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어디로 가나

6. 씨받이

오늘의 쉼터 2014. 8. 26. 01:29

6. 씨받이
 
 
 
 
강희가 자가용으로 직장을 옮긴지는 제법 많은 날이 흘렀다.
처음 3 일이 고비였다.
하루 종일 사돌아 다니는 영업용과는 달리 어디 한 군데 세웠다 하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 고역이었고,
영업용 택시는 손님이 타고 내리면 차비만 받아 챙기면 그만이었으나
자가용은 좀 굽신거려야 했고 윗사람에게 상당히 신경을 써야 했다.
   처음엔 사장님도 그가 생긴 것과는 달리 말이 없고 사근사근하지 못한데 불만을 했다.
그러나 날이 갈 수록 부지런하고 자기의 임무 하나만은 어떻한 일이 있어도 해나가는 데
차차 만족하기 시작했다.
   그는 언제나 출근이나 약속시간 5분 전에 차를 도착시겼고 출발을 늦게 했건
목적한 시간과 장소에 실수 없이 도착시켜주지 못한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강희는 직업인으로서 자기의 결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것이 잘 고쳐지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윗 사람에게 용무가 있으면 그것만을 말씀 드렸을 뿐 말 끝에 사장님이라든가
사모님같은 칭호를 붙이지 않았다.
또 다른 기사들이 그의 상사가 타고 내릴 때 종놈처럼 살살거리면서 문을 열어주고 닫아 주는 것을
많이 보아 왔지만 그는 어쩐지 남들 보기에 창피한 것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장님이 나오실 때 쯤이면 차에 앉아 책을 보는 채 하지 않으면
서류함을 열어두고 무엇을 찾는 채 했다.
   차를 대기 시킬 때도 사장님이 나오시는 입구에서 몇 발자욱 앞에 세웠다.
   높은 사람이 차를 타러 나오는 것을 빤히 쳐다보고 앉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래처 내빈이 사장님과 동승 한다든가 요정 같은 데서
손닌들과 함께 나올 때는 부득히 차에서 내려 문을 따주고 닫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예의를 지켜 주었기 때문인지 사장님도 차차 강희를 신임하기 시작했다.
   그의 사장님은 중앙동에 무역회사와 연산동에 대규모 섬류 공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1.4후퇴 때 월남을 한 이북 출신이었다.교향이 평양 부근이라고는 하나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화통하지 못했고 모든 일에 지나칠 정도로 세심하고 까다로웠다. 그래서 일 년에 몇 번이나 기사를 갈아 치웠다고 했다.
   사장님은 이북에서 월남하여 자수성가를 한 사람답게 돈에는 매우 인색하게 놀았다. 그래서 남들처럼 기사에게 별도로 용돈을 주는 일은 없었으나 회사에서 나오는 식대 외에도 나가서 식사를 한다든지 저녁에 손님을 만날 때는 꼭꼭 적은 돈이라도 잊지 않고 밥값을 주었다.
   한 가지 좋은 것은 차를 수리하는 데는 돈이 얼마가 들었건 개의치 않았고 또 수리한 부분을 몇번이나 재수리를하여도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동차 정비만은 철저히 하라고 했다.
   서울이나 장거리 출장을 갈 일이 있으면 몇 일 전부터 정비를 지시했고, 운행 도중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일체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언제나 출발 하루전에 불러서 집에 별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기사가 가정에 신경이 쓰이는 일이 있으면 안전운전에 지장이 있다고 했다.
   " 그럼 내일 출발을 해도 좋은가 ?."
   " 네, 염려 마십시요."
   " 그럼 내 미리 주의를 해 두겠는 데, 잘 들어 두게."
   강희는 하도 많이 들은 소리라 씩 웃었다.
   " 이 사람아 웃을 일이 아니네. 자네 그 때는 기분 나빠할까 봐 말은 안 했네 만 저번에도 100K를 더 놓더구만. 이번에는 절대로 90K를 넘어서는 안 되네. 알겠는 가 ?."
   " 네. 명심하겠습니다."
   " 그리고 수차 얘기 했지만 차선을 잘 지킬 것과 추월을 할때는 언제나 3백M 후방에서 신호를 넣고, 주행선에 진입할 때도 역시..."
   주의 사항은 대략 다섯 가지 이하로 끝냈다. 그것도 너무 많이 주면 오히려 헛갈리는 수가 있기 때문에 몇 가지로만 일러둔다고 했다.
   사장님은 자가용을 타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서울로 출장을 갔다. 출장을 가는 하루 전 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일찍 퇴근을 시켰다.
   "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잠을 푹 자두게"
   다음 날 약속 시간에 사장님 댁으로 출근을 하면, 먼저 간밤에 잠은 잘 잤느냐고 묻고 응접실로 들어오게 했다.
   거기엔 벌써 사모님이 손수 가져다 둔 커피 두 잔이, 하나는 맥주 크라스에 가득 담겨 김을 내 뿜고 있었다.
   " 자 우리 커피나 들고 가세."
   초대형 커피잔은 말할 것도 없이 강희 앞으로 내밀어졌다. 그러고도 못미더워 휴개소마다 차를 세우게 하고
   " 자네 무얼 좀 들고 가지 그래."
   하고, 은근히 커피 마시기를 강요했다.
   그당시 고속도로 휴개소의 커피 맛이란 세계에서도 최고 일품이다. 이건 색갈부터 6.25 당시 미군 레이숀 깡통에 든 봉지 커피를 연상시켜 사람을 질리게 했다. 설탕인지 크림인지 붓뚜껑만한 봉지를 털어 넣고 아무리 종이 컵을 흔들어도 먹물 같은 커피는 소태처럼 쓰기만 했다. 그런 것도 한두 잔이지 휴개소마다 세우게 하고 마시라니, 그는 응근히 밸이 꼴렸다.  그래서 나중에는 크림이나 쥬스등을 마셨다.
