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부여헌(扶餘軒) (21)
해론보다 달포쯤 먼저 한산주 군주로 부임했던 일길찬 변품은 절개가 곧고 지모가 있는 사람으로,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백반이 여러 해를 두고 충복으로 만들고자 손을 썼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이를 거절하였는데, 어느 해인가 나라에 흉년이 들었을 때 백반이 그의 환심을 사려고 수레에 쌀섬과 재물을 실어 보내자,
“나는 나라의 녹봉을 받는 신하로 이미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남이 까닭 없이 주는 물자를 받겠는가? 흉년은 나 혼자만 겪는 재앙이 아니니 내게 줄 것이 있거든 도로 가져가서 굶주린 백성들에게나 풀어먹이시라고 일러라.”
하며 정중히 물리쳤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백반은 그가 다루기 어려운 사람인 줄을 알고 경원하며 지내다가 마침내 금성에서 멀리 떨어진 한산주로 쫓아내기에 이르렀다.
변품은 금성에서 함께 벼슬에 다니던 해론이 찾아오자 무척 반갑게 그를 맞아들였다. 그러나 해론은 선걸음으로 도비의 서찰을 전하며,
“신은 금산의 당주가 되어 바삐 임지로 가야 하는 몸입니다. 도비 어른께서 우정 서찰 심부름을 시키는 바람에 허겁지겁 달려왔으나 이제 소임을 마쳤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고 곧장 임지로 떠나려고 하였다.
“자네가 금산의 당주가 되었다고?”
변품은 해론의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 해론에게 평소 올곧은 처신으로 신망이 두텁던 노신 도비가 굳이 편지 심부름을 시켰다는 것도 여간 수상쩍은 게 아니었다.
“이 사람아, 그림자도 들이지 않고 그렇게 금방 도다녀가는 법이 어디 있는가. 아무리 바빠도 내 집에 온 이상에는 밥이라도 한끼 먹고 가야지. 마침 점심때가 가까웠으니 잠시만 기다리게. 금방 새 밥을 지어 들이라고 하겠네.”
변품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해론도 하는 수 없었다. 아닌게 아니라 밤을 도와 부랴부랴 달려오느라 허기도 지고 눈꺼풀도 무거웠다.
“하면 점심만 얻어먹고 곧장 가겠습니다.”
변품은 해론을 안으로 청한 다음에 도비가 보낸 서찰을 개봉했다. 글을 읽는 변품의 눈이 저절로 커지고 차차 안색이 백변하더니 나중에는 노여움으로 손끝마저 부들부들 떨렸다. 무심코 변품을 바라보던 해론이 문득 낌새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
“무슨 긴찰입니까?”
하고 물으니 변품이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 대꾸가 없어 다시 한참 만에,
“좋지 못한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하며 먼저보다 조금 더 큰 소리로 되물었다. 변품이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서찰에서 급히 시선을 떼며,
“아, 아닐세. 그저 안부 편지일세.”
대답을 얼버무리고는 연하여 방바닥이 꺼지도록 깊은 한숨을 토했다. 그 모습을 보자 해론은 비로소 편지 내용이 궁금해졌다. 도비가 분명히 급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온 터이지만, 상식에 비춰봐도 단순히 안부 편지를 가뜩이나 바쁜 자신에게 전하라고 했을 턱이 없었다. 해론은 막연히 자신과 관련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허……”
한동안 알 수 없는 노여움으로 가득 찼던 변품이 별안간 허공에다 대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입맛을 쩍쩍 다시며,
“나라 꼴이 참으로 가관일세. 인재를 구하고 길러도 부족할 판국에 그나마 있는 인재를 다 죽이려는구나.”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해론이 조심스레 변품의 눈치를 살피며,
“무슨 일인지 제가 알면 안 되겠는지요?”
하고 묻자 변품이 문득 해론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이윽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비장한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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