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어디로 가나

7. 한 많은 소녀

오늘의 쉼터 2014. 8. 26. 02:00

한 많은 소녀
 
 
   " 어이 이기사, 차가 고장이가 ?."
   " 아닌데요."
   " 그럼 왜 이래 빌빌거리노 ?."
   " 여기는 30K지점인데요."
   " 이 놈아가 뭐라카노 ? 니 입찰 시간을 모르는 거 아이제 ?."
   " 예, 알고 있습니다."
   " 알고 있다면 이래 굼뱅이 짓을 해도 10시까지 도착할 자신이 있단 말가 ?."
   만길은 그래도 입을 꾹 다문 채 속력을 내지 않았다.
   " 이놈아가 누구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서 이라나."
   김사장은 모 화학공장 건물의 신축 입찰 관계로 울산으로 가는 중이었다. 미리 담당자와 짜 놓아서 서류만 넣으면 자기 앞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짜고 한 일이라도 제 시간에 서류를 넣지 않으면 자동 유찰되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년의 박바담 때문에 늦잠이 들어 계획보다 좀 늦게 출발한 것이 불안하던 차에 무슨 수작인지 되지 못한 운전수 놈까지 이렇게 차를 가는 둥 마는 둥 몰고 있으니 애가 타지 않을 수 없었다.
   " 니 정말 좀 안 밟을 끼가 ?."
   " 돈이 없습니다."
   " 돈이 없다니 ?  그기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고 ?."
   " 더 이상 교통비를 물 돈이 없단 말입니다."
   " 이 건방진 놈의 자석 ! 니 놈이 감히 나를 갈바 보겠다는 기가 ?."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만길의 뽈 따귀에서 소리가 났다. 그리고 나서 연거퍼 주먹이 날아왔다.
   만길은 응급결에 핸들을 우측으로 꺾었다.
   " 이 놈의 새끼 똑 바로 가지 않고 또 무슨 수작을 할라고..."
   이번에는 주먹 대신 핸들을 좌측으로 꺾었다. 그러자 차는 S자로 요동을 했다.
   만길은 다시 악세레타에 힘을 주어 속력을 내다가 급 부레이크를 밟았다. 그러자 강사장은 앞 유리에 머리를 쥐어 밖고 핸들을 잡고 있던 손을 놓쳤다.
   그 때를 놓칠세라 만길은 얼른 길 옆으로 차를 세우고 뛰어 내렸다. 얼마나 급하게 뛰어 내렸는 지 구두 한 짝이 문틈에 걸려 벗어지면서 땅에 떨어졌다. 그는 그것을 줏어 신을 겨를도 없이 뛰어 달아났다. 그러나 절름바리처럼 다리에 바란스가 맞지 않아 잘 뛰어지지 않았다.
   " 야 이 기사. 이 놈아 새끼야. 거기 서지 못해."
   강사장은 구두를 벗어 들고 만길을 뒤쫓았다. 그런 일은 종종 있는 일있었다.
   그는 자유당 시절 한 가락 했던 깡패출신으로 성질이 불칼 같았다. 지금도 50대이긴 하나 젊은 사람 못지 않게 정력이 왕성했고, 아직도 말 보다 주먹을 앞세우는 위인이였다. 그러나 주먹 후에는 반드시 두둑한 보상이 뒤따랐다.
   그 맛에 만길은 수 없이 보따리를 쌋다가 여태 강사장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는 지도 몰랐다.
   그는 신한 토건으로 자리를 옮긴 후 기막힌 일을 여러번 당했다. 처음 그가 강사장을 태우고 공사장으로 가던 도중 여자가 몰고가는 차에 추월을 당했다고 핀잔을 받고
   " 사장님 현대는 기술보다 기계가 말하는 겁니다. 다 낡아 빠진 짚차로 어찌 코티나를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포드 20m을 사라고 하였더니 먼저 주먹이 날아 오고
   " 이 새끼가 다 낡아 빠진 짚이라니. 그래도 공사판에서는 이 놈을 당해 낼 차가 없어. "
   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만길은 당장 핸들을 다리 난간으로 꺽고 싶었지만 처음 당하는 일이라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 날은 집 앞에서 돈 만 원을 주고 내렸다. 그것 때문에 다음 날 다시 출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야 이놈아, 사내새끼가 불알 두 쪽을 차고 도망은 왜 가노 ? 빨리 기어나오지 못하겠나 ?."
   만길은 하도 급해서 양말을 신은 채 물논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도 양아치 시절에는 싸움에 저본 일이 없는 실력파에 속했다. 유단자인 왕초에게 틈틈이 유도와 태권도를 배워, 시험은 처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왕초의 말로는 초단이 훨씬 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자기의 사장님에게는 날아오는 주먹마저 피할 수없는 것으로 보아 감히 적수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 항상 삼십육계로 위기를 모면했던 것이다.
   " 야 이놈아 정말로 내 죽고 니 죽어볼래 ?."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강사장은 발을 동동 꿀으며 던질 것을 찾느라 두리번거렸으나 논두렁에 던질 것이라고는 진흙 뿐이었다.  
   " 내가 왜 죽습니까.  저는  신한 토건을 떠나면 그 뿐입니다. 자 받으십시요, 사장님. 스페어 키 여기 있습니다 ."
   만길은 물 속에서 스페어 열쇠를 강사장 앞으로 던졌다.
   씩씩거리며 논두렁에 서 있던 사장은 응급결에 날아오는 열쇠를 받다가 물 논 안으로 떨어뜨렸다.
   " 야 이놈아 제발 좀 나와라. 니 요구대로 다 들어주께. 하루 딱지를 백 장을  끊겨와도 말이다." 
   만길은 흙탕물이 줄줄 흐르는 양말을 도로에 나와서 벗어 던지고 발을 닦을 겨를도 없이 구두를 신었다. 발바닥에 묻은 모래가 신발 안에서 굴러 영 기분이 찝찜했다. 그래도 그는 재빨리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출발을 했다. 
   먼저 차에 올라 앉은 강사장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 지 숨을 헐뜩이며 눈을 꽉 깜고 있었다.
   한참 후 차가 서창을 지나자 사장님은 천정에 붙은 손잡이를 꽉 쥐고  
   " 야, 너무 달리는 거 아이가 ?."
   " 괜찮습니다. 이래야 시간 안에 도착하지요."
   " 이놈우 손, 진작 그랄끼지 벌금 한 번 안 물어준다고 니가 감히 내한테...지 마음대로 촐랑거리다 걸려 놓고."
   그 날은 무사히 낙찰을 보고 담당자와 울산시내 모 요정에서 밤 새도록 퍼마시고 이튿 날 부산으로 돌아왔다.
   만길은 출근을 하자마자 경리과장 앞으로 갔다.
   " 과장님 그저께 말씀드린 그 교통비를 좀 주셔야 겠는 데요."
   사장님이 받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어. 그것은 분명히 당신 잘못으로 끊긴 것이 아니요 ?."
   " 그게 왜 제 잘못 입니까 ?."
   " 주차 위반으로 끊겼다며 ?."
   " 네, 주차 위반으로."
   " 그렇다면 이기사는 거기가 주차를 하지 못하는 곳인 줄 몰랐단 말이요 ?."
   " 알았지요."
   " 알고도 주차를 하였다면 그것은 분명히 당신 잘못이 아니요."
   " 손님이 세우라고 하는 걸 어떡합니까 ?."
   손님이란 거래처 내빈을 말한다.
   " 그럼 이기사는 손님이 세우라고 한다고 길 한복판에라도 세워요 ?."
   " 그게 길 한복판이요 ?."
   " 그게 그거 아니요. 주차금지 구역은  ?."
   " 그렇다면 과장님은 갈비탕 한 그릇이나 라면 한 그릇이 같다는 말씀입니까 ?.'
   " 난데 없이 갈비탕은 왜 들먹거리는 거요 ?."
   " 굶는 것은 마찬 가지가 아니요. 갈비탕을 안 먹고 굶으나 라면을 안 먹고 굶으나 , 굶었다는 그 자체는 ."
   " 아뭍은 난 무식해서 그런 것은 모르겠어."
   " 과장님은 자신이 무능하다는 것은 아시는 군요."
   " 이 사람이 누굴 놀리는 거야, 뭐야."
   경리 과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삿대질이라도 할 듯이 덤볐다.
   " 난 그런 돈 못주겠으니 다른데 가서 알아 보시오."
   그래도 만길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버티고 서서
   " 그럼 한 가지만 더 물어 봅시다. 차를 세워두지 못하는 곳에 세운 것은 제 잘못이라 칩시다. 그럼 과장님은 행정 미스로 세무서에 무마비조로 지불한 돈이 과장님 개인 포켓에서 나갔습니까 ?.'
   그 말에 경리과장은 갑자기 말문이 막혀 얼굴이 불그락 푸르락 했다.
   그 때 총무과 민양이 인터폰을 받고 둘의 앞으로 걸어오며
   " 과장님, 사장님이 들어오시라는 데요. 이 기사님도요."
   하고, 둘의 눈치를 살폈다.
   만길은 시무룩한 얼굴로 경리과장을 따라 사장실로 들어갔다.
   " 자네들은 여기가 돗떼기 시장인 줄 아나 ?."
   "죄송합니다 사장님. 이기사가 자기 잘못으로 스티크를 받은 벌금을 달라고 해서..."
   "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회사를 위해서요."
   " 뭐, 회사를 위해서 딱지를 끊겼다고. 허허 별 소리를 다 들어 보겠구만."
   " 아닙니다 사장님. 사장님도 황국장님의 성미를 잘 일지 않습니까. 만약에 자기가 세우라는 곳에 차를 세우지 않아 보십시요. 당장에 기사가 건방지다느니, 불친절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그와 비슷한 일로 사장님에게 불려가서 호되게 꾸중을 들은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 장과장, 당신은 우째 그리 머리가 안 돌아가노 !."
   " 네 ?."
   " 앞으로 하루 백 장을 끊겨와도 돈을 내 주도록."
   " 그리고 이기사."
   " 네 ?."
   " 니 놈은 어디 안 덤비는데가 없구나 ! 높은 사람을 좀 두러워할 줄도 알고 존경을 할 줄도 알아야지. 그래 가지고 어디 사회생활을 하겠나. 앞으로 주의하도록."
   만길의 입에서 또 무슨 말이 나올까봐 겁이 났던지 강사장은 얼른 말 끝을 맺어 버렸다.
   장과장은 얼굴이 벌겋게 되어 사장실을 나오면서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할지 모르겠다고 투들댔다.
 
