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부여헌(扶餘軒) (24)
한편 임지로 간 해론은 국경에 머물며 휘하의 군사 3백여 명을 풀어 가잠성의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가잠성의 방비는 너무도 견고하여 좀처럼 허점이 보이지 않았다. 해론은 가잠성을 볼 때마다 울분이 끓어올라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곤 하였지만 끝내 이성을 잃지 않았던 것은 변품에게서 받은 감동과 그에 보답하려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본래 가잠성은 사방이 산과 계곡들로 둘러싸인 천험지지였고, 더욱이 신라 쪽 영토인 성의 동쪽은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싸고 있어서 수목이 울창한 여름철에는 나뭇잎에 가려 성의 모습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백제에서는 그곳이 사비 도성과 인접한 곳이라 늘 위협을 느낀 데다 광활한 금산벌을 탐내어 가잠성을 취했으나, 막상 성을 자치한 후로는 기대만큼 요긴한 곳이 되지 못해 성을 둘러본 장왕이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차라리 관산성을 칠 것을 그랬다고 후회하듯 말한 일까지 있었다. 이를테면 가잠성은 나라의 군사를 총동원하여 사생결단의 전면전을 펼치지 않는 한 양국에 모두 그다지 소용 있는 성이 아니었고, 쳐서 빼앗기보다는 지키기가 훨씬 어려운 곳이었다.
이제나저제나 하며 기다리던 해론에게 기회가 온 것은 가잠성 주변에 녹음이 우거지고 날씨가 부쩍 무더워진 5월 초순경이었다. 해만 뜨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연일 가잠성의 동정을 살피러 나갔던 군사들이 돌아와 성이 수풀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말을 듣자 해론은 마침내 무릎을 쳤다.
“기회는 바로 이때다! 이곳에서 보이지 않는다면 저곳에서도 사정은 같을 것이고, 그렇다면 성벽까지 접근하는 일도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야간에 기습을 감행한다면 뉘라서 이를 알아차리겠는가! 이때를 놓치고 수목이 다시 황락하면 일년이란 세월을 더 기다려야 한다!”
그는 한동안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가 곧 말을 잘 타는 부하 한 사람을 불러 말했다.
“너는 지금 곧 한산주로 가서 변품 장군을 찾아뵙고 내 말을 전하라. 많은 군사는 필요가 없고 다만 단병접전에 능한 날쌘 보졸 사오백 명과 성벽을 타고 오를 긴 밧줄만 있으면 능히 성을 되찾을 수가 있다. 머리와 등에 나뭇가지를 꺾어 매달고 야음을 틈타 성벽에까지만 접근하면 성을 무너뜨리는 일은 식은죽 먹기다. 나는 성곽의 형세며 성벽 도처의 허실을 손금처럼 알고 있으니 들키지 않고 접근만 한다면 가잠성은 우리 것이나 다름없다. 하니 변품 장군께서는 굳이 수고스럽게 예까지 오실 게 없다고 아뢰어라.”
명을 받은 부하가 즉각 말을 달려 한산주로 가서 해론의 말을 전하자 변품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비록 해론의 말처럼 하여 성을 취할 수는 있다고 해도 백제가 대군을 내어 반격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우선 단병접전에 능한 보졸 1천 명을 내어줄 테니 해론의 계산대로 하라고 전하라. 나는 따로 기병을 이끌고 오늘 밤중에 국원에를 들러 소경의 군마까지 얻어가지고 가잠성에 이를 것이다.”
말을 마치자 그는 당석에서 군사들을 소집하고 군령을 행사할 군주의 신표까지 끌러주었다.
한산주의 군사들이 하루 밤 하루 낮을 행군해 금산 땅에 이르렀다. 때마침 저녁나절부터 바람과 구름이 일기 시작해 달빛을 가리므로 해론은 찬덕의 영령이 자신을 도와주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미리 계산한 대로 1천 군사들을 모조리 나뭇가지로 위장시키고 사오십 명씩 무리를 짓게 한 다음, 각 조의 책임자들을 불러 모아 땅바닥에 그림을 그려가면서 성에 이르는 지름길과 성곽의 허실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리곤 선후(先後)를 만들어 길이 아닌 산과 계곡을 타고 수십 갈래로 진격했는데, 성 부근에 이르러서는 만일에 대비해 선군이 열 보를 가는 동안에는 후군이 쉬고, 후군이 열 보를 걷는 동안에는 선군이 쉬도록 했다. 해론은 그 자신이 스스로 향도(嚮導) 겸 선봉장이 되어 군사들을 이끌었다.
한편 이러한 사실을 알 길 없는 가잠성에서는 성루에 오락가락하는 초병 몇 명만 있었을 뿐 여느 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지름길을 타고 야산을 넘어온 신라의 복병들은 삼경 어름에 거의 다 성곽 인근에까지 접근했다. 달도 별도 없는 칠흑 같은 밤에 간간이 부근 숲의 나뭇잎 부대끼는 소리만이 바람결을 따라 들려올 뿐이었다. 항차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복병들이 도착해 횃불을 밝힌 성루 위를 살펴보니 낮 동안 더위에 지친 초병들은 약속이나 한 듯 꾸벅꾸벅 고갯방아까지 찧어대고 있었다. 해론은 가잠성 뒤편에서부터 군사들을 배치하고 성의 수로(水路)를 따라 소리 없이 성벽을 타고 올랐다.
백제 초병들이 이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개미 떼처럼 성벽에 올라붙은 신라군 1천여 명이 거진 성루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다.
“기습이다! 적병이 쳐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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