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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부여헌(扶餘軒) (22)

오늘의 쉼터 2014. 8. 27. 09:34

제16장 부여헌(扶餘軒) (22)

 

 

 

“잘 듣게. 지금 대궐에 있는 사람과 외관으로 밀려난 사람의 차이는 순전히 백반이 마음속에 그려둔 차이일세. 그는 비록 관직에서 물러나 물외한인으로 지내고는 있으나 자신이 신임하는 자들을 가려 조정의 요직에 앉히고 뒤에서 이들을 조종하는 것이 마치 주인이 마소를 부리는 것과 같네. 그러나 나라가 이 지경에까지 이른 책임이 실은 모조리 백반 한 사람에게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닐세. 진정으로 나랏일을 걱정하는 이들은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을 걸세. 하지만 백반은 장구한 세월에 걸쳐 국사를 수중에 넣고 마음대로 농단해온 터라 도처에 심어놓은 세력이 지나치게 성대하다네. 자네는 모르는 일이겠지만 옛날에 진지대왕의 아들이자 금왕 전하의 부마인 용춘공이 백반과 대적하였다가 크게 낭패를 본 후로는 아직까지 감히 누구도 그를 거역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네. 이것이 바로 골육에까지 깊이 뿌리를 내린 신라의 중병일세.”

변품은 크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금왕 전하의 천품이 후덕하고 형제간의 정리가 두터운 것과 만호 태후의 위세가 등등한 것을 등에 업고 백반은 젊어서부터 이 나라 정사를 독단으로 주물러왔네. 그와 가까운 자는 그 자질이 백리를 다스리기 어려워도 나랏일을 결정하는 중신이 되고, 그와 척을 진 사람은 비록 천하를 호령할 불세지재라도 척박한 오지나 변방의 외근으로 떠돌아야 했네. 용춘공의 천거로 벼슬길에 나섰던 자네 선친 찬덕공도 그런 까닭에 금성에서 내쫓겼고, 지금의 나와 자네 또한 매한가질세. 여북하면 외근의 벼슬아치는 충신이요, 대궐의 벼슬아치는 간신이란 소리가 나돌겠는가. 그렇게 한번 백반에게 밉보여 외근직으로 나오면 10년, 20년씩 한곳에서 봉직하기란 흔한 일이요, 어떤 이는 심지어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기도 한다네. 무력 장군의 아들 서현공과 후직공의 아들 일부공, 덕활 장군의 손자 어생공, 고우도도의 아들 고우덕지 등은 하나같이 뛰어난 인재들이지만 물경 20여 년째 벽지의 향리를 맡아 다스리고 있을 뿐이고, 태종장군(이사부)의 아들 이리벌(伊梨伐)도 결국 임지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네. 어디 그뿐인가. 황종 장군(거칠부)의 아들인 장연공과 주령 장군의 조카 탄풍공은 그 무예와 용맹스러움이 오히려 선대를 능가한다는 명장들이지만 스스로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네. 이런 경우를 일일이 입에 담자면 며칠 밤을 새우고도 모자랄 걸세. 자고로 나라 꼴이 되자면 모래밭에 좁쌀을 찾듯이 나라에서 인재를 찾아가며 쓸 일이거늘, 기왕에 있는 인재조차 물리치고 쓰지 않으니 유사 이래 이런 나라치고 망하지 아니한 경우를 나는 들은 바가 없으이.”

해론은 누구한테서도 듣지 못한 조정 내부의 적나라한 얘기를 변품의 입을 통해 듣는 셈이었다. 더욱이 자신의 아버지 찬덕이 백반에게 밉보여 외근직으로 쫓겨났다는 말에서 어쩌면 백반이 일부러 가잠성을 구원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받았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 역시 같은 경우에 처했음을 깨닫자 이루 형용하기 힘든 비애가 가슴속에 가만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잠깐 하던 말을 멈추고 해론을 지켜보던 변품이 나지막한 소리로 일렀다.

“그쯤 하면 굳이 자네를 가잠성이 바라 뵈는 금산으로 보내는 내막을 눈치 챘을 거라고 보네. 자네를 친자식처럼 아끼는 도비공이 어찌 차마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었겠나? 나 또한 젊은 자네한테 이런 소리를 하기가 여간 부끄럽지 않네. 하지만 알 것은 알아야지. 그래야 대책을 세울 것이 아닌가? 도비공은 서찰에서 백반이 자네를 기어코 사지로 내몰았다고 크게 탄식하고는 절절한 만지장서(滿紙長書)로써 내게 도움을 요청했네만, 비단 도비공의 간곡한 청이 아니더라도 내 어찌 이를 안 이상 두고만 보겠는가? 다행히 이곳 북한산은 금성과 멀리 떨어진 곳이라 당장은 군사를 움직이는 데 표가 나지 아니하고, 또한 국원 소경(國原小京:충주)의 군주로 있는 장춘(長春)공은 능히 믿을 만한 사람이라 사정을 말하면 기꺼이 길을 열어줄 걸세. 하니 자네는 금산에 가서 적의 동정을 엿보아 내게 기별을 주게나. 미리 날짜를 정하고 불시에 가잠성을 쳐서 성도 되찾고 자네도 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일세.”

변품의 말에 해론은 깜짝 놀랐다. 조정의 허락도 없이 군의 경계를 넘어 군사를 움직이겠다는 변품의 말은 목숨을 걸고 하는 소리임을 해론인들 모를 턱이 없었다.

“안 됩니다, 나리! 만일 그랬다가 후에 봉변을 당하시면 어찌하시려구요? 적의 침략이 없었는데도 임의로 군사를 내었다가는 역모로 몰리기 십상입니다요!”

해론이 손사래를 치며 목청을 돋우자 변품은 온화한 표정을 짓고 대답했다.

“그러니 군사를 내면 기어코 가잠성을 수중에 넣어야지. 그래야 문초를 당하더라도 할말이 있을 것 아닌가. 죽고 사는 것은 이제 자네 손에 달렸네. 자네가 이길 수 있을 때를 택하면 그만 아닌가?”

해론은 태평스럽게 말하는 변품의 얘기를 듣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설사 성을 취한다 해도 반드시 봉변을 면한다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더구나 백반은 간악하기 이를 데 없는 자요, 이제 나리의 말씀을 듣고 보니 나리와 저는 그의 흉계로 대궐에서까지 쫓겨난 처집니다. 저야 아비의 원수를 갚는 것이 천 번 만 번 지당한 일이고, 그러다 운수가 사나워 죽는다 해도 오히려 자랑스럽지만 나리한테까지 누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일찍이 용화향도의 일원으로 오상(五常)과 오계(五戒)를 배워 사람의 떳떳한 도리를 아는 자인데 어찌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도리에 벗어난 일을 하겠습니까? 가잠성 회복을 단념할지언정 그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자 변품의 온화하던 얼굴에 별안간 서릿발 같은 근엄함과 노여움이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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