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산 넘어 산
소영은 새벽 종소리에 잠이 깼다.
그녀는 남편이 깰까 봐 조용히 방문을 열고 부엌으로 나와
바케스에 가득 더운 물을 담고 대문을 나섰다.
강희가 일을 나가는 날이면 어제나 이른 새벽에 주차장으로 나가 차를 닦고 깨끗이 청소를 했다.
그것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토스트를 굽고, 달걀 프라이 두 개에다 우유 한 잔을 따끈하게 대워 놓고
남편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거의 습관화가 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자기 집 택시가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을 한 바퀴 삥 둘러보아도 역시 없었다.
" 아저씨, 우리집 차가 안 보이네요 ?."
" 예 ?.... 이씨 아재 차는 어젛게 택시회사에서 몰고 갔는 데요."
" 네 ! 택시 회사에서요 ?."
" 아니, 색시는 여태 그걸 모르고 있었소 ? 이씨가 열쇠를 주면서 회사에 연락을 하라기에 ...."
전화를 하였더니 금방 회사에서 사람이 나와 몰고 갔다고 했다.
소영은 바케스에 든 더운 물은 주차장 담벼락에 부었다.
뿌옇게 피어 오르던 김은 순식간에 어디서 불어왔는 지도 모르는 찬 바람에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다.
슬픔과 절망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눈 앞이 잘 안 보여 집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술취한 사람 같았다.
어느새 일어났을까.
남편은 등을 돌린 채 동쪽으로 향한 창가에 서서 바깥을 노려보고 있었다.
벌써 몇 개비째인지 방안은 연기가 자욱했다.
그녀는 입으로 가져가려는 담배를 뺐어 재털이에 비벼 끄고,
남편의 등에 얼굴을 기대며 깍지 팔을 했다.
" 자기 이제 좀 푹 자요."
" 응 그래. 아직 날이 새려면 멀었지 ?."
불을 켜지 않아도 방안은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둘은 아랫목에 깔려 있는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그 때까지 아무도 차에 대해서 입을 열지 않았다.
" 자기야 ?."
" 응 ?."
남편은 여전히 벽을 향해 누운 채다.
" 나 몸이 이상한 것 같아요."
" 몸이 이상하다니 ?."
" 그것이 없어요. 가끔 구역질이 나구요."
" 뭐, 그럼 임신이라도...?."
그제야 강희는 아내 쪽으로 돌아 누우며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 미안해요 ! 그렇지 않아도 괴로운 자기에게."
" 미안하긴, 근데 확실한 거야 ?."
" 모르겠어요. 확실하게는....지난 달부터 여태 없어요."
" 그럼 오늘 당장 병원에 가 봐. 진짜 임신인지 아닌지...'
" 자기 나 임신하는 거 싫은가 봐 ?"
" 싫기는....내가 애기 아빠가 되는 일인데."
그러나 강희는 정작 소영의 입에서 임신이라는 말이 나오자 눈 앞이 캄캄했다.
솔직히 말해서 반가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 부인이 임신을 했다는 말을 듣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길길이 뛰는 장면이 모두 거짓말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생활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면 그럴는 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자기의 형편으로는 도저히 기뻐할 문제가 될 수는 없었다.
" 그럼 어떻게 해요 ? 전 그래도 반가워할 줄 알았는 데."
소영은 울상을 지었다.
" 아니야. 반갑고 말고. 영아 당신을 닮은 딸을..., 이왕이면 말이야."
강희는 아내를 꼭 껴안았다.
마지막 곷샘 추위일까.
기온은 그렇게 낮은 것 같지는 않은 데 헤드라이트에는 희긋희긋 철없는 눈발이 비치고 있었다.
부산의 봄은 이것이 봄인지 다시 겨울로 돌아가는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날씨가 변덕스러웠다.
이런 날은 시야가 좋지 않고, 특히 길이 미끄러워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날이긴 하나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것 보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돈이 좀 오르려는 지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나와 얼마 가지 않아서
손을 드는 사람이 있었다.
" 어이 택시."
( 제기랄 조용히 손만 들고 차를 세우면 안 되나. 변소에서 뭐 부러듯 어이 택시라니.)
강희는 속으로 그렇게 투들거리며 그래도 싫지 않은 얼굴로 차를 세웠다.
" 전포동....."
보아하니 도축장에 다니는 사람 같았다.
음성이 거칠고 몸에 비린내 같은 것도 풍기는 듯했다.
첫 손님으로 이런 사람을 태워서 어떨는 지,
썩 기분은 좋지 않았으나 어쩔 수는 없었다.
그는 원래 말이 없는 데다 기분마져 언잖아서 시무룩한 얼굴로 악세레타만 밟았다.
이 놈의 택시는 낡아서 그런지 정온기를 뽑아 버렸는 지는 몰라도 온천장에서
거제리까지 와도 히트가 잘 들어오지 않아서 미적지근한 공기 때문에 차 안에 도리어 습기만 찼다,
그래서 어디가 어딘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수건으로 앞 유리를 닦아도 금방 또 습기가 찼다.
" 운전수 양반. 여기서 좀 세워 주시요."
양반이라니. 운전수가 무슨 얼어죽을 양반이란 말인가.
이건 영감 아닌 사람을 영감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이 사람을 얕잡아 보고 하는
수작 같아서 몹시 불괘했다.
차라리 목적지에 와서 조용히 세워달라고나 할 것이지.
그는 오늘 따라 승객이 기사를 대하는 태도가 시건방스러워 보여 분통이 터졌다.
" 수고 하시오. "
손님은 속에 털이 달린 점퍼에서 돈을 꺼내 주며 긴 장화를 질질 끌고 내렸다.
" 손님, 잔 돈..."
" 필요 없소. 가지시오."
손님은 뒤돌아 보지 않고 도축장 안으로 사라졌다.
( 제기랄 거스럼 돈 30원으로 으시대기는.)
그것마저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강희는 담배를 부쳐 물고 도축장 앞에서 차를 돌려 흥아타이야 뒤를 돌아 적십자 병원 앞으로 왔다.
아직도 날이 밝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으나 병실에서 새어나온 불빛 탔인지
거리는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그는 거기서 시외 버스 주차장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 곳으로 가 볼 생각이 들었다. 혹시 첫 차를 놓치고 택시를 이용할 장거리 손님이 없을 까 해서였다.
그래서 그가 담배불을 끄고 차를 움직이려고 하는 데 병원에서 남자 한분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강희는 힐끔힐금 그를 쳐다보며 차를 움직였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사나이는 급히 뛰어 나오면서 손을 흔들었다.
군 작업복을 염색한 남루한 차림의 승객은 말없이 뒷좌석에 올라 앉았다.
오래 된 크레죨 냄새가 몸에 밴듯 구릿하게 풍겼다.
병 간호를 히느라 지쳐서 일까. 어디로 가자는 말 한 마디 없다.
택시를 탄 사람은 대체로 차에 오르자 마자 행선지부터 일러주는 편인데,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앞만 똑 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강희는 큰 길에 나와서야 할 수없이
" 손님 어디까지 가십니까 ?."
" 아 ! 자갈치로..."
이 사람은 또 어시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일까.
차림새는 그런 것 같았으나 조금 전 손님처럼 직업에 대한 냄새는 풍기지 않았다.
오늘 따라 그는 이상하게도 승객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 종전 같으면 손님이야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던 목적지에 내려주고 메다에 나온 대로 요금만 받으면 그만이었다.
시내로 들어오니 어느듯 눈발이 비가 되어 추적추적 차창을 때렸다.
" 아저씨, 지금 자갈치에 가면 회를 살 수 있을까요 ?."
" 글쎄요. 어물점이야 벌써 문을 열었겠지만 횟집은 아직...."
하다가 뒷말을 흐렸다. 너무 이르다고 하면 차를 세우라고 할까 봐 염려스러워서 였다.
" 그럼 됬습니다. 빨리 갑시다."
횟감은 조금만 사면 된다고 했다.
" 환자가 회를 들고 싶어 하나 보지요 ?."
" 네."
음성이 뜰리는 것 같아 빽미러를 보니
사나이는 손수건 같은 걸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환자가 심각한 상태일까.
회가 먹고 싶다고 할 정도면 그렇지도 않을 것 같은 데.
강희는 무슨 사연인지도 모르고 덩달아 슬퍼졌다.
" 손님 무슨 병인지 모르지만 곧 났겠지요."
" 나을 병이면 내가 왜 이렇게 울고 있겠소."
가난 때문에 아내가 임신 중에 너무 못 먹어서 임신 중독증에 걸려 어렵게 해산을 하였다고 했다.
" 그런데 내가 일을 간 사이, 그러니까 해산 이틀만에 이웃집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메리놀 병원으로 갔지 뭡니까.."
거기서 무료 진료를 받으려고 차가운 겨울 날씨에 무려 6시간이나 바깥에서 줄을 서 있었다고 했다.
결국 차래가 돌아오지 않아 진찰도 받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서 기어이 사경을 헤매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적십자 병원으로 옮겨 놓았는 데,
죽어가면서도 임신중에 그렇게 먹고 싶던 생선회가 잊어지지 않는 다고 해서, 이렇게 나섰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강희는 가슴이 섬뜩했다.
( 소영도 임신을 한 것 같다고 했는데 !.)
그도 필경 먹고 싶은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서글퍼졌다.
택시가 충무동 로타리를 돌아 자갈치로 들어서니 비는 어느새 멎었는 데.
그래도 새벽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바다 위가 온통 뿌옇기만 했다.
강희는 하도 시야가 흐려 눈을 비볐다. 손등에 물기가 젖어오며 시야도 좀 밝아졌다.
" 차비가 얼마나 나왔습니까 ?."
" 아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냥 내리십시요."
" 그냥 내리다니요 ?."