   " 커피도 한 잔 하지 그래."
   " 괜찮습니다.사장님. 지난 휴개소에서 ..."
   " 그래도 ..."
   강희는 얄미운 생각이 들어 기어이 커피를 마시지 않고 차에 올랐다.
   그 때부터 사장님은 색안경을 끼고 뒷시트에 똑 바로 앉아 기사가 조는 지 안 조는 지를 감시하고 있었다.
   강희는 한참 동안 90K를 유지하며 달리다가 슬쩍 빽미러를 보았다. 그는 얼른 눈길을  돌렸다. 사장님의 시선과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전히 같은 속도로 한참 달렸다. 넓고 곧은 고속도로에서 90K로 달리니 오히려 졸음이 오고 이상하게 시야가 벙벙한 것이 나중에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없을 정도로 정신이 몽롱해지기까지 했다.그래서 그는 주먹으로 이마를 두드려도 보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도 보았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그는 한시 바삐 고속도로를 벋어나고 싶었다.그러자면 좀 밟아야 겠는 데 사장님이 스피드 메타만 노려보고 있으니그럴 수도 없었다.
   ( 이럴 줄 알았으면 고집을 부릴 것이 아니라 커피를 마셔두는 건데.)
    잘못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직도 사장님이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는 지 궁금하여 빽미러를 자세히 보았다. 색안경속에 사장님의 눈이 감겨 있었다.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는 여태 속은 것이 분하고 꽤심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악세레타에 힘을 주었다. 스피트 메타가 120을 넘고 있었다. 화도 풀리고 조금 긴장도 되어 잠이 달아나는 것 같았다.
   차창에 부딛치는 바람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조금 있으니 뒤에서 마른 기침 소리가 났다. 얼른 속력을 낮추고 빽미러를 보니 선그라스 속에 사장님의 눈동자가 놀라고 있었다. 어쩌나 보려고 또 다시 악세레다에 힘을 주었다. 90으로 떨어진 메트가 100을 넘어서자 또 뒤에서 기침 소리를 냈다.
   " 휴개소가 멀었는 가 ?."
   " 네, 조그만 가면 나옵니다."
   " 그럼 거기 가서 좀 쉬었다 가세."
   강희는 이제 사장님을 위해서 쓴 커피를 한 잔 정도는 마셔주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사장님이 장거리 운행을 할때마다 기사에게 커피를 마시게 한 것은 지난 겨울부터였다. 어디서 노루피가 좋다는 말을 들었는 지 음력 그뭄을 전후하여 함양으로 포수를 데리고 밤 사냥을 나갔다. 전국적으로 수렵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그곳은 워낙 산골이라 지서만 통하면 되었다.
   우리는 밤10시 쯤으로 해서 포수 한 명과 사장님 내오분, 그리고 딸 둘과 사장님의 사촌 동생 뻘 되는 청년 한 사람, 그래서 모두 6명이 한 차에 타고 집을 떠났다. 차에는 미리 양주 한 병과 참기름 맛소금 등 양념을 준비해 갔다.
   자정이 가까워 자동차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사장님과 가족들은 미리 정해둔 민가에 들어가서 노루를 잡아올 때까지 잠을 잤고, 포수와 사장님 사촌되는 분은 차를 타고 또 한참 동안 골짜기로 들어갔다.
   외정 때부터 수렵을 해 왔다는 박포수는 깡마른 체격에 나이 50이 넘은 분으로 이마에 서치라이트 같은 특수 플레쉬를 달고 등에는 베트리 뭉치를 짊어지고 엽총은 탄알을 장진하지 않은 채 어깨에 메고 다녔다.
   신작로 막바지에 차를 세우면 박포수는 차에서 내려 산비탈에 있는 보리밭을 향하여 서치라이트에 스윗치를 넣고 사방을 비춰보며 보리를 뜯으려 내려온 노루의 눈빛이 서치라이트 속에 들어오면 그 때서야 탄알을 장진하여 방아쇠를 당기곤 했다. 어떤 때는 한꺼번에 두 마리를 잡을 때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허탕 치는 날이 더 많았다.
   밤 사냥은 달이 뜨 있는 날은 안 되기 때문에 한 달에 3일 이상은 할 수가 없었다.
   노루 한 마리에 피는 대략 양은 그릇으로 3개 정도가 나왔다. 그것도 총알이 가슴이나 배 부분에 맞지 않아야 하고 더욱이 염통 근방에 맞으면 잘해야 한 그릇 밖에 나오지 않았다.
   노루피는 한 사람에 한 그릇 이상 먹으면 안 되기 때문에 두 마리 이상 잡아야 강희에게도 조금 배당이 되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계급 순위를 따져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간과 타올 같이 생긴 위와 지라는 그곳에서 날것으로 회를 해 먹고 내장을 뺀 고기는 포대에 넣어 트렁크에 싣고 통금이 해제되면 곧바로 출발을 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언젠가 부마 고속도로에서 혼이 난 일이 있었다.
   김해 톨케이트를 조금 지나서였다.
   밤새 한 잠도 못 잔 기사가 깜박 졸았던지 자동차가 주행선을 벗어나 도로 공사를 하느라고 세워둔 꼭깔을 두 개나 들어 밖고 겨우 제자로 돌아왔다. 그 후 부터 그는 출발전에는 반드시 커피를 마셔야 했고 운전대 옆에는 항상 커피가 든 보온병이 실려졌다.
   강희는 산골짜기에 가서 포수 일행이 노루를 잡아 올 때까지 혼자 있기가 무료하여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한 것이 사냥이 끝날 때 쯤이면 보온병이 거의 비어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것을 마시려고 입에 대어보니 어름처럼 차가웠다. 그는 당장 괴심한 생각이 들었다. 자기들의 안전을 위해 약으로 마시게 하는 것까지는 좋은 데, 그것을 끓이기 귀찮다고 한겨울에 찬물로 타 놓은 데는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장님은 여느 때처럼 차에 으르자 마자 커피를 마셨느냐고 물었다.