   날이 가면 갈 수록 시내에서는 지프차를 구경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자취를 감추워가고 있었다.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주는 데 한 몫을 차지하였다는 그도 고속도로가 생기고부터는 불쌍하고 애처러울 정도로 초라한 신세가 되었다.
   강사장은 경부 고속도로로 대구를 가면서 자기의 차를 추월해 쌩쌩거리며 달려가는 승용차를 보고 울화통이 터졌다. 무엇 보다도 기사 보기가 민망스러워 돌아올 때는 아예 국도로 가자고 했다. 그래서 부산으로 돌아온 즉시 포드 20M을 샀다.
   남이 2년이나 타던 중고였으나 조금 수리를 하니 보기에는 새것과 다름이 없었고, 6기통이라 힘도 세고 달리는데는 그져 그만이었다.
   만길은 월급도 5천 원이나 더 받았다.
   자가용 기사의 대우에는 좀 이상한데가 많았다. 차가 좋고 일이 편할 수록 월급을 많이 받았고, 대우에 따라서 기사의 급수가 평가 되었다. 그리고 또 제 아무리 운전 솜씨가 좋은 베트랑 급이라도 다 떨어진 차를 몰고 다니면 하급기사로 취급을 했고, 어디를 가도 뒷전으로 물러나 앉았다. 그러니 일급기사가 하루 아침에 하급으로 전락할 위기와, 하급에서 일약 최상급으로 오럴 전망은 언제든지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운전사의 세계에서는 선후배의 관꼐가 뚜렸이 없었고 그것 때문에 사회의 지탄을 받는 일도 있었다.
   강사장도 자가용을 고급으로 바꾸고 부터는 달라진 데가 많았다. 점퍼 차림이 양복으로 변했고 욕설도 훨씬 줄은 듯 했다. 뒤에서 팔이 닿지 않아서 그런지 여태 주먹이 날아온 일도 없었다.
   만길은 요즘 같으면 좀 살만했다.
   그도 점퍼를 벗어 던지고 정장을 했다.
   양복은 사장님이 고급차로 바꾼 기념으로 맞추어 주었다. 이제 어디에 내어 놓아도 운전사의 티가 나지 않고 귀공자처럼 제법 의젔했다. 이럴테면 그도 상급기사에 든 셈이었다.
   그런데 참는 데도 한계가 있었던지 어느 날 강사장은 기어이 본성을 들어 내고야 말았다.
   그 날은 출근 길에 회사에서 내리며 11시경에 서울에서 오는 손님을 마중하려 나갈지 모르니 차를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11시가 넘어도 사장님이 나오시지 않았다. 그래서 만길은 현관 앞에 대기 시켜 놓았던 차를 다시 차고에 넣으려고 하는 데 뒷문이 벌컥 열리며 전무가 차에 올랐다.
   " 급히 남포동으로 좀 가 주게."
   " 사장님이 비행장에 가신다던데요."
   " 몇 시에 ?."
   " 11시에요."
   " 아니, 벌써 30분이나 지났는 데, 안 가시는 모양이구만 ! 내 잠간 내려다만 주게."
   " 말씀 드리고 올까요 ?."
   " 아니 그럴 시간이 없어. 한 10분이면 될텐데 뭘."
   만길은 할 수없이 차를 몰았다.
  달리면서도 그는 몹시 불안했다. 아니나 다럴까, 막 떠나고 나서 급하게 사무실에서 나온 강사장님이 차를 찾았다.
   " 당신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고 ? 차가 간 곳도 모르고 있으니."
   다시 사무실로 올라온 사장님은 죄없는 총무과장에게 고함을 질렀다.
   " 죄송합니다. 이기사가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 이 사람아. 그러니 이 회사가 체계가 없다는 거 아이가. 당신이 하는 일이 뭐꼬 ? 책상이나 지키고 앉아서 월급이나 받아 묵는 기가 ,어잉 ?."
   " 죄송합니다. 급하심은 택시라도 잡아올까요 사장님 ?."
   " 급하다고 귀한 손님을 택시로 모셔 ? 얼른 차를 찾을 생각은 않고."
   짚차를 가지고 있을 때 같았으면 벌써 택시를 잡아타고 갔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차를 바꾸고 부터는 절대로 남의 차를 타지 않았다. 그래도 강사장은 더 이상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던지 택시라도 잡아오지 않고 무얼 꾸물되느냐고 불호령을 내렸다.
   만길이 남포동에 전무를 내려주고 사무실 앞에 도착하였을 때, 총무과장은 큰 길에서 잡아온 택시에서 내리고 있었다 "  
   " 사장님, 차 왔습니다."
   황급히 택시가 있는 쪽으로 뛰어가는 사장님을 만길은 카락숀을 누르면서 불렀다.
   " 이놈아 새끼, 사장님을 뭘로 아능기고. 그만큼 움직이지 말라고 했는데도."
   번쩍 하고 만길의 눈 앞에 불똥이 튀었다.
   " 그래도 이놈이. 어디 짤짤거리다 왔으면 얼른 차를 몰 것이지. 까재를 삶아 묵었나 뒷걸음만 치게."
   만길은 너무나 창피하여 아픈 것도 몰랐다. 사무실 직원은 물론 이웃 사무실과 길 가던 사람들 까지도 걸음을 멈추고 이편의 관경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사무실 커턴 사이로 미스 김의 싸늘한 눈총이 웬지 자신의 처지를 비웃는 것 같아서 몸둘바를 몰랐다.
   ( 에이 당장 때려치워버리자. 여기 아니면 밥 먹을 때 없겠나 ! )
   만길은 뒷걸음질을 딱 멈추었다.
   " 사장님 저 택시를 타십시요. 저는 목숨이 붙어 있을 때 일직감치 떠나겠습니다. 아뭍은 다음에는 맷집 좋은 사람을 불러다 쓰십시요."
   만길은 조수대 쪽의 도어를 열고 서류함에서 간단한 자기의 소지품을 챙기고 나서 꽝 하고 문이 떨어져 나가도록 세차게 닫았다. 그리고 나서 돌아서 보니 택시도 없고 사장님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만길은 출근을 하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아무련 연락이 없었다. 그는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서 잠을 잤다. 잠이 깨면 팔베개를 하고 누워 천정에 수 놓아진 꽃망울들을 세어 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잠이 오면 눈을 감고 지난 일들을 생각하다 다시 잠들곤 했다.
   창가에 어둠이 서리고 방구석 이불보 옆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 키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는 불을 켜지 않았다.
   " 오빠."
   "........"
   " 오빠 계세요 ?."
   " 응, 순영이구나 ! 어서 와."
   " 아이 불 좀 켜세요. 라듸오 소리가 아니였음 전 그냥 돌아갈 번 했잖아요."
      만길은 일어나 형광등을 켰다.
   " 오늘은 일찍 들어 오셨네요."
   " 응, 그래."
   만길은 흐르던 눈물을 닦기 위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눈을 비볐다.
   " 넌 점점 더 이쁘지는 구나 !."
   " 그래요. 정말 그래요 ?."
   " 그렇대두!  앞으로 나를 안 찾아오는 게 좋겠어."
   " 왜요 ?  갑자기 오빠한테 애인이라도 생겼어요 ? 그래서 저 템에 오해를 받을 까봐."
   " 그게 아니야."
   " 그럼....?."
   " 어쨌든...."
   " 싫어요....근데 식사는 하셨어요 ?."
   " 아직..."
   " 그럼 제가 지어드릴쎄요."
   만길은 혼자 전세방을 얻어 자취를 하고 있었다.
   "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 설마 삼 층 밥이라도 할까 봐 서요. 염려 마세요. 전 이래 봐도 여자가 하는 것은 다 할 줄 알아요."
   " 뭐, 여자가 ?."
   " 네, 여자가."
   그러다 순영은 불 같은 만길의 시선을 받고 얼른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순영은 부자집 외동 딸 답지 않게 음식 솜씨가 좋았다. 그녀는 음식을 많이 해본 것처럼 조기 찌개도 얼큰 했고. 밥도 어떻게 했는 지 기름기가 촉촉했다.
   만길은 남이 지은 이렇게 김이 무럭무럭 나고 갓 퍼온 밥을 먹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저녁상을 물리치고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며, 저것이 내 아내면 얼마나 좋을 까 하는 생각을 했다.
   ( 안 돼. 그건 안 돼 !.)
   그는 이내 고개를 흔들며 헛 된 망상을 애써 지웠다.
   친구 강희의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놈도 제 분수를 모르고 장군의 딸과 사랑에 빠져 동거 샐활을 하고 부터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고 있는 지 몰랐다.