" 제가 아주머니에게 회를 사 드린 걸로 해 주세요."
그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우물주물 차비를 받아 챙긴 것이 갈 수록 후회스러웠다.
아뭍은 환자가 죽지 않고 그 회를 먹고 완꽤하기를 속으로 빌었다.
강희는 그곳에서 다른 손님을 기다리고 있기가 꺼림직 하여 본역으로 차를 몰았다.
영주동에서 아리랑 호텔 쪽으로 들어가지 않고 초량신호대에서 우로 꺾어 역 광장으로 들어갔다.
아리랑 쪽에서는 주로 남포동이나 대신동 방면의 손님이 나오고, 반대편에서는 서면이나 온천장,
그렇지 않으면 해운대 방면의 주로 멀리 가는 손님이 타기 때문이었다.
이 날 그는 하루 종일 차갈치에 내려준 손님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우울했다.
그러나 수입금은 전에 없이 많이 올렸다.
교통위반으로 두 번이나 적발되었지만 한 번은 사정을 하여 무료로 통과 되었고,
또 한 번은 돈을 조금 주고 해결을 보았다.
그것도 또 좀처럼 기회가 없는 합승을 세 번이나 하여 덤으로 남은 것으로 충당하였기에
그렇게 아깝거나 원통하지도 않았다.
차주에게 들여 줄 납입금 5천 원과 연료값을 제하고도 5천 원이나 더 남았다.
이것은 그가 택시 운전을 시작한 후 최고의 수입이었다.
강희는 손님을 내려준 골목 어귀에다 차를 세워 두고 돈을 세어본 후에
담배에 불을 붙혀 물고 바깥으로 나왔다.
담벼락에 오줌을 누고 시계를 보니 아직 통금은 한 시간아나 남아 있었다.
( 이만 집에 들어갈까.)
마침 차도 주차장 가까이에 와 있고, 한시 바삐 아내의 마음을 불안에서 해방시켜 주고 싶었다.
그래서 차고에 들어가니 벌써 차주가 나와 있었다.
그도 왕년의 자기처럼 어지간히 마음이 조급하여 일찍 주차장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외에 차가 일찍 들어 오자, 무슨 일이 있는 가 하여 눈이 뚱그래졌다.
차가 고장이라도 났느냐고 물었다.
" 아닙니다. 마침 온천장으로 오는 손님이 있어서..."
세삼스럽게 시내로 내려가기도 뭤해서 일찍 들어왔다고 했다.
" 그래 일찌감치 잘했다. 그까짓 좀 더 벌면 뭐하노."
차주는 아무탈 없이 최고의 납입금으로 한 시간이나 앞당겨 들어 온데 만족해 하였다.
강희는 열쇠와 납입금을 차주에게 건네 주고 얼른 온천시장으로 갔다.
막 문을 닫으려는어물점에서 산 숭어 한 마리를 회 떠달라고 했다.
그는 초장과 횟감을 비닐 봉지에 넣고,
다시 청과물 점에 들어가 밀감 한 봉지와 잘 익은 국광 열 개에다 바나나도 다섯 개나 샀다.
소영이 임신이라면 그도 필경 남들처럼 먹고 싶은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아직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 어머 ! 자기 벌써 웬일이야 ?."
" 응 그렇게 놀랄 건 없어. 안심 안심 ! 아무일도 없으니까."
" 그래요. 고마워요 ! 근데 이 건 뭐예요 ?."
" 응, 과일 좀 샀어. 자..."
"어머 ! 자기 정말 다시 봐야겠어요. 어쩜 이런 걸 다 사올 줄도 알고...'
남편이 껍질을 벗긴 바나나가 아내의 입으로 들어갔다.
" 어머 귤도 사셨네....근데 이 건 뭐예요 ?."
과일 봉투에 손을 넣던 소영은 무엇이 뭉클하고 손에 닿자, 멈칫 하며 물었다.
" 꺼내 봐."
소영은 바나나를 먹다 말고 봉투에 든 비닐 봉지를 조심스럽게 꺼내었다.
" 아니, 이 건 ?..."
" 횟감이야. 숭어..."
" 네, 횟감이라고요 ?."
소영은 욱 하고 토할 듯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부엍으로 뛰어 나갔다.
" 왜 그래 ?."
강희는 뒤따라 나가 아내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 회는 싫어하는 모양이군 !."
" 징그러워요 ! 절 야만인으로 아셨나 봐."
" 아니야. 애기를 가지면 그런 것도 먹고 싶어진다 기에..."
" 미안해요. 전 아직 생선을 날로 먹어 보지 않아서 그런지 갑자기 구역질이 나네요."
소영은 물로 입을 행구고 나서 세수대야에 더운 물을 부었다.
" 나 우유 끓일께요. 자기 세수하고 발 닦으세요."
강희는 아내가 시키는 대로 세수를 하고 발을 싰은 후 부엌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맨손을 흔들며 심호흡을 하고 나니 피로가 좀 풀리고 머리도 가벼워졌다.
타올을 목에 건 채 방으로 들어가니 소영은 어느새 우유를 끓여 식지 않게
컵 위에 접시를 얹어 두고 사과를 깎고 있었다.
" 자기 얼른 우유 드세요."
" 그래 당신도 조금하지 그래."
" 아니에요. 전 귤을 먹을래요."
" 그래. 그럼 어떡하나. 우리 이가에게도 우유를 좀 줘야겠는 데."
강희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우유잔을 비우고 나서 과일을 깎고 있는 아내 곁으로 닥아갔다.
" 어머 ! 이이가..."
소영의 입 안으로 미지끈한 우유가 들어왔다.
과일을 깎던 칼은 방 바닥에 떨어지고, 반쯤 껍질이 벗겨진 사과는 아랫목으로 굴러갔다.
" 자기 정말 제가 임신한 거 좋아해요 ?."
소영은 남편의 품안에서 물었다.
" 그럼 좋지 않고. 난 돈 많이 벌어서 훌륭하게 키울 거야."
" 그럼 어떡하지요. 오늘 병원에 가니까 임신이 아니라는 데...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소변검사에는 아무른 반응이 없다는 군요."
" 그래, 그럼 잘 되었구만 ! 애기야 차차 가지면 되지 뭐...
그럼 내가 아기 주라고 넣어 준 우유 도로 내 놔."
그러면서 강희는 와락 아내을 껴안고 입술을 빨았다.
소영의 십다만 사과가 남편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 사과 맛이 왜 이래 달짝지근해 !."
남편은 품 안에 든 아내의 입술을 떼고 입을 쩝쩝그리며 싱급을 떨었다.
" 자기 후에 나 예쁜 아기 낳아 줄께요."
" 그래. 오늘은 그만. 자자 우리."
" 네 그래요. 얼른 이불 펼께요."
강희가 자기의 택시를 포기하고 남의 차 운전사로 나선지도 어느덧 달포가 넘었다.
자기의 차를 가지고 사업을 하는 것보다 남의 차를 운전하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첫째 사고에 대한 염려가 없고, 차가 고장이 나든 말든 상관할 바가 아니어서 좋았다.
수입면으로도 이편이 나은 것 같았다. 연료값과 납입금을 제하고 남은 것이
이삼천 밖에 되지 않아도 그것은 모두 자기의 순이익금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타이야 펑크가 난다든지 제수 없게 교통 위반으로 두어 번 적발되는 날은
허탕 치기가 일쑤였다.
그래도 단 두 식구 먹고 사는 데는 별 지장은 없으나 자기의 택시를 수리하느라고 빌려 쓴
15만 원중 5만 원은 갚고, 남은 돈 10만 원의 이자를 물기에 바빴고,
원금을 갚기에는 얼마나 많은 날이 걸릴지 전혀 예측할 수는 없었다.
소영은 병원에 다녀온 후 구역질은 더 이상 하지 않았으나 맨스는 여전히 없었고
전에 없이 이상한 음식이 먹고 싶어졌다.
그것이 없는 것은 환경의 변화라든가 신경의 변화 때문에 오는 수도 있다지만
입덧이 있는 데 신경이 쓰여서 남편에게 얘기 했더니 큰 병원에 가서 다시 진찰을 받아 보라고 했다.
그러나 소영은 돈도 아깝고,그보다도 산부인과에 가서 남자의사 앞에 자기의 몸을 내어 보이기가
쑥스러웠고 남편도 애기 가진 것을 그렇게 싫어하는 것 같지가 않아서 당분간 그대로 있었다.
그날 따라 강희는 집을 나올 때 아랫배에 가끔 통증이 온다는 아내의 말이 마음에 걸려 하루종일
운전을 하면서도 무엇에 쫓기는 것처럼 불안을 느꼈다.
병원에 가보라고는 하였지만 아내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필경 그대로 참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더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그는 손님이 내리면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그러다가 손님이 타면 엉둥한 방향으로 흘러갔고,
그러다 보니 어느덧 밤 10시가 가까워서야 겨우 주차장 근방에 왔다.
그는 손님이 내리자 얼른 공차 카브을 씌우고 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기의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 보지 않고는 마음이 불안해서 더 이상 운전을 할 수 없었다.
과연 집에 들어가니 소영은 이불을 뒤집어 쓴 채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고통이 심했으면 옆방 사람들을 부를 소리조차 내지 못했을 까.
강희는 아내를 들쳐 업고 그 위에 그녀의 코트를 덮었다.
시계를 보니 통금 10분 전이다.
(이제는 할 수 없다. 사람을 죽이든지 살리든지 이 병원을 물러나지 않겠다.)
강희는 죽은 듯이 축 늘어진 아내를 추스리며<구 산부인과>라고 쓴 병원 앞에
가쁜 숨을 몰아쉬고 걸음을 멈추었다.
이 번이 네 번째의 병원이다.