   " 안 마셨는 데요."
   " 안 마시다니 ?."
   뜻밖이라는 듯 놀란 얼굴로 물었다.
   " 차가워서 도저히...'
  " 그래. 우리는 또 더운 것보다 찬 것이 잠이 더..."
   하다가, 뒷말을 얼버무렸다.
   강희는 더욱더 괘심한 생각이 들었다. 마시지 않은 것을 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진작부터 그런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으로는 추운 겨울에 잠을 못 자며 사냥군을 실고 다니느라 수고한 대가로 준 것이라고 믿었는 데.
   그 날 사장님은 노골적으로 나왔다.
   운전대 옆에 탄 사촌 동생더러 웃으면서 기사가 조는 지 잘 감시를 하라고 하고 그들은 잠시 후 코고는 소리를 냈다.
   강희는 골탕을 좀 먹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러다 잘못 실수를 할까 봐 참았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자 사장님의 신상에 이변이 왔다. 사냥철이 지나 노루피를 마시지 못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전에 없이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아침에 출근을 하여 결재서류를 조금 뒤적이다 말고 인근 여관에가서 누워 있었다.
   회사에 급한 일이 있으면 그곳으로 연락을 취하기도 했고, 때로는 경리 정양이 직접 서류를 가지고 가서 결재를 받아 오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비서실이 따로 없어 경리 정양이 사장님의 심부름을 했다. 그녀는 나이 스물 한 살답지 않게 꽤 성숙하고 예뻤으며 매우 발랄했다. 고향이 남해라고는 하나 시골에서 자란 아이 같지 않았다. 그는 하루에도 여러번 은행에 다녔기 때문에 강희와는 무척 친하게 지냈다.
   농담으로 곧잘
   " 나 아저씨가 좋아지는 데 어쪄죠 ?."
   라 든가, 영화 구경을 시켜달라느니 여름 휴가 때 캠핑을 같이 가자느니, 나오는 대로 지걸어 댔다.
   " 너 착각하지 말어. 난 귀여운 아내가 있는 몸이야."
   라고, 강희가 농을 받으면
   " 그럼 아내 하나 더 두면 안 될까, 자기 ?."
    하고, 한수 더 떴다.
   그러던 정양이 하루는 차에 오르면서 시무룩한 얼굴로
   " 나 회사 그만둘까 봐."
   했다.
   " 회사를 그만두다니, 왜 무슨 일이 있어 ?."
   " 시집..."
   " 뭐,시집 ?... 너 출생신고서에 잉크도 안 마른 것이..."
   " 치이, 요즘도 누가 잉크를 쓰나. 볼펜은 금방 마르더라 뭐."
   " 너 말 버릇부터 고쳐. 어따 대고 반말이야. 난 아저씨고 어른이야 어른."
  " 치 자기만 어른인가."
   "잔소리 말고 내려.'
   " 어머 벌 써 다 왔네 !."
   정양은 토끼처럼 뛰어 내렸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서 정양은 사장실 옆에 칸막이를 햐여 새로 마련한 비서실에 들어가고 경리과에는 다른 아가씨가 들어왔다. 그래서 이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차를 타지 않았고 사장님도 여관에서 호텔로 자리를 옮겼다.
   호텔은 사무실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양은 걸어서 결재를 받으려 다녔다.
   그런데 하루는 차를 호텔 앞르로 대기하라는 연락이 왔다.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호텔 현관에 사장님이 정양과 함께 서 있었다.
   " 자 이리와서 타라구."
   정양이 앞 문을 열려고 하자 사장님이 얼른 뒷문을 따고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자동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뒤따라 오르며 범일동으로 가자고 했다.
   정양은 어디 몸이 좋지 않은 지 얼굴이 창백 했다.
   자동차가 부산 역 앞을 지날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삼일 극장 앞에 와서야 사장님은 차를 돌려 좌천동 농방 골목 앞에 세워달라고 했다.
   둘이 나타난 것은 딋골목으로 사라진지 한 시간이 훨씬 지나서였다.
   이번에도 정양을 먼저 태우고 뒤따라 사장님이 차에 올라 나란히 앉았다. 갑자기 차안에 크레졸 냄새가 났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소독 냄새였다.
   ( 정양이 몸이 아파 병원에 갔다 오는 것일까 ?.)
   그렇다면 더욱더 이상했다. 그 골목 안에 병원이라고는 일신 산부인과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려면 사장님이 어린 여비서를 데리고 산부인과에 갔으랴 싶었다.
   강희는 사무실을 향해 차를 몰았다. 그러자 사장님은 또 성분도 병원으로 가자고 하면서 레디오를 틀라고 했다.
   뉴스를 듣겠다는 것이다.
   강희는 라듸오의  스윗치를 눌렀다. 4시 반에 뉴스가 나올리 없었다. 그래서 세 방송국의 다이얄을 차례로 돌린 후 끄려고 하자 사장님은 보륨을 조금 더 올려서 그냥 켜두라고 했다.
   흘러간 옛노래 속에 뒤에서 소근거리는 말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렸다.
   " 아이 어떡하지요 ?."
   정양의 뜰리는 음성이었다.
   " 어떡하다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엉뚱한 생각은 말구."
   " 무서워서 그래요. 또 부모님이 아시면...'
   " 괜찮아. 오륙 개월까지는 표가 나지 않으니까 추석에는 집에 다녀올 수도 있지 않아."
   " 그럼 설에는 요 ?."
   " 그때는 적당히 변명을 하지 뭐. 몸이 아프다든지 차를 놓쳤다든지..."
   대화의 내용으로 보아 정양이 임신을 한 모양이었다.
   성분도 병원 앞에 차를 세우니 둘은 병원으로 들어가지 않고 길 모퉁이를 돌아 유림 한의원으로 사라졌다.