   " 무얼 해 ? 얼른 들어오지 않고."
   " 네, 곧 가요."
   순영은 몇 번인가 쫍은 부엌벽에 엉덩이를 부딪치면서 불에 그을린 냄비와 때 묻은 그릇들을 닦고 있었다.
   한참 후에 그녀는 쟁반에 따끈한 커피 두 잔을 받쳐들고 들어왔다.
   " 아니 그건 또 웬 거야 ?."
   " 제가 시장에 갔다 오면서 샀어요."
   " 어어 그러면 안 되는 데.... 찻잔까지도."
   " 잔은 두 개만 샀어요. 한 셋트를 사려다가 돈도 모자라고, 또 오빠와 단 둘이만 마시고 싶어서."
   순영은 부끄러운 듯 발그래 웃었다.
   " 정말 미안해서 어쩌지 ? 그래서 내 돈을 가져가라고 했는 데도...."
   " 아이 식기정에 얼른 드시기나 하세요."
   " 그래. 그러지.'
   둘은 마주 잔을 들었다.
   " 어머나 !."
   "......"
   " 아이 참 ! 오빠도 이게 술잔인 줄 아시나 봐."
 커피잔을 부딪쳐 오려고 하자 순영은 얼른 잔을 피하며 쿡쿡 웃었다.
   " 참 그렇지 !."
   만길은 싱겁게 웃으며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 앗 뜨거워 !."
   " 아이 커피를 그렇게 훌쩍 마시면 어떻게 해요."
   순영은 얼른 부엌으로 나가 냉수를 떠 왔다. 그것을 만길 앞으로 내밀며 급히 그의 입을 돌아나와 방바닥을 더럽힌 커피를 휴지로 닦았다.
   " 이럴 줄 알았으면 커피 대신 술을 사오는 건데."
   " 뭐, 술을 ?"
   " 네, 술을요. 오빤 그걸 더 좋아하지 않아요. 저 지금 나가서 사올께요,오빠. 오늘 제가 함께 마셔드릴께요."
   " 네가 ?."
   " 네, 남자는 혼자 술 마시는 거 좋아하지 않는 다면서요."
   " 그래서 ?."
   순영은 그를 위해 함께 마셔 주겠다고 했다.
   " 아서라. 그러다 취하면 어쩔려고."
   " 그렇잖아도 저 오늘 취하고 싶어요. 그래 보지 않아서 그 기분이 어떤지 알고도 싶구요."
   " 아주 이제 못하는 말이 없구나 ! 학생이."
   " 아이 학생 학생하지 마세요. 제발 ...사실 저 오늘 오빠한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왔어요."
   " 부탁 ?."
  " 네, 들어 주실래요 ?."
   " 글쎄 무슨 부탁인데. 어려운 건가 ?."
   ' 생각하기 나름이예요."
   " 그럼 어디 한 번..."
   " 들어 주신다는 확답을 받기 전에는 말할 수 없어요."
   " 그래 그럼 하지 말라고. 부탁이란 언제나 받는 사람에게는 불리한 것이니까."
   만길은 이불보 옆으로 비스듬히 기대며 능청을 떨었다.
   " 아이 오빠. 정말 그러기에요. 부탁하는 사람의 고통 같은 것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난 남자가 째째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제일 싫더라 !."
   " 싫어도 할 수 없지. 부탁하는 사람의 자세가 그래서야 원."
   " 아이 오빠. 고분 고분할께요. 그래서 술도 사온다고 하잖아요."
   " 그래, 그럼 말해 보라고."
   " 꼭 들어 주시는 거죠 ?.'
   만길은 빙그래 웃었다. 내 너의 청을 죽음과 바꾼다 해도 거절할 수야 없지 하는 듯이.
   " 고마워요, 오빠 !."
   순영의 입술이 만길의 뽈에서 쪽 소리를 냈다.
   " 실은 저 오늘 집에 못 들어갈 일이 있어요."
   " 뭐 ?.'
   " 아이 얘기를 다 들어 보지도 않고 왜 펄쩍 뛰고 그래요."
   " 넌 왜 가끔가다 정신 나간 소리를 하니 ?."
   " 오빠는 정말 저를 몰라서 그래요."
   ' 모르긴 무얼 몰라. 여러 소리 말고 얼른 일어 나."
   만길은 빽 소리를 쳤다.
   " 전 오빠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복하지도 않아요.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슬프고 불행한 아이인지도 몰라요."
   " 병에 걸려도 되게 걸렸군 !."
   " 그래요. 전 오빠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 병에는 걸리지 않았어요."
   " 어쨌든 얼른 일어나."
   " 일어 나면요 ?."
   " 집으로 가야지. 이 철부지야."
   " 싫어요. 전 죽어도 집으로는 못가요."
   " 야가 정말 !."
   " 오빠, 이유는 묻지 말구 오늘 밤 하고, 내일 밤만 재워 주세요 네. 부탁이에요."
   " 넌 정말 혼이 나가도 단단히 나간 모양이구나 ! 학생의 몸으로 감히 외박을 생각하다니."
   " 오빠. 외박 외박하지 마세요. 그건 어감이 불꽤해요."
   " 그런 줄 알면 집으로 돌아 가야지."
   " 그런 형편이 못 된다 잖아요. 정 오빠가 나가라고 하면 나가긴 나가겠어요. 하지만 집으로는 못 가요."
   " 집으로 안 가면 ?."
   " 여관 밖에 더 있어요."
   " 뭐, 여관 ?."
   만길은 펄쩍 뛰었다.
  "그럼 어떻게 해요. 전 오늘 밤에는 절대로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
   "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네가 너의 집에 들어갈 수가 없다니 ?."
   오늘은 학교에서 설악산으로 수학 여행을 가는 날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는 수학여행을 간다고 속이고 다른 곳에 갔다 왔다고 했다.
   " 오빠,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 전 정말 나쁜 곳에 가지는 않았어요. 울산에 갔다 왔어요."
   " 뭐 울산 ?."
   " 신작로가 있는 초등학교를 찾아서요."
   만길은 언젠가 순영이 드라이브를 시켜달라고 했을 때도 시골 초등학교를 못 찾아 애를 쓰던 기억이 났다.
   왜 그랬을 까 ?. 그는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지는 않았다. 다만 어렸을 때 시골에 계신 큰 아버지 댁에서 잠시 살았던 일이 있는 데 부산으로 오고부터는 소식이 끊겼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그곳에 살고 계시는 지 궁금하여 찾아 가보려고 여러 번 벼루었지만 통 기회가 없었다고 했다.
   " 그래서 집에는 수학 여행을 간다고 하구서 시골 큰 아버지댁을 찯으려 갔단 말이지 ?."
  순영은 슬픈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 그렇다면 좀 이상한데, 순영의 큰 아버지면 허사장의 형님 뻘인데, 사장님이 형님의 소식을 모른단 말인가 ?. 내왕도 없고 ?."
   " 네, 그런 일이 좀 있어요."
   " 사장님과 큰 아버지 사이가 몹시 좋지 않으신가 보군."
   " 네."
   순영은 만길이 생각하는 대로 간단히 대답했다. 그래서 자기가 큰 아버지댁을 찾아가는 것 조차 못 마땅하게 여겨서 부모님을 속였다고 했다.
   " 응, 네 앞에서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내 아버지는 응당 그럴 사람이지."
   만길은 허사장의 사람 됌을 알고 있기에 순영의 말을 믿었다.
   " 그래, 찾기는 찾았어 ?."
   " 너무 어릴 때여서 그런지 지금은 어디가 어딘지 통 모르겠어요 ?."
   그때는 가끔가다 차가 지나가면 뿌연 먼지가  한참 동안 그 자동차의 꽁무니를 따라 가다가 멀리 논 밭으로 사라져 버리곤 했는 데, 오늘은 그런 비포장 도로는 없고 모두 까맣게 포장이 되어 있었다.
   " 그럼 내일 나하고 같이 찾아 가볼까 ?."
   " 회사는 어떠하구요 ?."
   "그만 뒀어."
   " 그만 두다이요 ? 언제..."
   " 오늘부터."
   " 어쩐지 일찍 들어와 계시더라니 !....근데 오빠는 한 군데 오래 좀 붙어 있지 않고 철새처럼 떠돌아만 다녀요 ?."
   " 난 재수 옴 붙었는 지 가는 곳마다 왕소금이 아니면 괴팍한 놈 뿐이더라."
   " 세상이 다 그런 거 아니에요. 제 입에 맞는 떡이 있을 라구요. 제 입에 맞도록 만들어야지요."
   " 개떡도 ?."
   " 굶고 앉아 있을 순 없잖아요. 오빠 말마따나 모두가 개떡 뿐이라면 개떡도 찹쌀떡 같이 생각할 수 밖에요."
   " 허허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벌써 철인이 다 되었구나 ! ...
하기사 인간의 윤리고 교양이고 없이 막되어 먹고 자란 어른들을
지금에 와서 이러쿵 저러쿵 해 본들 별수야 없지.
그래서 옛말에 가벼운 중이 떠난다고 하지 않더냐."
 