금강원 입구에 있는 첫 병원에서는 입원비가 없다고 쫓겨 났고,
두 번째 온천파출소 옆에 있는 병원에서는 의사가 외출중이라는 바람에 스스로 물러 났고,
세 번째는 정신 신경과에 잘못 들어가서 산부인과 병원으로 가보라고 해서
발걸음을 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 번째 온천 삼거리에 이 병원은 문은 닫혔으나
안으로는 아직 불이 끄지지 않고 위급환자라고 쓰여진 비상벨 위에 빨간 전등이 들어와 있었다.
강희는 등에 업힌 아내가 미끄러져 내려오지 않게 허리를 굽히며 발돋음을 하여 비상벨을 눌렀다.
" 네에, 잠깐만요."
안으로 문을 따는 소리가 났다.
간호사인 듯한 아가씨가 까운을 벗은 채 문을 열어주며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강희는 묻는 말에 대답도 없이 문을 열고 내다보는 간호사를 밀치고 무조건 안으로 들어갔다.
" 선생님 저에게는 지금 5천원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젊은 있습니다.
이 사람을 살려만 주신다면 꼭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도와 주십시요."
" 젊은이 오해는 마시오.
입원비가 염려되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보시다 싶이 워낙 협소한데다 입원실이 만원이 되어서
도저히 더 이상 입원 환자는...."
"선생님 제발 도와 주십시요.
저는 지금 세 군대의 병원을 거쳐 여기까지 왔습니다.
집을 나올 때 제 아내는 그래도 의식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죽었는 지 살았는 지 조차 분간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선생님 마져 저희들을 버리신다면...."
" 좋소 ! 젊은이의 생각이 정 그러하다면 내 해보는 데까지 해 보겠소."
병원장은 환자를 응급실로 옮기게 했다.
강희는 간호사의 도움을 받으며 소영을 응급실 침대 위에 눞혀주고 나와 복도에서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했다.
도대채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진찰을 하려 들어간 의사도 간호사도 코끝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응급실 안으로 들어 가볼 수도 없고, 마음이 조급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 아, 아가씨, 결과가 나왔습니까 ?."
마침 급히 도어를 열고 나오는 간호사를 잡고 물었다.
" 아니에요. 정밀 검사를 하고 있어요.
우선 수혈부터 해야겠어요. 출혈이 심해서요."
간호사가 수혈 준비를 하고 들어간 후 한참 있으니
원장이 물 묻은 손을 타올로 닦으며 복도로 나왔다.
" 어떻게 되었습니까 ? 선생님."
" 곧 수술을 해야겠소."
환자는 자궁외 임신인데 이미 난관이 파열되어 뱃속에 대 출혈이 되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최후로 질에 주사기를 찔러 보아서 뱃속에 피가 고인 것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는 처음 단순히 유산을 한 환자인 줄알았으나 자궁으로는 조금만 출혈이 있을 뿐인데
환자는 심한 빈혈 상태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계속 쇽크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원장은 자리에 든 간호사들을 깨우게 하고 어디에다 전화를 걸어 동료의사도 한 사람 불렀다.
수혈을 하는 동안 수술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그러나 환자가 빨리 기럭을 회복하지 못하여 새벽 2시에 시작하여 4시가 훨씬 넘어서야 끝이 났다.
환자가 너무 쇠약해 있는 데다 출혈이 멎지 않아 애를 먹었다.
혈액도 예상외로 많이 들었다. 다행이 수혈을 받기에 까다로운 혈액이 아니여서
혈액을 구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으나 수술비는 엄청나게 많이 나왔다.
그러나 원장은 수술비에 대해서는 일체 말을 하지않고 환자는 병실이 빌때까지
당분간 간호사들이 기거하는 방에 함께 있도록 했다.
그러니 강희는 부득히 환자의 곁에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아내를 혼자두고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복도 나무의자에서 뜬 눈으로 밤을 세웠다.
다음 날 강희는 병원장의 소개장을 들고 B산업 사장님 댁을 찾아갔다.
약도를 보지 않아도 그 곳은 금방 찾을 수가 있었다. 금강원을 올라가다
첫번째 좌측으로 꺾어진 도로에서 조금 가다 우로 꺾어진 산비탈 막바지에
절간처럼 웅장한 기와집이 숲속에 싸여 있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까마득하게 멀리 올려다 보이는 나무가지 사이로
햇빛이 반사되고 있는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 절 따라 오세요."
병원장님이 보내서 왔다고 하니 가정부가 앞장을 섰다.
대문에서 현관까지는 꽤 멀었다. 거기에는 웬통 자연석으로 꾸며져 있었고,
오솔길 좌우로 정원수가 무성했다.
" 아저씨 이리로 올라와서 여기 좀 앉으세요."
가정부는 응접실로 강희를 안내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흰 털이 솜처럼 푹신하게 깔려 있는 호화로운 쇼파에 앉기가
어쩐지 흙탕물에 주저앉았던 바지를 입고 요위에 앉는 기분이 들어 엉거주춤 서 있으니
도어가 열리며 훤칠한 50대의 남자가 싼데리아 불빛에 기름진 이마를 번뜩이며 나타났다.
뒤이어 단발머리의 아가씨가 약차 두 잔을 들고 들어오며 말없이 이편으로 가벼운 목례를 했다.
" 자 이리로 앉게."
" 네, 제가 이 강희 입니다."
" 그래, 자네에 대해서는 김박사한테 대강 들었네. 고생이 많다지. "
"......"
" 참 부모님이 안 계신다고 했던가 ?."
" 네, 제가 어렸을 때 돌아 가셨습니다."
강희는 시골에 계신 큰 아버지댁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부산으로 왔다고 했다.
" 부산에 누가 있는 가 ?."
" 아무도 없습니다."
" 아무도 없다니 ?."
고아원에서 자랐다고 했다.
" 뭐 ! 고아원에서...."
정사장은 얼굴을 찡그리며 끼름직한 표정을 지었다.
" 자, 차나 들게."
그래서 얼른 마시고 그만 가보라는 뜻일까.
정사장는 이미 심중을 굳힌 듯 강희가 내민 이력서를 펼쳐 보지도 않은 채
응접실 위에 내려두고 담배에 불을 붙혀 물었다.
" 어서 들라구."
" 네."
강희는 이제 틀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사장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 그럼 공부도 제대로 못했겠구만."
하고, 흘러 보내는 말처럼 물었다.
" 고등학교는 졸업했습니다."
" 뭐, 고등학교를....?."
" 네, 고아원에서요."
" 그래 !."
정사장은 그제서야 응접실 위에 놓인 이력서를 가져다 펼처 보았다.
" 응, K고등학교를 나왔군."
그는 점차 표정이 밝아지며 두어번 고개를 끄덕였다.
" 군에서도 차를 몰았다지 ?."
" 네. "
" 높은 분의 차라면 역시 지프차겠지."
" 네,. 그렀습니다."
" 그래도 지프는 승용차와 다른 점이 많으니까, 자네 운전 솜씨를 좀 보여 줄텐가 ?."
그의 이럭서에는 택시를 운전했다는 것은 쓰지 않았다.
사장님들은 대체로 택시기사 출신을 자기의 운전사로 채용하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난폭하게 차를 몬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그도 그것을 기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사장은 가정부를 불러 자동차 열쇠를 가져오게 했다.
차는 68년형 일재 크라운이었다. 핸들이 우측에 장착되어 있고,
첸지레바는 핸들 죄측에 붙어 있어서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욱이 택시만 하다가 그것도 운전대가 반대편에 붙은 큰 차에 으르니
벌써 긴장이 되어 손발이 떨렸다.
그는 스몰 라이트를 켜고 얼른 계기판의 배치를 확인했다.
시운전 도중 잘못 조작하여 실수라도 할까 염려해서였다.
정사장은 점퍼 차림으로 뒷좌석에 올라 앉았다.
그러자 강희도 운전대에 올라 앉아 시트를 자기의 몸에 맞게 조정을 한 후
시동을 걸고 조심스럽게 기어를 넣어 악세레타를 밟았다.
무엇보다도 승용차 운전은 출발을 부드럽게 해야 하기 때문에 크랐지에 온 신경을 쏟았다.
차는 등치에 비해 거짓말처럼 가벼웠고 엔진 소리도 전혀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시동이 걸렸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어느새 오기 시작했는 지 차고를 빠져 나오니
이슬 같은 봄비가 차창을 적셔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시운전을 하기에는 아주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었다.
스몰라이트를 켜고 부라쉬를 작동 시켰다.
다행이 부라쉬는 택시에 비해 엄청나게 잘 닦였다.
" 동래 사거리를 한 바뀌 돌아 보세."
강희는 원예 고등학교 앞으로 해서 동래 사거리 쪽으로 차를 몰았다.
" 운전대가 오른편에 있어서 좀 불편하지 않은가 ?."
정사장은 응근히 외재차를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물었다.
" 네, 처음이라 그런지..."
" 그래 좀 읶숙해지면 그나저나 매 일반이겠지."
사장님은 그의 운전솜씨에 어느 정도 만족한지 내일부터 당장 일을 해 달라고 했다.
" 내 미리 말해 두겠는데, 월급 2만 원에 식대는 3천 원이네."
지금 있는 사람도 그렇게 주고 있다고 했다.
" 네, 고맙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강희는 기뻤다.
그 당시 2만 3천 원이면 많은 급료는 아니었으나 절약을 하면
그런대로 조금은 저축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입면으로 보면 택시와 비슷하나, 그것은 무엇보다도 몸이 고단할 뿐 아니라
쉬는 날이면 전날 번 돈을 전부 까먹기기 일쑤이기 때문에 돈이 모이지 않았다.
사장님 댁을 물러나온 강희는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 원장님,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 그래, 내 체면을 보더라도 열심히 해 주게."