   거기서도 한 시간이 넘어서 나왔다.
   사장님은 희망에 부풀은 듯 매우 기분이 좋은 표정이었으나 보약이 든 한약 봉투를 든 정양은 역시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그 후 두어 달도 못되어 정양은 사표를 내고 회사를 떠났다. 아무도 그녀가 무슨 일로 회사를 그만 두었으며 어디로 떠났는 지 몰랐다.
   그 무렵 사장님도 건강을 회복하였는 지 머리가 아프다고 여관이나 호텔에 가서 들어눕는 일은 없으나 가끔 아무에게도 행선지를 밝히지 않은 채 두어시간 종적을 감추었다가 나타 나곤 했다.
   한 번은 차를 40 계단 앞으로 오라고 했다. 그래서 강희는 중부 경찰서 옆에 있는 40 계단 아래에 차를 대기 시켜두고 오랫동안 기다렸으나 사장님이 나오지 않아서 혹시 40 계단이 끝나는 윗쪽에서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 하여 다시 차를 몰아 현대극장 윗길로 달렸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지난 여름에 회사를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갔다던 정양이 사장님을 뒤따라 부원 아파트에서 나오고 있지 않은 가. 그녀는 나일까운 같은 임신복 위로 만삭이 된 배가 무겁게 불러 있었다.
   강희는 실로 난처했다. 그들과 시선이 마주쳤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차를 세울 수도 없었다. 보아하니 정양은 사장님을 배웅하려 뒤따라 나온 모양이었다.
   강희는 할 수 없이 아파트를 조금지나 차를 세웠다. 정양은 어느 틈에 숨어 버렸는 지 빽미러에 보이지 않았다.
   사장님은 마른 기침을 하고 나서 차에 올랐다.
   " 차를 40 계단 앞으로 오라고 하지 않던가 ?."
   " 네 거기서 한참 기다려도 오시지 안길래 혹시 계단 윗쪽에서...."
   사장님은 집으로 가자고 한 후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차가 거제리 교육대학 앞을 지날 때 비로서 입을 열었다.
   " 자네 집 사람은 그 후 쭉 태기가 없는 가 ?."
   " 네."
   " 그럼 진찰이라도 받아보지 그랬어. 김박사가 수술을 잘못 하지는 않았을 텥데."
   " 저희들은 아직 애기를 갖고 싶지 않아서..."
   " 무슨 소리를 하는 가. 자식은 일찍 둘 수록 좋다네. 더욱이 자네나 나나 일가친척이 없으니..."
   "....."
   " 근데 그게 뜻대로 안 되더구만 ! 자네 정양을 보았지 ?."
   강희는 몹시 난처해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 자네는 영리하니까 내 바람이 무엇을 위미하는 지 알고 있겠지."
   사모님은 정말 미인이었다. 처녀 때 중학교 교편을 잡은 경력이 있는 인테리로서 훤칠한 키에 날씬하기 보다는 좀 더 살이 붙은 글래머 스타일로서 현대와 고전미를 두루 갖춘 여인이었다.
   한 가지 흠이라고 하면 딸을 여섯 둘때까지 한 번도 아들을 낳아보지 못한 것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나이 40이 넘도록 산아제한이라고는 해 볼 틈도 없이 애를 낳는 데까지 낳았다.  그러나 마지막 일곱 번째도 역시 같은 딸을 낳았다. 그래서 몹시 허탈한 상태에서 나날을 보내었지만 남편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아내를 위로하고 사랑했으며 여자관계로 속을 섞이는 일은 없었다.
   강희가 보아도 딱할 정도로 사모님만 여자로 알고 있는 사장님이 바보처럼 보여 때로는 밉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사장님 말마따나 이건 단순한 외도가 아님이 분명했다. 강열한 목적을 수반한 것이 분명하였다.
 
   " 자기 여태 안 주무셨어요 ?."
   " 응, 잠이 안 오는 구만."
   한 번 잠이 들었다 하면 깨워야만 일어 나는 남편이 어제부터는 통 말이 없고, 자다보면 전에 없이 바깥에 나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소영은 남편이 자가용 운전을 하고부터는 통금이 가까워와도 그렇게 불안하거나 초조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동안 많은 돈은 아니었으나 고정된 수입이어서 계획적인 생활을 할수 있었다. 그래서 조금씩 저축한 돈으로 택시 사업을 할때 진 빚도 갚고  조그마한 싹월세 방에서 전세 방으로 이사도 했다. 그래서 이제는 좀 안정을 찾는 가 했더니 어느날 11시가 못되어 돌아온 남편이 느닷없이 회사를 그만 두어야겠다고 했다.
   " 더럽고 치사해서 !..."
   남편은 아내가 상의를 받아 걸기도 전에 휙 방구석에 던졌다.
   " 아니 왜 그러세요 ?. 그 동안 잘도 참아 오면서."
   " 참는 것도 한도가 있어. 죽일 놈들."
   그는 몹시 배신당한 얼굴로
   " 글쎄 나더러 기름을 팔아 먹었다는 거야."
   " 네에. 기름이라니요 ?."
   " 자동차 기름, 휘발유도 몰라."
   " 어쩌면 !."
   소영은 설마 하는 눈길로 남편을 쳐다 봤다.
   " 야 추운지방에서 난 놈들은 무섭더라! 우리 물통하고는 질적으로 달라."
   " 아니 어찌 된 일인데 그러세요 ?."
   소영은 고통스러웠던 지난 날들이 되돌아올 것 같아서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 날 사장님은 남해지구 출신의 모 국회의원과 골프를 치고 오후에 그 분에게 차를 내어주어 강희는 그분을 모시고 남해로 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사장님이 오해를 하게 된 것은 그 날짜에 주입한 연료전표 때문이었다.
   남해를 갔다온지 보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사장님이 부른다는 비서의 전갈을 받고 사장실로 들어갔다.