" 그게 다 수양이 부족한 떠돌이 스님의 입에서 나온 말 일꺼에요."
   " 수양이 부족한 ?."
   " 그렇찮구요. "참는 자에게 복이 오느니라"라는 옛 말이 있잖아요."
 
   " 그래 알았다.
앉아서 그렇게 철학을 할 것이 아니라 당면한 네 문제부터 풀어 나가자고.
 그러니까 너는 정말 오늘 밤에는 집에 못 들어 가겠구나 !
내가 친구집에 가서 자고 올까 ?."
   " 전 어떡하구요 ?."
   " 여기 재워 달라며 ?."
   " 혼자요 ?."
   " 그래. 혼자."
   " 싫어요. 혼자는 무서워요."
   " 그럼 어떻게 해 ? 방이 하나 뿐인데."
   " 같이 자요. 우리."
   " 같이 자다니 ? 남자와 여자가."
   " 어때요. 오빠와 동생인데."
   " 넌 정말 자신이 있니 ?."
   " 뭐가요 ?."
   만길은 낯을 붉히고 말을 더듬거리며
   " 이럴테면 네가 친 오빠도 아닌 나를 믿을 수 있느냐고 ?."
   " 할 수 없잖아요."
   " 할 수 없다니 ?."
   " 그것이 내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모든 것을 감수하겠어요."
   " 네 스스로 뛰어 들어 놓고, 그것을 운명 같은 것으로 미화하지 말라고.
이건 분명히 네 발로 뛰어 든 것이니까."
   " 좋아요 ! 이후 어떤 불행이 닥쳐 오더라도 누구를 원망하지는 않겠어요."
   " 그래. 너의 결심이 거기에 이르렀다면 내 너의 곁에서 자 주마."
   그렇게 큰 소리를 처 놓고 정작 시간이 가면 갈 수록 초조해 하는 것은 순영이 아니라 만길이 편이었다.
   그는 자꾸만 이불보에 눈길이 갔다. 그것마져 한 채 뿐이니 어떻게 했으면 좋을 지 몰랐다.
   " 오빤 잠이 오나 봐 ! 제가 이불을 펴드릴께요."
   만길의 난처한 눈길이 힐금 거기에 머무러자, 순영은 자리에서 일어 나 이불보를 풀었다.
   " 아니야. 내가 펴지. 근데 이부자리가 누추해서 어떡하지."
   " 어때요. 그래도 생각보다는 깨끗한데요, 뭐.
   맨 위에 누빈 호청이 씌워진 베개 하나,
그 다음으로는 엷은 카시미롱 이불에 뚜꺼운 요와 겨울 이불 하나가 전부였다.
   " 아니, 그 이불을 덮어려구요 ? 그 두터운 한이불을 요."
   순영이 방 한가운데 요를 깔고 그 위에 연한 감색 춘추 이불을 펴자,
만길은 남은 겨울 이불을 들고 한쪽 구석으로 갔다.
   " 넌 거기서 자. 난 이걸 깔고 잘께."
   " 그럼 덮을 건요 ?."
   " 응, 난 안 덮어도 괜찮아. 새벽에 정 추우면 한 자락을 깔고 덮어도 되고."
   12시가 넘어서야 둘은 불을 켜 둔 채 각각 자기의 이부리리로 들어갔다.
   만길은 옷을 입은 채 였으나 평소 대로 천정을 보고 반듯이 누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벽을 향해 옆으로 누웠다.
   순영은 만길이 화장실에 간 틈을 이용하여 얼른 여행용 가방에서 잠옷을 꺼내 입고 있었다.
아래는 바지로 된 연한 분홍색이었다.
   " 오빤 그렇게 옷을 입고 주무실꺼에요 ?."
   " 숙녀 앞에 빤스만 입고 잘 수는 없잖아. 더욱이 덮을 것도 없는 데."
   " 어머나 ! 오빠는 잠옷도 없나 봐."
   " 런닝 빤스만 빠는 데도 신물이 난다."
   " 빨래를 하기 싫어서.....그럼 결혼을 하시지 그래요 ?."
   " 누구하고 ?."
   " 누군 누구에요. 요즘 길거리에 채이는 게 여자라면서요."
   " 그래도 야, 운전수라니까 하나 같이 뒤로 돌아 서더라."
   " 그럼. 오빠는 결혼을 안 한게 아니라 못한 거 군요."
   " 그래."
   " 아이 불쌍두 해라 ! 그럼 기다리는 김에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세요.
정 안되면 저라도 해 드릴께요. 졸업을 하구요."
   " 야 너도 이 오빠를 놀리는 거냐 ?.'
   " 아니예요. 진심이에요. 원하신다면 각서라도 쓰 드리겠어요. 훗훗."
   " 아서라. 나도 이 어려운 세상에 억지 도령은 되고 싶지 않아.
그런데 요즘 아가씨들은 결혼은 마다해도 운전수와 연애를 하자고는 안달이거던."
   " 어머 ! 그게 정말이세요,오빠 ?.'
   순영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 오빠 정말 그러지 말아요. 그건 사랑도 아니고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에요.
타락 이에요.
지금은 그렇지만 훗날 이 사회도 직업으로 귀천을 논하지 않을 때가 꼭 올거에요.
그 때까지 기다리기가 역겹거든 직업을 전환하세요."
   " 모르는 소리 말라고. 그것이 그렇게 쉬운 줄 아나.
난 면허증 하나를 따려고 5년아나 트럭 조수로 따라 다녔다고.
그 5년은 짧지만 그동안 겪은 고통은 형용할 수가 없어,
그런데 나더러 직업을 바꾸라고.
더욱이 학교라고는 별로 다녀 본 기억이 없는 나에게 ."
   " 죄송해요 오빠.
당장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차차 저축을 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것을 해볼 수도 있지 않으냐 고요.
그런데 그처럼 어렵게 번 돈으로 순간의 즐거움을 얻기 위하여 탕진을 하다니요."
   둘은 한참 동안 잠잠했다.
   전기 불에 눈이 부셔서인지 만길은 두 눈을 꽉 깜고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아서 눈까풀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조금식 아래 위로 움직였다.
그것을 보고 순영은 쿡쿡 속으로 웃었다.
   " 오빠 잠 안오면 우리 더 얘기나 해요."
   " 할 이야기가 있어야지."
   " 오빠 어릴 때 이야기..."
   " 난 네 큰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은 데."
   " 그건 차차 알게 될꺼에요.'
   " 그럼 나도 차차 얘기해 줄께."
   " 치 !."
   순영은 벽을 향해 돌아누워 버렸다.
   엷은 카시미롱 이불 밖으로 드러난 허리의 선과 그 아래로 넓고 큰 엉벙판이 언덕처럼
치솟았다 점차 아래로 비탈을 이루고 있어서 너무나 육감적이었다.
그래서 만길은 얼른 시선을 거두고 자기도 벽을 향해 돌아누워 버렸다.
   그러나 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모든 잠념을 버리고 오직 잠이 들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보았지만 잠은 역시 와주지 않았다.
하나에서 백까지 지금도 계속 세고 있었다.
그것을 세는 동안은 비록 잠은 들지 않아도 잡념의 꼬리가 이어지지 않아서 좋았다.
   순영도 그와 마찬가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으나 정신은 더욱더 말뚱해져서 만길과는 또 다른 잡념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잠이 오지 않으니 어서 날이라도 밝았으면 싶었다. 그래서 내일은 기억코 모든 궁금증을 풀어 보리라.
   지금쯤 오빠도 만길 아저씨처럼 멋 있는 남자가 되어 있을 까. 보고 싶다. 정말 뼈에 사무치도록 강희 오빠가 그리웠다.
   " 오빠아 !..."
   " 응, 응 ! 왜 그래 ?."
   순영이 오빠라고 소리치는 통에 만길은 깜작 놀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는 어느새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 너 잠꼬대를 한 모양이구나 !."
   순영은 말없이 고개만 두어번 끄떡였다. 흐르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다시 벽을 향해 돌아 누워 버렸다.
 