" 네, 정말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
강희는 원장실을 물러나와 아내가 누워 있는 간호사들의 방을 향해 걸음을 빨리 했다.
방안에는 여럿이 있는 듯 재잘그리는 소리가 복도에까지 들려왔다.
그는 몇번인가 망서리다 용기를 내어 노크를 했다.
" 누구세요 ?."
" 접니다. 환자의...."
" 환자의 누구요 ?."
" 얘는 누구긴 누구겠니. 저 분의 새 신랑님이시겠지."
" 어머머 ! 새 신랑이라니. 애기 아빠가 되다만 사람을 보구서."
여전히 문은 닫친 채 들어 오라는 말은 없고
" 그럼, 헌 신랑인가 뭐.! 그 새 ?......"
하고 , 까르르 웃어 댔다.
" 죄송합니다. 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 죄송하다니요. 각시방에 신랑님이 들어오는 건 당연하잖아요."
하고, 또 다시 까르르 웃음소리가 나더니 미닫이 문이 스르르 열렸다.
환자의 침대와 마주한 쇼파에 나란히 앉아 수다를 떨고 있던 간호사들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먹이며 쿡쿳 웃고 있었다.
" 죄송합니다. 곧 돌아 가겠습니다."
" 아니에요. 우린 곧 회진에 들어가야 해요. 둘이서 다정하세요."
간호사들은 우루루 밖으로 몰려나갔다.
방문이 닫히자 강희는 일어나 앉으려는 아내를 도로 침대에 눕혔다.
" 됐어 ! 이제 됐어, 취직이."
하고, 아내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 네 그래요. 정말 잘 됐군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죠 ?."
" 그래, 모두가 다 원장선생님이 애쓰신 덕분이야 !."
" 네, 우리 꼭 잘 살아서 이 은혜를 갚아요."
" 그래. 그래."
간호사들이 나가고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금방 돌아 가겠다던 강희는 일어날 줄 몰랐다.
할 수 없이 소영이 서운한 얼굴로
" 자기 그만 돌아 가세요. 회진이 벌써 끝났을 거예요. "
하고, 남편이 쥐고 있는 손을 살며시 뺐다.
" 그래. 아가씨들이 돌아오면 내 나갈께."
" 아니에요. 자기가 있는 줄 알고 못 들어오나 봐요."
소영은 오래토록 남편을 자기의 곁에 둘 수 없는 것이 슬펐다.
" 불편하심 식사는 사 잡수도록 하세요. 당분간은 요."
" 아니야. 해 먹었어. 김치가 알맞게 익어서 오늘 아침도 밥 한 그릇을 ..."
거짓 말이었다.
김치를 담은 게 어저께인데, 그것이 익을리 만무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소영이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날 아침 아랫배에 통증이 오는 것을 무럽쓰고 배추를 사다 담가 두고 자리에 누웠던 것이다.
" 자기 그러지 말고 제발 끼니를 거르지 말아요. 그러다가 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 허허 누운 사람이 앉은 사람 걱정을 다 하는 구만."
" 아니에요. 제발 제 말을 들으세요.
자기가 그러니까 전 더 힘이 빠지는 것 같아서 일어날 수가 없어요."
" 그래. 그럼 내 지금 당장 나가서 설렁탕이라도 한 그릇 해 치우고 들어갈께."
" 네, 정말 그렇게 해요. 제 걱정은 마시고요.
전 간호사 아가씨들이 너무너무 잘 해주고 있어요.
그러니 얼른 가보세요."
강희는 아내를 떳떳하게 병실이 있는 병원으로 옮겨주지 못하는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 미안해 !.'
" 아이 아가씨들이 들어 오면 어쩌려고."
소영은 남편의 가슴을 떠다밀며 입술을 피했다.
그때 복도에서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여기예요."
" 예, 고맙습니다."
만길의 목소리였다.
" 어이 봐라. 강희 있나 ?."
그는 다자고자 방문을 확 열고 안으로 들어서며 쥬스와 과일이 든 봉지를 윗목에 내려 놓았다.
" 아니 그대로 누워 계시소. 그래 우짜다가 이 고생인기요."
" 죄송해요! 번번히 폐만 끼쳐드려서."
" 그래. 이제 끝났니 ?."
" 응, 아주 끝냈다. "
" 아주 끝냈다니 ?."
" 야 자가용도 더러워서 못해 묵겠더라."
" 왜 ? 언젠가는 그럴 수 없이 편하다더니."
" 몸이야 편하지. 그렇지만 아니꼬운 일이 한 두 가지라야지."
" 그래. 우리 나가서 얘기하자. 여긴 간호사 아가씨들 방이라 놔서."
" 응, 그러고 보니 여기가 입원실이 아니구나 ! 어쩐지...."
그는 어색한 얼굴로 새삼스럽게 방안을 삥 둘러보았다.
" 형편이 되어야지. 마침 빈 방도 없고."
만길은 고개를 끄덕이며
" 아무려면 어떤노. 병만 나으면 고만이지, 그럼 우린 나가자. 제수씨 몸조리 잘 하이소."
" 어쩌지요 ? 손님을 오시자마자..."
강제로 내보내는 것 같아서 소영은 마음이 아팠다.
" 무슨 소리를 ....내야 마 꽨찬심더. 어짜든지 몸조리나 잘 하이소. 이 놈아를 보아서도요."
병원을 나서자 만길은 얼마나 참았던지 길거리가 떠나갈 듯 떠들어 대며
오늘 그만두고 나온 사장을 욕했다.
" 근데, 너는 어쩌다가 한 해도 못 채우고 쫓겨났냐 ?."
" 말도 마라. 그 놈의 가씨나 때문에 안 그랬나."
" 가씨나라니 ?."
" 그 집 딸 말이다."
"그 집 딸을 어쨌게 ? 대관절 나이가 몇 살이나 됐는 데 ?."
" 내가 남의 집 딸 나이를 어떻게 아노. 고 삼이라 카더라."
" 뭐, 고삼 ? 그럼 너 혹시 그 아이에게 나쁜 짓을 하려다가 ...."
" 뭐라카노 임마가. 내가 그래 그런 놈으로 밖에 안 보이냐 ?."
" 넌 원래 그런 끼가 좀 ......"
" 그래도 그렇지. 야 그것도 사람을 봐 가면서 그라지 그 어린 학생한테야 어찌...."
" 그럼 무슨 일로 ?..."
" 나 원 더러워서 !."
만길은 식탁 옆으로 마른 침을 퉤퉤 뺕고 나서 화풀이라도 하 듯 와싹와싹 깍두기를 깨물었다.
" 야 너 빈속에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냐 ?."
" 빈 속이라니 ?...
그러고 보니 니 놈이야 말로 이제까지 저녁을 안 먹은 모양이구나 !
야 아무리 어렵더라도 끼니를 거를 생각은 말아라 너.
물론 그경황에 밥 생각이야 나겠냐 마는 그래도 먹을 것은 먹어야지.
기름 없는 차가 움직이더나."
만길은 자가용을 조금 몰더니 사투리도 많이 없어지고 제법 세련되어 있었다.
그는 또 묻지도 않고 곰탕 한 그릇을 시키고 소주 한 병을 더 가져오게 했다.
" 참 너도 어지간히 재수 옴 붙은 놈이다. 어찌 그렇게도 일이 안 풀리고 꼬여만 가노."
" 야, 남의 이야기 그만하고 네 얘기부터 해라."
" 그래 참 그렇지 ! 나도 남의 동정이나 하고 있을 팔자가 아니지.
그렇지만 야, 내가 아무리 모가지가 되었다고 당장 입에 거미줄 칠 형편은 아니다
너. 씨팔 안 되면 또 영업용을 타지 뭐. 니나 내나 옛날부터 하느님이 버린 자석 아이가,
요세 말로 선택된 인간이란 말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쥐뿔 나게 잘 살아 보겠다는 욕심은 없어.
여태 버둥거려 보았지만 역시 다람쥐 쳇바꾸 돈 신세였으니까.
옛 말에 아무리 재수 옴 붙은 사람이라도 일생에 세 번은 행운이 온다는 말이 있지.
지금 생각하면 그걸 믿은 내가 잘못인거 같아.
나는 그렇게 오래 살아 온 것은 아니지만, 응근히 그런 요행을 바라고 살아 왔거든.
그런데 드디어 나에게도 그런 행운이 왔어.
어느 날 밤이였지. 손님이 두고 내린거야.
얼마나 되더냐고 ? 수표 같은 종이 쪽지를 빼고도 현금으로 택시 열 대를 살 수 있는 돈이였어.
처음에는 가슴이 마구 뛰더구만.
통금이 멀은 시간이어서 일찍 차고에 들어 가기가 수상할 것 같아서
어두운 외진 골목에 차를 쳐밖아 두고 소주 한 병을 마시면서 생각을 했지.
내가 과연 이 금가루를 마시고 행복해 질 수 있을 까 하고. 물론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겠지.
그러나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뛰는 데, 일생동안 양심의 고통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까 생각하니
눈 앞이 노래지더구만. 역시 가난한 사람은 가난 속애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고 느꼈지.
그렇게 생각하니 어느 새 가슴이 편안해지데. 그래서 마시다 남은 소주병을 버리고 차를 몰았지.
돈 가방을 두고 내린 곳에서 나는 금방 돈 주인을 찾을 수 있었어.
대문을 화짝 열어둔 채 넋나간 사람처럼 어둠속을 바라보고 있더구만.
물론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혀서지.
그 집에도 자가용이 있었어,
포드 20M였지.그것을 두고 어째서 그 많은 돈을 가지고 택시를 탔는 지후에 알았어.
삼 일 전에 들어온 기사가 열쇠를 꽂아둔 채 영주터널 안에서 내렸다나.
이유야 뻔할 뻔자지. 물어 보지 않아도 말이야.