   " 자네 조금도 숨김없이 말을 하게. 나는 아직 자네를 그렇게 보지는 않았네."
   " 무슨 말씀입니까, 사장님 ?."
   " 자넨 어째서 넣지도 않은 기름을 넣었다고 전표를 끓어 주었는 가 ?."
   " 넣지 않은 전표라니요 ?."
   " 이 사람아, 지난 15일은 강의원을 모시고 남해에 가지 않았는 가. 그런데 어째서 그 날짜에 넣은 걸로 된 전표가 이렇게 올라왔나 ?."
   " 글쎄요. 저는 기름을 넣지 않고 전표를 떼 준 일이 없는 데요 ?."
   " 아니 그럼, 이게 자네 글씨가 아니란 말인가 ?."
   사장님은 청구서에 붙은 전표를 강희 앞으로 내밀었다. 그것은 분명히 자기의 필적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사장님의 말마따나 출장 중에 발행되었는 지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물어물 하고 있으니
   " 왜 말을 못하나 ?  그동안 얼마나 해 먹었어 ?."
   하고, 빽 소리를 쳤다.
   강희는 하도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혔다.
   " 전표를 가져오게."
   " 네 ?."
   " 자네가 끊어주고 있는 전표책 말일세."
   강희는 사장실을 물러났다. 사원들의 시선니 일제히 자기에게로 쏠렸다.
   정말 도둑이 된 듯 얼굴이 달아올랐다.
   사장님은 강희가 차에서 가져 온 밤쯤 쓰다 남은 전표를 회수하고 총무과장을 불렀다.
   " 한과장 주유소에 연락해서 다시 청구서를 올리라고 하게. 한 시간 이내로. 그리고 자네는 좀 나가 있게."
   강희는 차에 돌아와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너무나 갑자기 들어닥친 일이라 다만 억울하다는 생각만이 머리에 꽉 차 있을 뿐 그날의 기억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 이럴 줄 알았더라면 운행일지라도 써둘 걸.)
   애초에 회사에서도 그것을 쓰라는 지시가 없었다. 사장님의 행적을 노출 시키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였는 지, 그렇지 않으면 아직도 체계가 잡히지 않아서였는 지도 몰랐다. 강희 자신으로도 자가용을 타 본 경험이 없없었기에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는 차에서 나와 사무실 옆에 있는 구멍가게로 들어갔다. 소주 한 잔을 마시고 나니 슬픔이 왔다. 정말 무서운 세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처럼 성심성의껏 일을 해 주었고, 그러한 자기를 진심으로 신임하는 채 하던 사장님이 그렇게 치밀하게 기사가 쓰지도 않은 운행일지를 쓰고 있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이 사람아. 이래도 거짓말을 할텐가."
   사장님은 두툼한 대학 노트를 자기에게 펴 보였던 것이다. 거기에는 어느 날 누구와 어디를 들려 어디로 갔으며 몇 시에 출근을 하여 몇 시에 퇴근을 한 것까지 세밀하게 적혀 있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지난 15일은 분명히 강의원과 동래 칸트리에서 골프를 치고 난 후 곧 바로 남해로 차를 빌려준 것으로 되어 있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있을 수 없었다. 지나 온 3 년 동안 그것을 가지고 일일이 연료전표와 대조하였을 것을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그 날은 하루 종일 아무도 차를 타지 않았다. 사장님으로부터 무슨 지시가 내린 것이 분명했다. 평소에 친절하고 농담도 잘 걸어오던 사원들도 슬금슬금 자기를 피해 다녔다. 혹시 시선이 마주쳐도 얼른 외면을 하고 바쁜듯이 사라졌다.
   ( 흥, 저 놈들도 나를 도둑 놈으로 아는 구나 !.)
   강희는 분노 보다도 슬픔이 왔다.
   세상에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퇴근 시간이 되자 사장님은 그래도 차를 탔다. 몹시 쌀쌀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집에 돌아왔어도 말 한 마디 없이 내렸고, 강희도 인사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열쇠를 던져주고 그만 둘 생각이 꿀떡 같았지만 그렇게 되면 정말 도둑 놈으로 낙인이 찍히고 말 것 같아서 누명이 풀릴 때까지 당분간 참고 붙어 있을 결심을 했다.
   그날 밤 강희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내에게까지 이 치사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서 혼자 고민을 했다.
   ( 응, 그러면 그렇지 !.)
   골프장에서 차를 수리하느라 시내에 내려간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그날 골프장에서 사장님을 내려드리고 골프를 치는 동안 전포동에 있는 정비공장에 가서 뒷 쇼바을 교환하고 장거리를 간다고 하기에 중앙동에 내려가서 기름을 보충한 기억이 그제야 떠올랐다.
   강희는 뛸듯이 기뻤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사장님 댁으로 달려가서 해명해 주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잠을 청했다.
   늦게 잠이 들어서일까 아내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떠 보니 출근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얼른 세수를 하고 옷을 입었다.
   " 왜, 식사부터 하지않고요 ?."
   그는 언제나 밥을 먹고 양치질을 한 후 옷을 입고 출근을 하기 때문에 소영은 이상한 얼굴로 물었다.
   " 밥 생각 없어."
   " 아직 시간이 많은 데."
   " 아니야. 절대로 늦어서 그런 것은 아니니까 미안해 할 것 없어."
  혹시 늦잠을 자거나 탄불이 시원치 않아서 아침을 먹여 보내지 못하는 날은 하루 종일 마음 불편해 하는 아내의 심정을 알고 있기에 억지로라도 몇 술 뜨고 나가는 것이 상래인데 , 오늘은 무슨 일인지 그냥 달아났다.
   강희는 출근길에 사장님이 차에 오르자 마자 얼른 입을 열었다. 그러나 사장님은 한 마디로 일축했다.
