 따라서 가잠성을 친 자들은 금성의 허락 없이 저희끼리 성군작당한 자들이 틀림없다. 이들을 징벌하는 데 어찌 많은 군사가 필요할 것인가?”

과연 대세를 읽는 장왕의 판단은 예리하고 정확했다.

그는 말을 마치자 다음과 같이 군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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