   다음 날 만길이 눈을 떴을 때 순영은 언제 일어났는 지 밥까지 지어 놓고 그가 깨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래서 서둘러 아침을 먹고 막 집을 나서려는 데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신한 토건 강사장님의 부인이었다. 만길을 데리려 온 것이다. 가지고 온 보자기에는 펴보지 않아도 쇠고기 두 건과 고추가루와 껍질을 벗긴 마늘같은 것이 분명했다. 때때로 사모님은 그런 앙념등으로 기사의 자취를 도와주었던 것이다.
   " 아저씨 제발 그러지 말아요. 사장님이 아저씨가 못마땅해서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
   " 사모님, 저도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간접적으로 저를 통해서 윗사람들을 야단치는 것을 요. 하지만 저도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닙니다. 더 이상 반사막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무엇 때문에 숱한 사람들 앞에서 창피와 수모를 도맡아야 합니까. 그러니 제발 그냥 돌아가 주십시요."
  " 아저씨 사장님이 나 혼자 집으로 들어올 생각을 말라는 데 어떡해요. 그러니 나를 봐서라도...."
   사모님은 농담이 아닌 듯 울상을 지었다. 그녀는 종종 그러한 일로 기사를 데리려왔다. 그래도 만길이 고집을 부리고 출근을 하지 않으면 그 다음 날은 반드시 사장님이 직접 택시를 타고 와서는 발길로 남의 대문을 떨어져 나가도록 걷어 차고 들어서며
   " 야 이 기사, 있나 ?."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노크도 없이 방문을 확 열어 졌치고
   " 야 임마, 빨리 나오지 못해."
   " 예, 예 !."
   허둥지둥 강희가 이불 속에서 일어나면 다짜고짜
   " 야 임마 옷 벗어."
   " 네, 네 ?."
   " 사내새끼가 불알 두 쪽을 차고 그만한 일로 방구석에 죽치고 자빠졌어 ?."
   처음 그가 그런 일을 당했을 때 갑자기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내의 바람으로 일어나 겉옷을 집어 입으려다 속옷까지 벗어야 할지 엉거주춤 서있으려니까 또 버럭 소리를 질렀다.
   " 그래도 이 놈이 썩 나오지 못하고."
   " 예 예."
   그때 만길은 처음에 무섭기도 하고 얼떨떨하기도 하여 단추도 제대러 끼우지 않은 채 택시 안으로 밀려 들어갔던 것이다.
   사모님은 여간 난처해 보이지 않았다.
   혼자 들어갔다가 사장님의 성격에 무슨 벼락이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 오빠 그러지 말고 사모님을 따라 가세요. 저는 혼자 갈께요. "
   순영은 자가와의 약속 때문에 차마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꾸려둔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 어이 혼자 가면 어떡해 ?."
   " 괜찮아요. 오빠는 회사에나 나가세요."
     만길이 사모님을 세워두고 밖으로 뛰어  나왔을 때 순영은 벌써 골목 어귀로 사라지고 없었다.
 
