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부여헌(扶餘軒) (20)
자나깨나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백제를 쳐서 가잠성을 탈환하는 데 뜻이 있었던 해론은
왕명을 받자 뛸 듯이 기뻐했다.
그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곧장 같은 용화향도인 눌최의 집으로 찾아가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눌최의 아버지인 도비에게도 그간의 권고지은에 감사하며 하직 인사를 올렸다.
노신 도비는 해론의 말을 듣는 순간 백반 무리의 저의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러나 아들뻘인 해론에게 신라 조정의 간악한 술수를 곧이곧대로 털어놓기도 노신으로선
실로 낯뜨거운 일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참이냐?”
도비가 묻자 해론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낯으로 대답했다.
“저의 정성이 하늘에 닿아 오늘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는 저로 하여금 돌아가신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가잠성을 되찾으라는 천명이 아닐는지요?
저는 기회를 보아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반드시 가잠성을 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할 것입니다!”
도비가 보니 과연 해론은 조정의 수작을 의심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도 중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중한 것은 네가 무사해야 한다는 사실이야.
비록 금산의 당주로 가서 조석으로 눈앞에 가잠성이 보이더라도 평상심을 잃고 함부로 처신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는 반드시 혈기와 패기가 있어야 하나,
경우에 따라서는 그 혈기와 패기가 사람을 해치기도 하는 법이다.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다.
옛날 중국 초나라 사람 오자서(伍子胥)는 16년 만에 부형의 원수를 갚았으며,
월나라 왕 구천은 오나라 왕 부차에게 패한 뒤 온갖 치욕을 참고 짐승의 쓸개를 핥아가며
22년을 기다리고야 복수를 했다.
이것은 비록 중국의 예이지만 장부는 원한이 깊을수록 가볍게 움직이지 않는 법이다.
너도 몸소 조정의 일을 겪어보았으니 긴말은 하지 않겠다만,
지금은 나라의 근본이 바로 서지 못하고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궁핍하기 이를 데 없으며,
대부분의 장정들은 북방의 아무 소득 없는 군역에 동원되어 고생만 하다가
이제 막 돌아와 나라의 처사를 원망하고 있다.
사정이 이와 같을 때 군사를 움직인다는 건 패배를 자초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직은 때가 아니니 너는 금산에 가더라도 당분간은 백제와 싸울 생각을 하지 말아라.”
도비의 간곡한 말을 들은 해론은 그렇게 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어서 빨리 임지로 가서 휘하의 군사들을 매섭게 훈련시켜
가잠성을 되찾을 일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말을 하는 동안에도 시종 해론의 안색을 살피던 도비가 그 눈치를 채지 못할 턱이 없었다.
근심 어린 얼굴로 한참을 머뭇거리던 도비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곧 서찰 한 통을 써서 해론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너에게 부탁이 한 가지 있다.”
“무엇입니까?”
“금산으로 가기 전에 한산주에 들러 변품공에게 이 편지를 전해주지 않겠느냐?”
해론은 도비의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듯한 표정과 또 굳이 임지로 떠나는 자신에게
편지 심부름을 시키는 처사가 약간 의아했지만 평소 친부처럼 따르던
그의 청을 거절할 형편이 아니었다.
“급한 일입니까?”
“오냐.”
“알겠나이다.”
해론이 서찰을 받아 일어나려고 하자 도비가 다시 은근한 소리로 해론을 불렀다.
“너는 내게 아들과 진배없는 사람이다. 부디 몸조심을 해야 한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돌아오는 8월 보름에는 네가 좋아하는 떡을 만들고 대문을 열어둔 채 기다릴 것이다.”
그러고도 도비는 안심이 안 되었던지 눌최와 함께 대문 앞에까지 전송을 나와
해론의 손등을 몇 번이나 쓰다듬으며 당부의 말을 거듭했다.
해론은 금성에서 벼슬살이에 나선 직후 장가를 들어 이미 처자를 거느린 몸이었다.
도비 부자와 아쉽게 작별한 해론은 그 길로 처자를 먼저 금산으로 보내고
자신은 거세게 말을 몰아 한산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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