   " 이 사람아. 그럼 왜 주유소에서 다시 청구서를 올리지 못하나 ? 자네가 끊어준 전표와 주유소에서 주입해준 기름에 흑막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
   강희는 또 할 말을 잃었다.
   " 정 자네가 결백하다면 주유소에 가서 자네가 기름을 넣은 날의 주입 일보를 받아오게."
   "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강희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러나 사장님을 회사에 내려드리고 주유소에 가보니, 그건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고 했다. 지난 일보는 세무서 사람이 와도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일계표에서 뽑아 다시 작성한 청구서만 받아 가지고 사장실로 들어갔다.
   사장님은 몹시 못마땅한 얼굴로 처음 전표를 붙혀서 보낸 청구서와 두 번째 주유소 일계표에서 뽑아온 점표를 날자별로 대조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 이래도 거짓말을 하겠는 가 ?."
   사장님은 주먹으로 책상을 꽝 쳤다.
   " 이걸 보게. 자네 눈으로 똑똑히."
   전표와 구서를 강희 앞으로 내던졌다.
   " 여기 이렇게 올라 있지 않습니까,사장님."
   15일 양쪽 다 30리트로 기록되어 있었다.
   " 그건 그렇다 치고 17일 날자를 보게. 처음 올린 청구서에 전표는 있는 데 여기는 왜 빠져 있는 가 ?."
   " 그것은 주유소에서 전표만 받고 저들의 일지에 록을 빼 먹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실수로 말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전표에 의하여 청구하였다가 나중에는 일계표만 보고 썼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는 문제였다.
   " 무슨 수작을 하는 거야. 정 그런 식으로 얼버무리려고 덤비면 경찰에 수사를 의뢰히겠어."
   " 경찰에요 ?."
   "그래. 경찰에."
   강희는 눈에 핏발이 섰다.
   ( 이 우라질 놈들 ! 있는 놈들은 모두가 경찰을 좋아하는 구나 !.)
   하기야  법이란 원래 가진자가 그들의 재산이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지도 몰랐다. 그것은 우선 법원에 가보아도 알 수가 있다. 법원 마당에 세워 놓은 저울대가 돈이 없어서 변호사를 사지 못해 패소한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법이 진정으로 만인에게 평등하다면 어째서 훌륭한 변호사를 사야만 승소를 하는 가. 어떤 때는 그 한쪽 접시에 동전 한닢만 넣어도 사정없이 기울어지는 것이 법의 정의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강희는 눈물이 가려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을 지우려고 눈을 깜박거리며 원망스럽게 청구서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15일 30리트, 17일 40리트. 그는 얼른 떠오러는 것이 있었다.
   " 사장님. 그럼 출장 가던 날 기름을 넣은 것은 인정하십니까 ?
   사장님은 처음 올린 전표와 두 번째 가져온 청구서를 다시 대조해 보며 입을 쭉 다물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아도 그에 대한 오해는 어느 정도 풀리는 듯했다. 이제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17일이다. 아니 그 보다도 기어이 주유일보를 보아야 겠다는 것은 거기에 어머어마한 부정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 때문인지도 몰랐다.
   " 사장님, 이걸 보십시요. 15일 날 남해에 갔다가 돌아와서17일 날 40리트를 넣은 것이 이론상으로 분명하지 않습니까 ? 사장님 말씀대로라면 출장갈 때 만탱크를 넣은 기름을 남해에까지 갔다와서 20일까지 차를 굴릴수 있어야 하는 데, 그것이 65리트짜리 20M의 연료탱크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 가령 장거리를 뛴 날을 포함해서 하루 평균 10리트를 소모한다고 칩시다.그렇다면 15일에서 22일까지 무려 70리트가 소모되는 데, 어찌 일보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제가 끊어준 전표를 믿지 않으십니까 ?
   "........"
   " 정말 놀랬습니다.사장님 ! 그래도 정 의심이 안 풀리시면 경찰에 의뢰히십시요. 저는 집에 가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요. 열쇠는 총무과장님에게 드리고 가겠습니다.
   " 이 사람아. 내가 언제 직장을 그만 두라고 하던가. 이리로 와서 좀 앉게나."
   " 전 이제야 알았습니다. 사장님이 저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 지를 요 !."
   " 이 사람아. 그건 또 무슨 섭섭한 소린가 ?."
   " 섭섭한 것은 접니다. 이제 저와의 인연이 다 되었다는 것을 이번에야 깊이 깨닭았습니다. 그래서 저를 쫓아 낼 구실을 찾으려고 애쓰시는 사장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들어드리고 싶어서 제 스스로 물러 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떠나는 마당에 한 가지 섭섭한 것은 사장님이 저라는 인간을 너무나 몰라주는 것 같군요. 제 아무리 하잘 것 없는 인간이지만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 줄쭐 압니다. 그것에 비록 목숨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사장님은 목를 짜를 구실을 찾아 그처럼 고심하시다니요."
   사장님은 강희의 그 말에 무슨 비밀이라도 폭로 하겠다는 엄포로 알았는 지 안색까지 변하면서
   " 이 사람아 . 그게 아닐쎄..."
   " 그러나 염려마십시요. 저는 그렇게 비열한 인간은 아닙니다. 악은 악으로 갚을 줄도 모르고 선을 선으로 갚을 능력도 없습니다."
   정말이지 그는 이제 너무나 삶에 지쳐 있었다. 있는 놈 앞에 제 아무리 잘난 채 떠들어 보아야 별 볼일 없다는 것도 잘알고 있었다.
   강희는 사장실을 나왔다.
   합판으로 깐막이를 한 사장실 바로 옆에 총무과장의 책상이 있었다. 그는 사장실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서류를 뒤적이는 채 하다가 강희가 도어를 밀고 나오자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 과장님 자동차 키 여기 있습니다."
  " 아니 이 기사, 왜 그래. 차 열쇠를 나를 주면 어쩌나 ?."