   순영은 어제와 같이 온천 입구에서 울산행 시외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녀는 버스에 오르기 전 정류소에서 표를 파는 사람에게  두어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큰 아버지댁이 있는 곳을 두어 시간으로 잡은 것은, 그가 어렸을 때 차를 탄 기억을 더듬어서였다. 그 때 순영은 오빠와 함께 큰 아버지를 따라 나섰을 때는 아침을 먹고 나서 한참 동안 짐을 챙긴 후 택시를 타고, 지금 생각으로는 서면 쯤인가에서 내려 다시 시외 버스를 갈아 탔었고 시골 큰 아버지댁에 도착하여 바로 점심을 먹었으니까 아마도 실제로 버스를 타고간 시간은 두어 시간 정도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제는 울산을 향해 올라가면서 초등학교가 보이는 곳마다 차에서 내려 옛날의 기억을 되살려 보았으나 도저히 큰 아버지 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아예 두어 시간 걸리는 곳에서 내려 그 근방을 쌋쌋히 돌아 볼 작정이었다.
   " 할머니 죄송하지만 말씀 좀 묻겠는 데요. 이 밭에 혹시 옛날에 집이 없었나요 ?."
   " 뭐라고 ?"
   " 할머니가 고추를 따고 계시는 그 밭에 집이 있었냐구요 ?.'
   " 아니 학생이 누군데 여기가 집터라는 걸 다 아노 ?."
   할머니는 낡은 검정치마의 앞자락을 걷어 올려 허리 끈에 꽂아 매고 , 그 치마폭 속에 익은 고추를 따 넣고 있었다.
   " 맞았군요!  짐터가요."
   " 그래 오래 전에 집이 있었지. 그런데 그건 왜 묻노 ?.'
    순영은 눈물을 글썽이며
   " 할머니 댁은 어디세요 ?."
   " 저어기 오동나무가 있는..."
   할머니는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슬레이트 집을 가리켰다.
   " 그럼 할머니는 이 집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잘 아시겠군요 ?."
  " 암, 아다마다.그 집 아들하고 우리집 손주 놈하고 동갑이었지."
   " 그럼,그 분들은 어디로 이사를 가셨나요 ?."
   할머니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면서 다시 고추를 따려고 했다.
   " 할머니 실은 그 분이 저의 큰 아버지 되시는 데요...."
   " 뭐라고. 니가 그 집 조카라고 ?."
   " 네, 할머니."
   " 아이고 이게 웬일이고 !."
   할머니는 덥석 순영의 손을 잡았았다.
   그 바람에 치마폭에 담은 고추가 와르르 땅으로 쏟아졌다.
   " 예야 이랄끼 아니라 우리 집으로 좀 가자. 세상에....."
   순영은 고추 바구니를 뺐다 싶이 하여 할머니의 뒤를 따라 갔다.
   " 바라 야들아. 이리 좀 나와 봐라."
   할머니는 나무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며 숨 가쁘게 소리쳤다.
   부엌에서 할머니의 며느리인 듯 한 40대의 여인이 머리에 쓴 수건을 풀어 물 묻은 손을 닦으며 나오고, 아랫채에서는 소죽을 끓이던 까까머리 중학생이 영어 단어집을 들고 나왔다.
   " 야야 이 색시가 우리 고추밭에서 살았던 이서방의 조카란다."
   " 예, 포항댁이 조카라고 예 ?."
   " 그래. 오래 전에 와 두 오늬가 와서 조금 안 살았나.'
   " 아이고 우짜고. 그라고 본이 어릴 때 그 얼굴이 좀...."
   " 그래. 너거 오래비는 잘 있나 ?."
   순영는 말문이 막혔다, 오빠의 소식을 알려고 찾아 온 사람에게 도리어 오빠의 안부를 묻고 있으니 기가 차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야가 무슨 소리를 하노. 이 처자가 지 오래비를 찾으려 왔단다.."
   " 예, 오래비를요 ?... 우리는 그 때 너 오빠와 함께 떠난 줄 알았는 데."
   " 그러게 말이다."
   순영은 자기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 세상에,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너 큰 엄마를 얼마나 욕을 했노. 못쓸 여자라고 말이다."
   " 네, 우리 큰 어머니를 욕하다니요 ?.'
   마을 사람들은 부모를 잃고 큰댁에 와서 얹혀 살던 두 오늬가 어느 날 갑자기 없어지자, 별아별 소문이 다 나돌았다고 했다. 처음에는 큰 어머니의 학대에 그 어린 것들이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갔다고 했고, 나중에는 누군가의 입에서 농약을 먹여 암매장을 했다는둥,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헛소문까지 나돌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마을에서 쫓겨나다 싶이 하여 어디론가 이사를 가버렸다고 했다.
   " 그후 통 소식이 없었나요 할머니 ?."
   " 그래. 그래서 떠난 사람이 무슨 낯으로 왕래를 하겠노, 세상에. 우리가 전생에 이 죄를 우째 씻겠노.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어디에서 소식을 들었는 지 마을 아낙네들이 한두 명씩 모여 들기 시작했다. 산그늘이 청성산 기슭에까지 내리자 일터에 갔던 사람들이 돌아 와 할머니 집의 넓은 마당을 거의 메웠다. 반장도 오고 리장도 왔다. 모두들 자기들의 죄를 뉘우치며 몸둘바를 몰라했다.
   " 아가야 울지마라.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걸 우짜겠노. 어리석고 무식한 우리 농민들을 용서해다오. 너거 큰 아버지는 우리가 어짜든지 수소문해 보겠다. 몇 년 전에 누구의 말을 들으니 강원도 어느 해변에서 오징어를 말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카더라."
   " 고맙습니다. 아저씨. 죄 많은 저희들 때문에 큰 아버지 큰 엄마가 그처럼 모진 고초를 겪어셨다니 정말 하느님도 무심하군요."
   순영은 거북선 한 보루와 국산 양주 한 병을 할머니 앞으로 내밀면서
   "이거 변변치 못하지만 마을 어른들과 나누어 드세요."
   " 아이고 아니다. 야야 이거 너거 큰 아버지 드릴라고 사온 거 아이가. 우리가 우째 이런 걸 묵겠노."
   " 아닙니다, 할머니. 그렇게 죄송스럽게 생각하지 마세요. 죄가 있다면 지금의 제 아빠 입니다."
   " 그래, 그렇다고 시방 부모를 너무 원망하지는 말거라. 거기 다 니 팔자소관 아이가."
   할머니는 길게 한숨을 내어 쉬고 또 관세음보살을 찾으셨다.
   순영은 너무 늦게 서둘러서 부산으로 가는 막차를 놓치고 말았다. 만길 오빠가 밤 새도록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몸둘바를 모르겠지만 걸어서 갈 수도 없는 곳이고 보면 어쩔 수 없었다, 그 마을 사람들이 돌아간 후 늦게 저녁을 먹고 나서 할머니댁을 나섰다.
   자세히 보니 어둠이 깔린 옛날 큰 아버지의 집터였던 고추밭 뒤에는 아직도 허물어진 토담이 숙대밭 속에 묻혀 있었다. 우물이 있었던 담 모퉁이에는 감나무 두 그루가 잎을 일은 채 따다 남은 감들이 외롭게 대롱대롱 가지 끝에 매달려 있고, 오빠와 함께 별을 헤던 장독대는 어디에 있었는 지 분간할 수 조차 없었다.
   순영은 한참동안 거기에 그대로 서 있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건너 마을로 가는 농로 좌우에는 타작을 하지 않은 노적가리가 여기 저기 논두렁 위에 쌓여 있었다. 그는 건너 마을를 지나 신작로가 있는 마을 어귀로 걸어 갔다. 그 곳에 옛날 그녀가 학교에 간 오빠를 기다리고 있었던 언덕이 있었다. 언덕 아래로는 실개천이 흐르고 그것을 건너면 바로 6.25 때 미군이 작전 도로로 닦았던 신작로가 나왔다. 그때는 가끔 장작을 가득 실은 트럭이 지나 가면 먼지가 구름처럼 그 차의 뒤를 따라가다 함께 사라지곤 했는 데, 지금은 까만 아스팔트로 포장이 되어 전혀 그때의 추억조차 찾아 볼 수 없이 변해 있었다.
   풀섶에 내린 이슬이 신발을 차갑게 적셔왔다.
   어린 가슴에 한을 맺치게 했던 그 언덕엔 가끔가다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그때마다 어두운 숲 속에서는 낙옆지는 소리가 스산했고 이슬 먹음은 들국화가 가엾게 흔들렸다. 싸늘한 달빛과 이름 모를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더욱더 순영의 마음을 슬프게 했다. 그때도 오빠가 늦게 돌아올 때면 어둠이 내리는 산 그늘 속에서 그런 벌레의 울음소리와 떼지어 이 나무에서 저 나무가지로 이동하는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어린 순영의 마음을 불안과 초조와 외로움 속으로 몰아 넣었던 것이다.
   ( 엄마의 무덤은 어디에 있을 까 ?.)
   순영은 갑자기 어머니의 생각이 났다. 그녀는 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줄 모르고 절간으로 수양을 간 줄만 알았다. 그래서 어머니의 환상 때문에 신작로로 내달리다 교통사고를 당했던 것이다.
   그 언덕에서 내려다 보니 그 옛날 어머니의 환상이 나타났던 길 모퉁이가 까마득히 먼 아래로 어둠속에 싸여 있었다.
   다음 날 늦게 순영은 짧은 세월 동안 많은 한을 남겼던 시골을 떠나 다시 부산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녀가 지금의 양 부모 밑에 살아오면서 궁금함을 금치 못했던 수수깨기는 풀어, 응어리졌던 마음은 해소 되었으나 그것이 떠난 텅 빈 가슴에는 실망과 슬픔과 오빠를 보고 싶은 그리움이 한꺼번에 밀어 닥쳐 눈물이 비오듯 했다.
 