적성 검사를 받은 기사가 갑자기 돌리야 없고,
아무래도 이편에 이상이 있었던가 봐.
그건 그렇고, 내가 돈 가방을 건네 주자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르면서 안으로 좀 들어오라는 거야.
나는 사례금으라도 좀 줄줄 알고 따라 들어갔지.
웬걸 그에 대한 일언방구는 없고 내일부터 자기의 차를 맡아 달라는 거야.
중앙동에서 최고의 대우를 해 주겠다고.
그래서 예초에 사례금 따위는 크게 바라지도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황송하게 허가의 청을 받아들였지.
뭐, 아무리 그렇더라도 한때나마 자기가 모셨던 사장님을 그렇게 불러서야 쓰느냐고 ?
야 웃기는 소리 좀 작작해라. 너도 내일부터 자가용을 타게 되었다고 하니 내 한 마디 하겠는 데.
제 아무리 인격과 학덕을 갖춘 놈이라도 한 주일만 지내 봐라. 입에서 절로 욕이 안 나오나.
있는 놈들의 하는 짓이 하나 같이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꼬운데 제 놈의 인격인들 별 수 있을 라고.
그건 그렇고 첫날은 청사포로 어떤 여자를 데리고 회를 먹으려 갔어.
내리면서 여자 앞에 보란 듯이 깔깔한 5백원짜리 한 장을 꺼내주며 점심을 먹고 기다리라고 하더구만.
나는 짜장면 열 그릇에 가까운 돈이라 눈이 뚱그래 지면서 잔돈이 없다고 했지.
그랬더니
" 이 사람아 누가 잔돈을 달랬나. 남은 건 용돈에 보테 쓰게 "
하잖아.
그래서 공손하게 받았지.
그 자리에서 두어 시간을 기다려도 지루한 줄 모르겠더라.
그런데 밤에는 온천장 어느 호텔에 갔는 데 저녁을 먹고 기다리라고 하면서 또 5백 원을 주잖아.
이런식으로 한 삼 일 계속되는 데, 야 이거 부자가 눈 앞에 보이데.
이대로 나간다면 몇 해 안 가서 한 믿천 잡겠다는 생각이 들어 절로 어깨가 으슥해 지더구만.
이런 맛에 자가용을 모는 개새끼들이 되 못하게 목에 새끼줄를 매고 다니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웬 걸. 삼 일을 고비로 차차 식대가 줄어 들더니 한 열흘 쯤 지나니까 이제는 아 예 가물치 코구멍이야. 돈을 주기가 아까우면 제 돈으로 밥을 먹고 있으라든지, 그렇게 하기가 낯 간리러우면 몇 시 쯤에 나오겠다든지, 말이라도 해 주면 좋겠는데 이건 언제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 놓고 밥을 먹으려 갈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처음에는 몇 끼를 놓쳤어. 배에서는 쪼르륵 소리가 나고 울화가 치밀어 오르데. 나중에는 기다리다 밥을 먹으려 갔다는 핑계로 차를 세워둔 채 마구 돌아다녔지. 자기도 차에서 한 번 기다려 보아라, 그 맛이 어떤가 하고. 그러나 웬 걸.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사장님은 그때까지도 꿩구워 먹은 소식이였어.
어느 날 밤이었어. 그 날도 밥을 굶고 차 안에서 동태가 되다 싶이 쭈그리고 앉아 떨고 있었지. 왜 히트를 틀지 않았느냐고 ?. 말도 마라 야. 얼어 죽었으면 얼어 죽었지, 그 놈의 기름을 태우고 그 잔소리를 누가 듣게. 야 정말 더럽고 치사하더라.
두어 번 당하고 나서는 절대로 세워두고 시동을 걸지 않기로 했어.
허가는 자동차의 기름도 자기가 타고 있지 않을 때는 절대로 넣지 않았어.그것도 언제나 계기가 빨간 선을 훨씬 넘어가서야 겨우 한 말 정도가 아니면 부끄럽게도 반말을 넣었어. 그러니 실상 세워두고 히트를 틀 수도 없는 형편이었지. 허가도 아마 그런 꿍꿍이 속을 노렸든가 봐.
그렇게 노랭이짓을 하니 어떤 골빈 놈이 그 어른의 차를 몰겠어.
처음 내가 차를 몰고 중앙동에 있는 회사에 나가니 주위의 기사들이 이상한 눈치를 보이더군. 조롱을 하는 것 같은 얼굴로 말이다. 그런 것이 직감으로 와 닿았어. 하지만 나에게도 차마 그러실려고. 나는 그분의 엄청나게 많은 돈 가방을 돌려준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어. 이제는 자꾸만 이용을 당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날 밤도 온천장에 있는 어느 호텔에 내리면서 혹시 그래처 손님을 모셔드려야 할지 모르니까 잠간 기다려 보라는 거야. 먼곳도 아니고 자기의 집이 엎드리면 코 닿을 곳에 있는 데도 기다리라고 하니 정말 환장하겠더구만. 하지만 할 수 있어 기다리는 데까지 또 기다렸지.
그런데 11시 경에 나온 손님은 머리에 아직도 물기가 마르지 않은 케디 아가씨잖아. 나 원 기가 막혀서.
뭐야 ? 그 아가시가 케딘지 무엇인지 네가 어떻게 아느냐고 ? 야 임마 그것도 모르고 내가 무턱대고 주둥아리를 놀리는 줄 아나. 그년은 몇 일 전에 골프를 치려갔다 내려오면서 골프장 아래에 있는 버스 절류장에서 태웠던 년이라고. 그 때 그년 때문에 얼마나 쇼를 벌린 줄 아나.
허사장은 원래 길에 여자가 서 있는 걸 보면 무조건 태우라는 버릇이 있거든. 그래서 나는 운전을 하면서 먼저 교통 경찰관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길거리에 치마를 두른 동물이 있나 없나를 살핀다고. 그래서 멀리 여자 같은게 어른거리면 그때부터 악세레타에 힘을 주는 거야. 그때 허사장이 요물을 발견하고 정지 명령을 내려봐야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차는 벌써 목표물을 100여 M나 통과한 후거든.
그런데 그것도 한두 번 속아 보더니 이제 허사장은 내 작전을 눈치 채고 자기가 먼저 관측을 하는 거야.
그래서 자기의 레이다에 포착되면 점잖게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 나서
" 이 사람아 내려가는 길에 저 아가씨들을 좀 태워주게 "
라고 하거든. 그러는 데는 나도 꼼작없이 차를 세우지 않을 수 없지. 그런데 요즘 것들은 도대채 어떻게 돼 먹은 건지 백이면 백 모두가 다 차를 세우면 안 타겠다는 년이 없으니 기가 찰 노릇이 아니야. 그러면 조용히 목적지에 내려주면 얼마나 고맙겠어. 그런데 차에 올랐다 하면 재벌처럼 으시대는 허사장의 꼬임에 넘어가기 마련이거든. 그러니 나는 또 그 잡것들이 놀아날때까지 불고기 집에서 캬바레로, 거기서 또 호텔로 헤매야 할 판이니 이거 어디 울화통이 터져서 살 수가 있어야지.
그날 밤도 자기는 살살 걸어 갈테니까 그 아가씨를 집에까지 실어다 주고 오라잖아. 금방 머리에 열이 확 오르더구만. 할 수 없이 꾹 참았지. 나는 집이 어디냐고 묻지도 않았어. 마구 앞으로 달리기만 했지.
" 아저씨 이리로 가면 어떻게 해요 ? 집이 괴정인데"
" 뭐, 괴정 ? 그럼 진작 그렇게 말을 할 것이지, 네 입은 붙었더냐 ?. 이 우라질 년아."
내 입에서 꽉 튀어 나오려는 욕을 꿀컥 삼키며 동래 사 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만덕 터널 방향으로 차를 몰았어. 괴정이라면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가나, 거기 거건데도 말이야. 나는 화가 나서 백미러로 뒤를 보았더니 이건 지가 무슨 사모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뒤시트에 버띠고 앉아서 내 뒤통수를 노려 보고 있는 거야. 또 열이 확 오르데. 되지 못한 걸래 쪽 같은 기집애한테까지 무시당해야 하는 가고 생각하니 당장 꺼내어 지근지근 밟아 죽여버리고 싶었어. 그렇지 않아도 이 년 때문에 저녁도 굶고 여태 차에 죽치고 앉아 기다렸던 몸이 아닌가.
그래도 나는 꾹 참으며 화풀이 하듯 마구 차만 몰았지.
" 어저씨 차를 그렇게 난폭하게 몰면 어떻게 해요."
하고, 나무라며 주제에 핀찬까지 주잖아. 또 핏대가 확 오르더구만. 그때 차는 어느새 엄궁을 지나 멀리 에덴공원이 헤드라이트끝에 아른거렸어.
나는 커브를 돌지 않고 바로 진개장으로 차를 몰아 넣었지. 미친듯이 말이야. 시동을 끄고 룸등까지 끄니 사방이 칠흙 같이 어두웠어. 달도 없는 밤이라 하늘에는 별만이 총총 있을 뿐 인적이 드문 곳이라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 했어. 물론 멀리 을석도에서 겨울 바람에 스치는 갈잎 소리야 들려왔겠지. 그러나 그때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어.
나는 차에서 내려 조용히 뒷문을 열고
" 어어이 미스 사모님 ! 이리로 좀 나오시지."
하고, 점잖게 말을 했지.
그러니 나의 지나치게 까라 앉은 음성에 다소 압도라도 당했는 지, 그는 억지로 태연을 가장하며 그래도 주둥아리로 대항을 하더구만.