   " 좋은 사람 불러다 쓰십시요. 저는 갑니다."
   " 가다니 ! 이 사람아 내 말 들어 보게."
   " 더 이상 들을 말이 없습니다. 저는 이미 정하진 목숨이었습니다. 잘못이야 어디에 있 건 차마 직원들을 대하기가 민망해서 그러니 과장님이 저를 대신해서 인사 드리지 못하고 떠나는 용서를 전해주기 바랍니다."
   강희는 이번 기름 건으로 해서 정말 뜻밖의 것을 알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만큼 설명을 했고, 이론상으로도 한치의 어긋남이 없는 데도 억지로 수긍하지 않으려고 하는 데는 분명히 다른 곳에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아무래도 자기가 알아서는 안 될 회사의 비밀을 너무나 많이 알고 있고, 더욱이 사장님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모르는 것이 없기 때문인 것 같았다.
 
   자기 있잖아, 오늘 손님이 찾아왔어요. "
   " 그래."
   소영은 남편의 윗도리를 받아 걸며 입을 열었다. 강희는 건성으로 받아 넘겼다.
   저들이 아무리 구구사정을 해 보아야 이제 다시 들어가지 않기로 결심한지 오래였다. 비록 지금의 황변호사 집이 이상한 직장이기는 하여도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그런 곳에는 천금을 준다고 해도 싫었다.
   강희가 그만두고 나온 그 회사에서는 6개월이 채 못되어 무려 기사가 5명이나 바뀌였다고 했다. 역시 이편에서 조금 마음에 드는 사람은 3일을 채우지 못하고 스스로 도망을 했고, 제발 나가 주기를 바란 놈은 악착 같이 눌어 붙어서 기어이 해고 수당까지 받아서 나갔다. 그래서 6개월만에 5명에게 지불한 임금이 무려 기사 급료의 8개월 분에 해당되었다. 그러니 돈도 돈이지만 남 보기에 창피하여 어제 몰던 기사가 아닌 차을 타고 나가기가 민망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임시로 고용한 스피아라고 거짓 말까지 했다.  그리고 기사가 나갈 때마다 채면을 무럽쓰고 사람을 보내어 강희를 다시 오게 했다. 급료도 중앙동에서 최고로, 집까지 얻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여전했다. 무엇보다도 떠나올 때 아랫 사람이 사장님에게 대들 듯이 퍼부은 말이 후회스럽고 민망해서였다. 그 때 좀 참을 걸 하는 후회도 되었다.
   " 자기 누가 찾아왔는 지 묻지도 않아요 ?"
   " 누가 찾아 왔건 무슨 상관이야. 그 집이 아니면 입에 풀질 못할까 봐."
   " 이이는 ?....그 집이 아니예요. 어떤 아가씨였어요."
   " 뭐, 어떤 아가씨 ?."
   " 왜, 눈이 번쩍 뜨이세요 ?."
   " 거짓 말이겠지. 내가 알고 있는 여자는 딱 한 사람 뿐이니까.
   " 피이..."
   정양이라는 아가씨가 찾아 왔더라는 소영의 말을 듣고 강희는 저녁도 들지 않은 채 황급히 집을 나섰다.
   " 8시까지 기다리다 안 오시면 돌아 가겠다고 했는 데."
   " 혹시 아직도 기다리고 있을 지 몰라. 내 얼른 가보고 올께. 먼저 밥을 먹어라고."
   시간은 9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정양은 그때까지 출입구가 마주 보이는 다방 한구석에 고개를 떨군 채 앉아 있었다. 무엇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지 강희가 도어를 밀고 가까이 가도 모르고 있었다.
   " 정말 오래간만이군 !."
   " 네, 그래요. 피곤 하실텐데 만나자고 해서 죄송해요 !."
   " 아니야, 피곤하긴....근데 요즘 어떻게 지내지 ?."
   " 천천히 얘기 할께요."
   그녀는 다방 아가씨를 불렀다.
   " 아저씨는 아직도 커피를 좋아 하세요 ?."
   " 오직...."
   " 정말 일구월심이군요 !."
   정양은 커피 하나와 우유 한 잔을 시켰다. 그것을 마시고 담배 한 까치를 다 태울 때까지도 그녀는 별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 식사를 하셨나요 ?."
   " 아 참 그렇지 ! 정양도 ?."
   " 네. 그럼 우리 식사를 하러가요."
   " 그래. 그래야겠군."
   " 언니한테 죄송해서 어쩌죠 ? 이럴 줄 알았으면 깉이 나오라고 할 걸."
   " 괜찮아. 바람을 피우는 일이 아닌데 뭘."
   둘은 다방을 나와 금강원 입구에서 온천극장 쪽으로 걸었다.
   " 무얼 드실래요. 오늘은 제가 살께요."
   " 무슨 소리 . 찾아온 손님한테 접대를 받을 수야 있나."
   " 그럼 우리 중국집으로 가요."
   " 정양은 중국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걸로 아는 데 ?."
   " 오늘은 야끼 만두가 먹고 싶어요."
   " 혹시 내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 ?."
   " 그럼은요. 다른 것은 별로 먹고 싶지 않네요. 그리고 조용한데가 좋구요."
   " 그럼 그렇게 해."
   둘은 대성관으로 들어가는 골목 어귀에 있는 부영반점으로 들어갔다. 저녁시간이 지나서인지 손님이 별로 없었다.
   더욱이 2층 방은 빈집처럼 조용했다.
   강희는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담배 한 개비를 붙혀 물었다. 희뿌연 연기 넘으로 형광등에 비친 정양의 얼굴은 부은 것인지 살이 찐 것인지 통통하긴 하여도 몹시 창백해 보였다.아직도 산후  회복이 덜 되어서인지도 몰랐다.
   그 날은 몹시 더웠다고 했다.