 
     차창 밖엔 가을이 지나가고
     석양진 하늘에는 구름이 가네
 
     갈대밭 위를 타고 흐르는 달빛은
     어느덧
     강 건너 저 편에 있는 데
     오빠 찾아 헤매는 이 몸은 아직도 여기에 있네
 
     바람아 멈추어 다오
     구름아
     저기 뜬 저 달아
     내 오빠 있는 곳을 너는 아느냐
 
     행여나 내 오빠 있는 곳을 알거든
     흙 묻은 내 신발 벗어 던질께
     구름아 나를 태워
     내 오빠 곁으로 보내 주렴아
 
 
   " 학생,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너무 슬프하지 말아요. 사람은 누구나가 한 때 힘겨운 일이 있다오. 그것을 슬기롭게 참고 사노라면 언젠가는 오늘의 행복 때문에 지난 날의 불행했던 일을 까마득히 잊을 때가 온다오."
   옆 좌석에 앉은 아주머니가 손수건을 꺼내어 순영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 아주머니도 무슨 근심이 있는 지 길게 한숨을 쉬며 차창 밖으로 먼 들판을 보고 있었다. 잔주름이 진 눈가엔 깊은 우수가 서려 있었다. 옷차림이나 말씨를 보아서는 시골 버스에서 보기 드문 귀부인 타입이었다.
   아주머니는 아픈 마음을 건드리고 싶지 않은 지 무슨 일로 눈물을 흘리느냐고 묻지는 않고 몇 학년이냐고만 물었다.
   " 고 삼이예요."
   " 우리 딸 아이 보다 서너 살 아래구만."
   " 따님이 계시나요 ?."
   몇 해 전에 집을 나갔다고 했다.
   " 네, 집을 요 ?."
   그러다가 순영은 두 손으로 자기의 입을 막았다.
   " 자기가 좋아하는 청년과 결혼을 반대하고 강제로 유학을 보내려 했기 때문이었지.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비렁뱅이 고아라도 결혼을 시킬 걸. 그동안 부모를 얼마나 원망하며 고생을 하는 지 원 !."
   " 그간 아무른 소식이 없었나요 ?."
   순영은 또 묻지 않을 것을 물었다고 후회하며 슬그머니 아주머니의 손수건을 건내 주었다. 모르긴 해도 딸의 행방을 찾아 지금도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인 모양이었다.
   순영은 부산이 가까워 오니 이제 만길 오빠의 일이 궁금했다. 어저께 사장 사모님을 따라 갔으면 오늘도 출근을 하고 없을 것이고 기어이 고집을 꺽지 않았다면 지금 쯤 자기를 기다리느라 안절부절하고 있을 것이다.
   만길은 집에 없었다.
   수학 여행을 간 학생들을 실은 열차가 오후 7시에 도착할 예정이였기 때문에 순영은 그때까지 시간을 보내기가 무료하여 만길 오빠가 여기저기 벗어둔 티셔처와 때묻은 잠바 그리고 양말과 손수건 등을 꺼내어 세탁을 했다. 그리고 방 청소를 하다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쪽지를 그제서야 발견했다.
 
 영아에게
 
 
   네가 시골로 떠난 후 나는 할 수 없이 사모님을 따라가서 출근을 하였단다.

그간이라도 돌아와 혼자 심심해할까 봐 마음 조이던 차에 일찍 퇴근을 하게 되어서 부랴부랴

시장통에 있는 이불집으로 달려 갔었지.

너에게 남은 하룻밤이라도 새 이불을 덮어주고 싶어서 였지.

그러나 너는 밤 새도록 돌아오지 않았어. 나는 처음 너를 몹시 원망을 하다가 나중에는 걱정이 되더라.

혹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잘못되지나 않았나 해서.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니 다행하게도 큰집을 찾아서 거기서 하룻밤을 묵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 

그렇지 않고는 네가 돌아오지 않을 이유가 없거든.

그래도 통금이 될때까지 대문을 들락거렸단다.
   오늘 밤이면 너는 너의 집으로 돌아 가겠지.

그러면 당분간 만나지 못할 것 같기에 이 글을 쓴단다.

영아, 아뭍은 나는 너의 큰 아버지댁 방문이 네게 많은 기쁨이 되어 주기를 빈다.
                                                                                - 하략 -
 
   족지는 그리 길게 쓰지는 않았다.
   순영은 그가 퇴근을 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어서 간단히 글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바람이 불었다. 비록 그 바람에 굴러가는 낙엽은 보이지 않아도 역 광장을 가로 지르는 가을 바람은

순영의 마음을 서글프게 했다.
   ( 나는 왜 여기까지 왔는 가 ?  왜 남들처럼 수학여행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고,

그것을 가장하기 위해 역 광장을 배회하며 가슴을 조여야 하는 가 ?.)
   순영은 분수대 옆 벤치에 앉아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는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을의 해가 지고 수정산 기슭에 들어온 전등불이 꽃밭을 이루어도 그것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열차가 도착할 시간이 가까워오자 넓은 주차장엔 자가용 승용차가 즐비하게 늘어만 가고,

마중나온 학부모나 친지들의 수도 점점 더해 갔다.
   " 얘 미숙아, 여기야 여기."
   " 그래 너 거기 있었구나 ! 난 또 출찰구에서 얼마나 기다렸다고."
   " 내 그럴 줄 았았어. 근데 거긴 불이 너무 밝아서 선생님이나 반 아이들이 볼까 봐...."
   순영은 누구보다도 거기에 혹시 어머님이 마중을 나와 있지 않을까 염려되어서

그 근방에는 아예 얼씬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수학여행을 떠나던 날 어머니에게는 절대로 역에 마중을 나오지 못하도록 다짐을 했고,

그래서 도착하는 시간도 알려주지 않았다.
   " 난 또 네가 안 나온 줄 알고 얼마나 가슴 태웠다고."
   " 얘는 안 나오 긴.....그래 선물은 사왔어 ?."
   " 그래, 네가 시킨대로 설악산 기념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향나무 재털이를 찾느라고

구경도 제대로 못했다 얘."
   " 그래 고맙다 ! 내 내일빵 사줄께."
   " 얘 좀 봐. 그래 빵 몇 개로 때우겠다는 거니 ?....

너 그새 약속을 잊은 건 아니겠지 ?.

너 네 오빠 소개 시켜준다는 거."
   " 미안하게 됐어."
   " 그럼 못 찾은 게로구나 ?."
   순영은 눈물을 글썽이며
   " 무엇이 무엇인지 통 모르겠어. 찾기는 찾았는 데 어디로 이사를 했는 지.

그 마을 를 떠난지가 10년이 훨씬 넘는다는 구나.