" 아니 이 사람이 왜 이래요 라니 ? 잔소리 말고 썩 나오지 못하겠어.니 같은 년은 따끔한 맛을 좀 봐야 한다구. 네가 아무리 허가에게 몸을 대주고 그 놈의 등을 업었다고 하지만 사람이면 자기의 푼수를 좀 알아야지, 귓바퀴에 솜 털도 안 벗어진 년이 그래 허구헌 날 무슨 지랄을 한다고 네 애비 같은 놈하고 붙어 먹어. 그래, 네 몽둥아리를 가지고 네 멋대로 놀아나는 것까지는 좋다 이거야. 하지만 죄없는 나는 뭐야. 네 년놈들이 쳐먹고 싶은 것 다 쳐먹고 후끈그리는 호텔 방에서 개지랄을 떠는 동안 나는 이 년아, 배를 쫄졸 굶고 냉장고 같은 차 속에서 네 년놈들의 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줄을 몰라서 또 되지 못하게 잔소리까지 늘어 놓아. 야 ! 두 손은 왜 싹싹 비비고 그래. 네 눈에는 내가 귀신으로 보이냐 ? 그래, 그 잘 보았구만. 염라대왕으로 말이야."
나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캐디의 멱살을 확 잡아 당겼어.그러자 단추가 끌어졌는 지는 모르지만 젖통 두 개가 대포알 같이 확 튀어 나왔어.갑자기 마음이 이상해지더구만. 살이 벌벌 덜리던 분노가 사라지는 것 같은 것이 말이야.
나는 얼른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독해지려고 애를 썼지.
" 이 년아. 그래도 냉큼 못 나오겠어 ? 뭐야 말로 하라고. 웃기지 마라. 악은 악으로 선은 선으로 갚는 것이 내 생활 신조라구. 그러니 네가 진정으로 여태 껏 죄를 짖지 않고 살았다면 나와서 네 발로 걸어 가. 내 믿고 그냥 보내 주마. 조금 걸어서 큰 길에 나가면 아직도 버스가 있을 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어서....아니 왜 못 나오는 거야 ? 그러고 보니 조금은 양심 같은 것이 있는 가 보구나 ! 좋아 그렇다면 내 철학대로 해주지,"
나는 가슴을 풀어 제껴 놓은 채 뒤 시트에 쳐박혀 오들오들 떨고 있는 캐디 옆으로 올라 앉았어.
" 자 벗어라구 네 손으로 ...뭐야 제발 이러지 말라고, 이게 정말 죽고 싶어서 그래. 이 년아 정 벗기가 싫으면 젖통이라도 좀 가려. 여기가 허가 놈의 안방인 줄 아나. 나 원 눈 앞이 어지러워서. 자 어쩔테냐 ? 네 손으로 못하겠다면 내가 벗겨 줄까 ? 뭐 왜 그러냐구 ? 제발 용서해 달라는 말은 더 이상 하지 말라고. 참는 것도 한도가 있어.
응 그러고 보니 나한테는 돈이 없어 못 주겠다는 가 본데. 그렇다면 어디 한 번 죽어 봐라. 내 아무리 저녁을 굶었서도 네깐 년 모가지 하나 쯤 누르는건 식은 죽 먹기라고. 그래서 저 쓰레기속에 묻어 버리면 너는 그것으로 끝장이야. 내일 새벽이면 쓰레기를 실은 시청 청소차가 너를 연탄재 같은 걸로 더 깊고 따뜻하게 묻어 주겠지.아무도 몰래 고이 잠드시라고...그래, 진작 그래 나올 것이지 원 !
재기랄 빼기는 너도 돈이면 다가 아니라는 걸 좀 알아라. 그리고 나를 악한 놈으로 욕하지 말거라. 원죄를 생각해. 나로 하여금 이렇게 하게 한 너희들의 원죄를 "
나는 징개장으로 차를 몰아 넣었을 때 이미 모든 것을 각오 했어. 그 직장을 그만 두기로 말이다. 그런데 말성을 불일 줄 알았던 그 년은 그 후 다시 허사장 앞에 나타나지 않았어. 그렇다고 퇴근이 빨라진 것도 아니였고, 허사장의 엽색 행각도 여전 했지.
그런데 내가 차마 그 집을 떠나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나날을 보냈던 것은 아마도 그 집 무남독녀 때문이었나 봐. 생기기도 인형처럼 잘 생겼지만 자기의 집이 그렇게도 부자이고 보면 무엇 하나 기러운게 없을 텐데, 그 아이는 어쩐 일인지 항상 우수에 젖어 있었어.
차고와 마주보는 2층에 그의 공부방이 있었는 데 비오는 날이면 창가에 서서 시름없이 바깥을 내다보곤 했었지.
어느 날 밤이었어.
나는 통금시간이 가까이 되어 차고에 차를 넣다 우연히 불꺼진 여학생의 방을 쳐다보게 되었는 데, 글쎄 그 애가 달빛이 고교히 비치는 창가에 서서 먼 하늘가를 바라보고 있잖아. 두 손바닥을 창에 붙혀대고 말이야. 그 표정이 내가 보기엔 눈물 겹도록 외롭고 쓸쓸하게 보였어.
오늘 아침이었지. 아버지가 일본을 가시는 데 전송겸 대연동에 있는 영어 선생님 댁에 과외 수업을 받으려 간다며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탔어.
그날은 일요일이기 때문에 낮에 수업을 받는다더구만. 그애는 자기 집 자가용을 자주 타는 편은 아니었어. 어쩌다가 아버지가 나가실때 편승을 했을 뿐이었지. 그런데 차를 탈때마다 아버지가 다정스럽게 자기와 함게 뒤에 타라고 하여도 기어이 앞 좌석에 안곤 했어. 여자 관계가 복잡한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가 보기엔 부녀간에 통 정이 없는 것 같았어. 온 집안 식구가 함께 있는 시간이라고는 식사 시간 뿐이었는 데 그것마져도 싫은 듯 그 아이는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자기의 방으로 올라 가버리곤 했지.
그런데 어머니 하고는 상당히 다정한 것 같았어. 물론 어머니 편에서 더 극성스러웠지. 사모님은 일구월심 그 딸 하나만을 위해서 사는 것 같았어. 그 애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 쯤이면 언제나 버스 정유소까지 마중을 나가곤 했지. 그러니 그 아이도 자연히 친구들과 어울릴 수가 없었어.
" 어머니,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전 이제 어린 애가 아니예요. 고 삼이에요,고삼..."
딸이 그렇게 투정을 하면 사모님은 또
" 아니다 애. 나한테는 신경을 쓰지마라."
라고, 하면서 시장에 무얼 사려가는 길이라는 둥 궁색한 변명을 하곤 했지. 그런데 또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아이는 다른 계집 아이들처럼 자기 어머니에게 엄마라는 말을 쓰지 않고 언제나 어머니라고 깍듯이 존칭을 썼어. 듣기에는 거리감이 느껴지더군.
우리들은 수영 비행장에서 사장님을 내려 드리고 곧 바로 차를 돌렸어. 역시 그 아이는 내 옆에 탔어.
" 아저씨 우리 드라이브 할래요 ?."
비행장을 나서자 뜻 밖에도 속삭이듯 말했어. 아직 한 번도 나에게 말을 걸어 오지 않았던 애가 말이야.
' 드리이브라니 ? 과외수업은 어떡하고 ?."
" 하루 쯤 안 가면 어때요."
" 사모님한테 야단 맞을려고."
" 어머니는 안 계세요."
어젛게 급한 전보를 받고 시골 외가 집으로 내려 가셨다고 했어.
" 그래도 학생은 공부를 해야지."
나는 대연동을 향해 차를 몰았어.수영 삼 거리가 가까워 오자 그 애는 내 옆으로 바싹 다가 앉으며 애원하다 싶이 했어. 그래도 내가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차
" 그럼 집으로 가요."
하고, 토라진 음성으로 말했어.
" 집으로 ?."
" 네, 집으로요."
" 아니 왜 그래 ?."
내가 길 옆으로 차를 세우자
" 아저씬 정말 너무하세요. 모처럼 큰 맘 먹고 부탁한 건데."
" 미안해.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 그럼 집으로 가요."
나는 할 수 없이 수영 삼 거리에서 우회하여 온천장으로 차를 몰았지
" 아니 우는 거야 ?."
"....."
" 허 참 !."
" 어저씨 제발요. 전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요."
" 가 보고 싶은 곳 ?... 그게 어딘데 ?."
" 어딘지는 잘 몰라도요. 온천 입구에서 시골쪽으로요."
" 그래. 그럼 좋아. 그 대신 입을 다물어야 돼."
" 네 염려 마세요. 그건 오히려 제가 부탁하고 싶은 말이예요."
그제야 그 아이의 얼굴에 생기가 돌며 무슨 희망에라도 찬듯 눈빛까지 반짝거리기 시작했지. 그러나 결코 즐거운 표정은 아니였어. 이상하게도 시골 풍경에 젖어드는 것이 아니라 차창 밖으로 산과 들과 길을 바라보면서 무슨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지. 점점 심각한 얼굴이 되면서 말이다.
범어사 입구를 지나서 팔송 삼 거리를 들어서자 그 애는 갑자기 당황하면서
" 아저씨 저기로 가면 어디로 가죠 ?."
" 응, 울산..."
" 그럼 좌측으로는 요 ?."
" 거긴 양산으로 가는 길이야. 통도사와 내원사가 있는...."
" 그럼, 그리로 가요."
" 아니 그럼 통도사까지 가잔 말이야 ?."
" 가는 데가지 가 주세요."
" 허, 이 거 오늘 잘못 걸렸는 데 !."
" 아이 참 아저씨도 저하고 드라이브 하는 게 싫어신가 봐"
" 싫기는. 사장님께 야단 맞을까 봐 그렇지."