   사장님이 급히 우황청심환을 가져오라는 연락을 받고 정양은 약국으로 달려갔다. 평소에 혈압이 높다고 하면서 그 약을 자주 드는 걸 보았고, 고혈압이 어떤 병인지잘 알고 있었기에 지체할 수가 없었다.
   " 응, 왔구만 !."
   노크를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가니 누워 있을 줄 알았던 사장님이 쥬스를 들고 있었다.
   " 오늘 참 덥지 ?."
   " 네. 더워요."
   " 그래. 이리로 와서 시원하게 쥬스를 한 잔 들어요."
   사장님은 병에 반쯤 남은 쥬스를 부어 정양 앞으로 내밀었다.
   " 고맙습니다."
   " 저른 이마에 땀이 많이 흐르는 구만 ! 별로 바쁜 일이 없거든 샤워나 하고 가라고."
   사장님은 무심히 던지듯 그러한 말을 하고 나서 힐끔 그의 눈치를 살폈다.
   빈잔을 조심스럽게 내리는 정양의 얼굴은 홍당무우처럼 빨게졌다. 흐르던 땀이 금방 싹 가시는 듯 했다. 그것은 차가운 쥬스만은 아니였다.
   "저 그만 가보겠습니다. 사장님."
   " 아니 조금만 더 있어. 내 아침에 가져온 서류에 결재를 덜 한게 있는 데, 그걸 마자 하거든 가져가게."
   그러면서 또 결재를 하는 동안 샤워를 하라고 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그래서 정양은 못들은 채 흐트러진 방안을 정리했다.
   " 곷병은 왜 들고 나가나 ? 아침에 물을 주는 것 같더니."
   " 이렇게 더운 날은 자주 물을 갈아줘야 해요."
   정양은 시간을 끌기 위해 물을 갈고 꽃병을 닦으며 안절부절 했다. 오늘 따라 마음이 불안하고 방 안에 들어가기기 싫었다. 그래서 한참 꾸물대고 있으니 안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눈꺼풀이 감기어 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떴다 하였다. 그러데 눈을 감기는 수월한데 뜨려고 하니 잘 뜨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도어에 손을 짚고 허우대니 사장님이 문을 열어주었다.
   " 아니 왜 이러는 가 ? 몹시 피로한가 보군 !."
   사장님은 꽃병을 받아 아무렇게나 탁자 위에 얹어 두고 정양을 부축하여 자기가 누워 있었던 요위에 눕혔다. 여름에 너무 과로해서 그런 모양이니 조금 누워 있다가 가라고 했다.
   " 아니예요. 전 가보겠어요."
   그러나 그 말은 입안에서 맴돌 뿐이었고, 몸은 더 이상 움직여 지지 않았다. 이제 정신마져 몽룡해지며 깊은 잠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정양이 눈을 떴을 때는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 지 방안에는 전등이 들어와 있었고, 탁자 위에는 꽃병이 넘어져 있었다. 그것을 바로 세우려고 몸을 일으키던 그녀는 이불속에서 빠져 나온 몸이 써늘 하고 허전함을 느꼈다.
   " 어머나 !...."
   그는 자기의 몸에 실오락이 하나 걸쳐 있지 않음을 느끼고 후다닥 이불을 뒤집어섰다. 욕실에서는 요란하게 물 소리가 났다.
   " 죽으려고 몇 번아나 바닷가로 갔어요. 그때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 동생의 얼굴이 떠올라서...."
   그녀의 고향 남해에는 그가 보내 준 돈으로 시골 중학에 다니는 동생과 일찍 남편을 잃은 어머님이 살고 있었다.
   그 후 사장님은 아들 하나만 낳아 주면 평생을 먹고 살만큼 돈을 주겠다고 했고, 고통과 환희가 뒤섞인 불륜이 계속되다 보니 더디어 임신이 되었다.
   월급의 열 배에 가까운 돈을 생활비로 애기를 낳을 때까지 받았다.
   아파트는 모르는 사람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당국의 자금 출처 때문에 정양의 명의로는 당분간 이전이 곤란하다고만 했다.
   산달이 차서 애기를 낳으려고 산부인과에 입원을 하고 있을 때 난데 없이 사모님이 억세게 생긴 여자 둘을 데리고 병원에 나타났다. 처음에는 조용히 전후 사정을 묻고 어린 것이 어쩌다 이런 일을 저질렀냐는 등, 많은 동정을 했다. 그런데 아들을 낳고 퇴원을 하려고 하니까 다시 나타나서 앞을 가로 막고 애기를 뺐어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고 했다.
   " 근데 아저씨 전 정말 어떡하면 좋아요 ?."
   사모님이 정양더러 간통죄로 고발하겠단다.
   " 이럴태면 위자료를 요구한다든가 애기를 돌려 달라고 하면 말이지 ?."
   " 네, 바로 그거예요."
   치사한 사람 같으니 !... 그러나 염려말어. 그건 어디까지나 위자료를 주지 않으려고 공갈을 놓는 걸 꺼야.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저편에서 오히려 사회적인 체면 때문에 파멸할지도 몰라. 그러니 조금도 염려말고 당당히 대들라고."
   " 싫어요. 모든게 제 잘못이에요."
   정양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푹 한숨을 쉬고 나서 마지막으로 자기의 아기를 한 번 보고 싶다고 했다.
   " 그래. 조금만 참고 기다려 봐. 그러노라면 언젠가 기회가 오겠지. 그 집에서 애기가 자라고 있는 한 불리한 쪽은 오히려 사모님 일 테니.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잖아. 그러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때을 기다리라고. 그렇다고 네 인생을 거기에 걸라는 건 절대로 아니야. 내 말 알아 듣겠지 ?
   " 네. 참고 사는 데까지 살아 보겠어요."
   이래서 정양은 어린 몸을 가엾게도 씨받이로 이용만 당했다. 아무른 대가도없이. 남은 것은 슬픔과 고독과 좌절과 애뜻한 모정만이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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