더욱이 오빠는 내가 사고를 당했던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도 하고."
   " 어쩌면, 안 됐다 얘 ! 이제는 잊어버려라.

여행을 하면서도 늘 지나와 네 일이 궁금해서 무엇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보냈단다.

절간마다 너를 위해 기도도 드리고 했는 데."
   " 미안해 ! 너희들이 염려해 준 덕도 없이."
   그때 넓은 역 광장에서는 학생들을 집합 시키느라고 불러대는 인솔 교사의 호각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 얼른 가 봐."
   " 그래, 내일 학교에서 봐."
   그러면서 대열 쪽으로 달려가던 미숙은 되돌아 보며
   " 얘 순영아 거기 그대로 있어. 내 인원 파악 하고 얼른 올께. 집에 같이 가아. 알았지."
  " 그래, 얼른 갔다 와."
   그렇게 근성으로 대답을 한 순영이 정말 이대로 미영을 기다리고 있어야 할지,

그렇지 않으면 혼자 집으로 돌아 가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데,

마중 나온 학부형들 속에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순영은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자기반 단임이 인원파악을 하다가 먼저 어머니를 발견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어두워서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몹시 당황하는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윽고 인원파악이 끝난 반에서는 해산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많은 학생들의 대열을 에워싸고 있던 마중 나온 학부형과 친지들이

 자기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떠드는 소리가 역 광장을 메웠다.
   순영은 미영의 부르는 소리를 뒤에 두고 어두운 구석으로 숨어 들었다.
   ( 아 모두들 저렇게 즐거운데 ! 나는 어찌하여 어둠속에서 눈물만 흘려야 하나 ? )
   눈물에 가려서일까 삼삼오오 짝을 지어 역 광장을 빠져나가는 무리들이

점점 순영의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또 다시 고개를 쳐드니 그제야 파란 하늘에 별이 총총한 것도 같았다.

넓은 주차장에 덩그란히 홀로 서 있는 수퍼사롱도 보였다.

어머니는 힘없이 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기사 아저씨는 오래전부터 뒷문을 열여둔 채 대기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차에 오르기전 역 광장을 뒤돌아 보고 또 뒤돌아 보고 한 차레 살핀 후

이윽고 자동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한참 있어도 차는 출발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다시 도어를 열고 나오더니

역 출찰구와 광장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기를 여러 번, 이윽고 자동차는 떠나 버렸다.
   순영은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와 자기 집의 자가용이 서 있었던

주차장을 가로 질러 철도 테니스장 옆길로 걸었다.
   그는 미영에게 건네 받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드릴 여행선물 꾸러미를 가슴에 품으며

그의 운명이 마치 자기의 처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든 사실을 고백하고 용서 아니 용서를 빌고,

그래서 즐거운 마음으로 주인을 찾아 주어야할지.

지금의 심정은 다만 모든 것을 잊고 어둠에 싸여 이대로 돌이 되었으면 싶었다.
   역 주차장에서 철로변 담벼락을 끼고 나가는 길은 가로등이 없어서 어두웠다.

열차가 들어오지 않는 시간이면 지나가는 자동차마져 없어서 사색을 하기는 좋았으나

어쩐지 음산하고 무서운 생각이 들어 순영은 큰길 쪽으로 나오려고 도로를 가로질러 걸었다.
   그때 열차가 들어왔지는 몰라도 난데없이 승용차 한 대가 소리 없이 굴러 왔다.
   순영은 뒤돌아 보지도 않고 얼른 뛰어서 인도로 올라섰다.

그래서 다시 고개를 떨구고 또박또박 걷고 있는 데 지나갈 줄 알았던 자동차가

자기를 앞질러 도로 촤측으로 바싹 붙쳐 세우며 라이트을 껐다.
   " 어머나 !."
   아버지의 슈퍼싸롱에 어머니 혼자 앉아 있었다.

뒷문은 열려 있으나 타라는 말은 없다. 열려진 도어로 딸을 내다 보지도 않고

앞만 똑 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 어머니 죄송해요."
   순영은 기사 아저씨에게 떠밀리다 싶이 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 나는 아직 자식을 낳아 키워보지 않아서 이럴때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모르겠구나."
   " 어머니 절대로 나쁜데는 가지 않았어요."
   " 그래, 집에 가서 얘기 하자."
   다행이 그때까지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어머니는 상당히 마음이 풀렸는 지

따뜻하게 우유를 데워서 딸의 방으로 들어왔다.
   " 얘, 여태 저녁을 안 먹으면 어떡하니. 우선 우유라도 한 잔 마셔라,"
   " 어머니 죄송해요."
   " 그래 그 동안 잠은 어디서 잤느냐 ?."
   "......"
   " 그래. 이 엄마가 잘못 물었구나 ! 우리는 네가 여행을 하는 동안 혹시 몸이라도 불편하지 않을 까 얼마나 걱정을 하였는 지 모른단다. 다향이 출발하던 날 네가 전에 없이 즐거워하는 걸 보고 마음 흐뭇해 하였는 데...너 혼자 간 일에는 고생이 되지 않았느냐 ? 영아 이 멈마의 말을 고깝게 듣지는 말아다오. 네가 어미의 입장이 되어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는 쪽으로 들어주기 바란다.  여자는 말이다. 상당한 이유가 있지 않고는 혼자 여행을 하는 일이 없단다. 그것은 나의 소견으로는 기쁨 보다는 슬픔이 많을 때라고 생각해....너의 고통이 무엇인지 이 어미가 알면 안 되겠니 ?."
   " 어머니 죄송해요."
   " 그래, 너는 아까부터 시종일관 어머니 죄송해요,라고만 하니 정말 섭섭하구나 !

나는 하늘에다 대고  명세하지만, 너를 내 친자식 보다 더 소중히 생각해 왔단다.

실재로 내가 낳은 자식이 없어서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정이 얼마나 큰지는 모르지만

나는 너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주저하지 않겠다.

그런데 너는 여태 나를 한 번도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 언제나 어머님 이라고 불렀지.

거리감을 두고 말이다. 어쩌면 그렇게도 이 어미에게 정이 가지 않더냐 ?."
   " 엄마 죄송해요 ! 이제부터는 꼭곡 엄마라고 부럴께요."
  순영은 어머니의 가슴을 파고 들며 어깨를 들먹였다.
   " 그래, 고맙다 !  네가 기어이 얘기하기 거북하면 내 없었던 걸로 덮어두마.

     목욕이나 하고 오늘은 푹 자거라."
   " 아니예요 엄마.내 다 얘기할께요."
   순영은 사실대로 털어 놓았다.
   어머니도 울고 순영도 울었다.
   " 그래잘 다녀왔다. 사실 이 엄마도 너의 고민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단다.

     그래서 한 때는 너를 데리고 속 시원히 네 큰 아버지가 살았던 마을을 다녀오고 싶었단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어. 네가 허씨 집안을 어떻게 생각할지 두러워서였다.

     네 아버지의 잘못 때문에 화를 입은 너의 큰 아버지 댁을 보고나서 말이다.
   " 엄마, 다 지나간 일이예요. 아버지인들 일이 그처럼 크 질 줄 알았겠어요.

     그래서 전 조금도 아버지를 원망하지는 않아요."
   " 그래 고맙다.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모든 것을 운명으로 생각해다오."
   순영은 어머니의 품을 빠져 나와 선물 구러미를 풀었다.
   " 엄마 이거 받으세요."
   " 그게 뭐냐 ?...아니 그건 부로치가 아니냐 ?.'
    그것은 대나무를 실 같이 쪼개어서 엮어 만든 흑장미 모양의 부로치였다.
   " 이거 정말 희귀히게 만들었구나 ! 수학 여행도 가지 않았으면서도 이건 어디서 구했느냐 ?."
   " 용서하세요 엄마. 엄마를 속이려고 친구한테 부탁했어요. 아버지의 향나무 재털이두요.호호..."
   " 망할 것 ! 내가 역에 나가지 않았드라면 감쪽 같이 속을 번 하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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