" 아이 남자가 어찌 그리 겁이 많아요 ! 그리고 또 아버지가 어떻게 알아요. 지금 쯤 일본행 비행기 속에 계실텐데. 어머니도 시골에 계실꺼구요....근데 아저씨, 이리로 곧장 가면 초등학교가 나와요 ? 신작로가 붙은...."
" 글쎄 서울까지 가면야 많이 나오겠지."
한참 동안 말없이 가는 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곧 비가 올 것 같아서 나는 그만집으로 돌아 가자고 했지. 그러자 그 애는 조금 신경질적인 어조로 애원하다 싶이
" 아이 아저씨 정말 왜 그러세요 ? 이제 겨우 시작인데."
하고 떼를 쓰면서, 여전히 다가오는 산과 들을 바라보며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어. 조금만 더 가면 양산이라고 했지. 그럼 우선 거기까지 가 보자고 하더군. 나는 할 수 없이 계속 달렸지.
" 아저씨 제가 양산에 가서 맛 있는 거 사드릴께 제발 돌아가자는 말은 하지 마세요.네."
" 허허 학생이 무슨 돈이 있다고."
" 저 돈 많아요. 자 보세요. 이거면 됐죠 ?."
그 애는 학생증이 든 패스포드를 꺼내 보이며 종알 댔어. 깔깔한 고액권이 제법 많이 들어 있더군.
" 그래도 그렇지, 내가 어떻게 학생한테...'
" 그럼 아저씨가 사 주실래요 ?."
" 그래, 차라리 내가...."
" 아이 좋아 ! 아저씬 역시 멋쟁이셔 ! 호호."
" 어어 정말 비가 오는 데."
" 좋잖아요. 무드가 있고.."
" 뭐, 무드 ?...학생이 못하는 소리가 없군 !."
" 아이 학생, 학생 하지 마세요. 저도 벌써부터 숙녀라구요."
" 허허 점점....."
" 아저씨도 뭐 겨우 오빠 뻘 밖에 안 되면서."
" 겨우 오빠 뻘이라니 ?."
" 그렇지 않아요. 잘 돼 보아야 저 보다 삼사 년 ...아니 어쩌면 그 아래인지도 모르죠. 호호."
" 길게 까불면 내 혼내 줄꺼다."
" 아이 아저씨, 제발 어른인 채 하지 말아요. 그럼 정이 안 가서 싫어요."
빗발이 거세어 지자 차창 안에 습기가 끼기 시작했어. 두 사람이 모두 앞에 탔기 때문인지 앞 유리가 금방 뿌옇게 되더구만. 그래서 내가 타올을 꺼내어 유리를 닦으려고 하니 얼른 뺐어 유리를 닥으며 애인이 있느냐고 물었어.
" 뭐, 애인 ? "
"사랑하는 사람 말이에요. 아저씨가."
" 난 태어날 때부터 그런 거 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야."
" 왜요 ?."
" 저주 받은 인생이었거든."
" 저주 받은 인생이라뇨 ?."
" 그런 거 묻지 않은게 좋겠어."
" 아니 왜요? 한숨을 쉬시는 걸 봄 정말 무슨 사연이 있으신가 봐."
" 유리나 닦아. "
" 네, 닦을께요. 미안해요....근데 형제분은 몇이세요 ?."
" 형제 분 ?."
" 네, 혹시 장남 아니세요 ."
" 응, 장남은 장남이지."
" 형제가 몇인데요 ?."
" 아니 왜 자꾸 꼬지꼬지 묻고 그래 ?."
" 알고 싶어요."
" 알아서 무얼 하려구 ?."
" 난 이상하지요. 모르는 사람을 보면 먼저 저 사람은 형제분이 몇이나 될까. 그런 것이 궁금하거든요."
" 그래 나에게도 그것이 알고 싶다 이거야 ?."
" 네 알고 싶어요. 아저씬 더욱더요."
" 편리하게 생각해."
" 그게 무슨 말이예요 ?."
" 고아야, 아무도 없는 ."
" 어쩌면 ! 죄송해요. 난 아무 것두 모르고.."
" 죄송할 것 없어. 학생이 날 고아로 만든게 아니니까. 우리 그만 돌아가지. 비가 많이 쏟아지는 데."
" 조금만 더 가요. 근데 왜이래 학교가 안 보이죠 ?."
" 학교는 왜 ?.'
" 시골 초등학교가 보고 싶어요."
학생은 무엇 때문이 초등학교가 나올 때까지 가보자고 했어. 나는 멀리 가면 갈 수록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 그런데 그 아이도 드라이브의 즐거움 같은 것은 조금도 느끼는 것 같지 않고 얼굴에는 초조한 빛이 역역한데 자꾸 달이라고만 했어. 아무리 돌아 가자고 해도 막무가네였지.
비는 점점 더 퍼부었어. 시간도 많이 흘렀고. 그래서 이제는 그 아이에게 물어 보지도 않고 통도사 입구에서 차를 돌렸지. 그러니 그도 더 이상 떼를 쓰지는 않더군. 그런데 차가 왔던 길로 다시 내려가자, 그때부터 울기 시작하는 거야. 소리 내어우는 것이 아니라 차가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보고 또 뒤돌아 보면서 쭈루룩 눈물을 흘리는 거야. 마치 엄마 곁을 떠나 노예로 팔려가는 처녀처럼 말이야. 정말 이해할 수가 없더군. 그래도 나는 달렸지.
" 미안해요 ! 저때문에 쉬지도 못하고요.'
" 꽨찮아. 근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 ?."
" 아니에요. 괜히 슬퍼지네요."
갈때는 잘도 조잘대던 아이가 올때는 입을 다문 채 깊은 시름에 젖어 있었어.차가 팔송 삼거리를 돌아 왔을 때야 후딱 놀라며
" 아저씨 저 길로 가면 울산이랬죠 ?."
하고, 물었어, 그렇다고 하니까,죄송하지만 또 그리로 가 줄 수 없겠냐고 하더구만. 정말 머리가 어찌 된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
" 오늘은 늦어서 안 되겠는 데 훗 날 기회를 봐서 네가 원하는 대로 차를 태워 줄께."
" 언제 또 시간이 있을라구요."
" 언젠가는 나겠지. 지금 그리로 갔다가는 오늘 못 돌아올지도 몰라."
" 그럼 어때요 ? 늦음 자고..."
하다가, 낯이 빨게 지며 두 손으로 입을 막았어.
" 아니 누굴 죽이려고 작정을 한거야. 정말 왜 이래 ?."
나는 도저히 그애의 속 마음을 알 수가 없었어. 정말 나를 좋아해서, 나와 함께 있고 싶어서 드라이브를 하자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 어쨌든 방황하는 그의 마음을 잡아 주지는 못하더라도 그를 한시 바삐 그의 온실에 넣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구만. 그래서 집을 향해 부지런히 달렸지.
시내에 들어오니 비는 어느덧 멎어 있었고 날도 어두워 있었어. 집이 가까워 올 수록 불안하고 초조하더니 기어이 일이 벌어지고 말았지. 난리가 난거야. 대문은 초인 종을 누를 필요도 없이 활짝 열려 있었고, 헤드라이트 불빛속에 온 집안 식구들이 유령처럼 움직이고 있었어. 일본에 가 있어야 할 허사장도 시골에 가셨다는 사모님도, 가정부와 경비원까지도.
이제 정말 긑장이다 싶더구만. 그래도 나는 용기를 내어 차를 대문 안으로 몰아 넣었지. 차에서 내리자 마자 사모님은 딸을 부둥껴 안고 대성통곡을 하는 거야.
그 때 갑자기 내 눈 앞에 불이 번쩍 하더군. 허사장의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내 따귀에서 철썩 소리를 냈지.
" 아버지. 아저씬 아무 잘못 없어요."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고 있던 딸이 엄마 품에서 빠져나와 아버지를 가로 막았어. "
" 너 이 놈 ! 네가 감히...."
" 죄송합니다. 사장님 !."
" 이 놈아, 죄송하다로 끝날 문제냐 ? 여보 파출소에 연락하지 않고 뭐해 ?."
허사장은 사모님 쪽을 향해 빽 소리를 질렀어.
" 아니 그래도 저 여편네가."
이제 주먹이 사모님한테로 날아갈판이었지.
" 여보 제발 조용히 하세요. 남들이 듣겠어요."
" 저런 배은망덕한 놈은 따끔한 맛을 보여야 한다고, 어서 전활..."
" 제발 참으세요, 여보."
" 아니 이 놈아. 어디 여자가 없어서 그래, 어린 학생을..."
"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정말 불결해요. 어쩌면 아버지는 아버지대로만 생각하세요."
그러면서 딸은 대문을 박차고 바깥으로 뛰어 나갔어. 뒤따라 쫓아 나간 사모님이 한참 후에 눈물을 흘리면서 혼자 집으로 돌아왔지. 어디로 사라졌는 지 아무리 어둠 속을 헤매어도 없더라는 거야.
" 사장님 그리고 사모님, 저를 믿어 주십시요. 저는 더 이상 이 집에 있어 달라고 해도 있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학생이 하도 시골 초등학교를 구경하고 싶다고 조르는 바람에, 그것을 찾으려 다나느라고 늦은 것 뿐입니다. 그럼 안녕히....
나는 자동차 열쇠를 꽂아둔 채 대문을 나섰지.
" 여보게, 나 좀 보세."
사모님은 밖으로 따라 나오며 좀더 자세히 얘기를 해달라고 했어.
" 할 이야기는 다 했습니다. 믿고 안 믿고는 사모님의 자유입니다. 그러니 편리한대로 생각하십시요."
" 이 사람아 오해는 풀게. 자네도 알다 싶이 워낙 사장님 자신이 그러니가 남들도 그런 줄 알고서..."
그러는 사모님도 아직 완전히 의심이 풀리지는 않았는 지 모르지만 묻는 말은 좀 엉뚱 했어.
" 그런데 우리 딸 아이가 왜 시골 초등학교가 보고 싶다고 하던가 ?."
" 남의 속을 제가 어떻게 압니까."
나는 뚱명스럽게 쏘아 붙혔어.
" 어느 초등학교라는 말은 없고 ?."
" 모르겠어요. 곧장 가면 큰 길 옆에 있는 초등학교가 나오느냐고 묻더군요."
" 그래서 ?."
" 서울까지 가면 몇 개가 나올지 모른다고 했지요."
" 그랬더니 ?.,"
" 가보자고 하더군요."
" 그래서 학교가 나오든가 ?."
" 사모님 정말 왜 이러십니까. 사모님도 저를.....
" 그게 아닐쎄. 나는 나대로 알아 볼 것이 있어서 그러네."
" 네, 많이 알아 보십시요. 전 피곤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
나는 걸음을 빨리 하면서 정 그렇게 못 믿겠으면 딸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보라고 말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어.
뭐라구 ? 일본에 간 허사장이 어떻게 새 돌아와 있었냐고 ?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임마. 아마도 활주로에 안개가 끼었다든지 기체에 이상이 있었다든가 둘 중 하나였겠지. 어쨌든 일본으로 가다가 되돌아 온 것만은 사실이었으니까.
응 참 ! 그렇지. 네 동생이 있었다지. 어릴때 교통사고로 헤어진... 뭐라구 ? 지금 쯤 살아 있다면 아마 우리 사장님의 딸만 할꺼라고 ? 하긴 그렇기도 하겠구나.
너도 준비되어 있지 않는 상태에서 갑자기 추월을 하는 바람에 많은 고초를 겪고 있겠지. 사람이 생활에 찌들리다 보면 형제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겠지. 금강산도 식후 구경이라고 우선 제 입에 풀칠하기가 바쁜 세상에 언제 동생을 찾아 볼 틈이나 있을라구. 그렇지만 너도 이제 자가용을 타게 되었다니 우선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다소 여유가 갱기겠지.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네 동생의 생사라도 알아 보도록 하여라.
아니 뭐라고 ? 대연동 어느 골목에서 네 동생을 꼭 닮은 여학생을 보았다고 ? 그렇다면 왜 여태 좀 알아보지 않았는 가 ? 그 다음 날 너네 택시가 사고를 내는 바람에 그럴 틈이 없었다고. 그 후로는 네 집에 우환이 거칠 날이 없었으니까 그렇기도 하겠구나. 하지만 너도 잘 생각해 봐라. 그 자동차엔 분명히 그 여학생의 아버지인 듯한 남자가 타고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귀신에 홀린 것처럼 그 자가용을 따라 가다가 뒤에 탄 손님한테 욕을 먹었다고 ? 그런데 그 손님을 내려주고 다시 돌아와서 통금 가까이 대기하고 있었다고 ? 야 너도 생긴 것 보다 좀 미련한데가 있구나. 그것이 그 부근에 있는 자가용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볼일을 보고 지나가는 길이었는 지 어떻게 알고 그 차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냐."
강희와 식당에서 헤어진 만길은 도저히 집으로 들어갈 기분이 나지 않았다.
종전 같으면 아무리 언잖은 일이 있어도 그 정도의 술을 마시면 될대로 되라는 식이 되어 울적한 기분도 풀리기 마련인데 오늘 밤은 웬일인지 산다는 것이 서글펐다. 그것은 자기가 몸담아 온 직장을 그만 두어서 앞으로 또 다른 직장을 구하기 위해 헤매어야 한다는 번거러움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그는 지금까지 고아로 살아오면서 먹고 사는 것에는 그렇게 두렵지는 않았다. 어렸을 적에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염려되었으나 차차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때때로 몰려오는 고독이 무서웠다. 그래서 술도 마시고 작부들과 놀아나기도 하였으나 그때 분, 오히려 고독이 배가 되었다.
( 지금 쯤 그 여학생은 집으로 들어갔을 까 ?.)
순진한 딸을 그런 눈으로 보다니. 참으로 잘못된 기성 세대가 원망스러웠다.
만길이 거처하는 조그마한 단간방은 온천 입구를 지나 강 뚝을 타고 조금 올라가는 데 있었다. 그런데 그의 발걸음은 그 곳을 훨씬 지나고 있었다.
그는 한때 그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일이 있었다. 그 때만 하더라도 그 강뚝 옆으로는 집이 하나도 없었다. 허허 벌판이었다. 다리 밑에 그들의 보금자리가 있었기 때문에 엄마가 보고 싶으면 강뚝에 올라앉아 먼 하늘가를 쳐다보며 별을 헤기고 했던 것이다. 그 때에 천애고아가 된 강희도 함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다리 밑 하고방은 간곳이 없고 강뚝은 차도로 변했고, 잡초가 무성했던 벌판은 주택들이 들어 서서 그 때의 고향 풍경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래도 밤이 깊으면 강뚝 길은 인적이 드물어 향수가 새로워지기도 했다.
" 어저씨, 아저씨."
(누구일까 ?.... 누구를 부르는 소린가 ?)
그래도 그는 뒤돌아 보지 않고 걸었다.
" 아저씨, 저예요. 어디로 자꾸 올라만 가세요 ?."
" 응, 학생이구만 ! 근데 난데없이 여긴 ?."
허사장의 딸이었다.
" 아저씰 기다리고 있었어요. 집이 이 근방인줄은 알았는 데....소리내어 부럴 수도 없고."
그래서 여러번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서 다리가 아파 죽겠다고 했다.
만길은 우선 반가웠다. 쓸쓸하던 마음은 어디로 사라졌는 지. 그러나 그는 엄숙한 표정을 지우며 나무랐다.
" 지금이 몇신데 학생이 집에는 들어가지 않고 여태...
" 아저씨한테 사과 드릴려고요."
" 사과는 무슨...학생한텐 아무 잘못이 없어...모두가 지난 일이야."
" 아이 학생 학생 하지 마세요. 제 이름은 허순영이에요."
" 허순영 ?."
" 네, 허순영.... 근데 제 이름을 이제야 알았나요 ?."
" 난 영아라고만 들었지."
" 정말 섭섭해요. 전 아저씨 이름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는 데."
" 그래, 그럼 영아도 내 이름을 부르지 그래. 난 아직 아저씨가 아니거든."
" 그래도 제가 어떻게 남자 이름을 불러요."
" 남자 ?."
만길은 허허 웃었다.
" 그럼 앞으로 오빠라고 부럴께요."
" 글쎄 부러는 것은 자유겠지만 앞으로 나를 부럴 일이 있을까. 아주 열쇠를 두고 왔거든."
" 싫어요. 오빠가 그만두면 전 어떻게 해요. 더욱이 저 땜에..."
" 발에 체이는 것이 운전순데, 고럴려면야 얼마든지 입맛대로지."
" 싫어요. 난 오빠가 좋더라."
" 네가 좋으면 뭤하냐. 사장님 눈엔 까신데."
" 제가 아빠한테 말씀 드릴께요. 오빠의 결백을요."
" 다 소용 없는 일이야. 난 영아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좋은 사람도 아니고."
둘은 강뚝을 따라 나란히 걸었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강뚝을 따라 올라갈 수록 인가가 드물었고 하늘의 별들은 더 총총하게 빛났다.
" 오빠 춥지 않으세요 ?."
" 글 쎄 술을 몇 잔 했더니 별로... 그러고 보니 네가 추운가 보구나."
" 네 조금."
" 그럼 내 웃도리라도 벗어 줄까 ?."
" 싫어요. 그 대신 손 좀 잡아 주실래요 ?."
" 손 ?."
' 아이 팔짱 말구 손 말이예요."
" 애들처럼 손은."
" 팔짱을 끼면 남들이 애인이라고 하잖아요."
" 허허 참 ! 별난 아가씨군."
" 어머나 ! 절더러 아가씨라구요 ?."
" 그래, 이 풋내기 아가씨야.'
둘은 깍지손을 꼈다. 영아의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 오빠의 손은 왜 이렇게 차가워요 ? 난 따뜻할 줄 알았는 데."
" 정이 메말라서 그렇겠지."
" 왜요, 어디 많이 주는 데가 있나 보죠 ?."
" 이 바보야. 그 반대야."
" 그 반대라니요 ?."
" 정이란 우물과도 같은 것, 그것을 퍼내지 않고 오래 두면 매금 같은 것이 쌓여서 물 구멍을 막아 버리거든."
" 그럼 저에게 퍼 주실래요 ?."
" 그럼 영아도 나에게 퍼 주겠다는 거야 ?."
" 제 손이 차나요 ?."
" 따뜻하군 !."
그러다가 만길은 감전이라도 된 듯 후딱 깍지 손을 풀었다.
" 왜 그러세요. 제 손이 너무 뜨거운가요 ?."
" 돌아가자구."
" 어디루요 ?."
" 어딘 어디야. 집으로지."
" 그래요, 어치피 밤 새도록 헤맬 수는 없을 테니까요."
둘은 발걸음을 돌렸다. 만길은 바지 포켙에 손을 찌른 채 말없이 걸음을 빨리했다. 순영이 총총 걸음으로 바싹 닥아들며 팔장을 끼려고 하였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 집으로 가신다며 왜 자꾸 내려만 가세요 ?."
만길의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을 지나자 순영이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 잔소리 말고 어서 따라 와. 그렇게 꾸물대다 통금에 걸리겠어."
먼길은 와락 순영의 팔을 잡아 당겼다.
" 난 집에 안 갈꺼야."
" 집엘 안 가다니. 그럼 어디서 자겠다는 거야 ?."
" 오빠 집에서 하루 밤을 지내면 안 될까 ?."
" 너 정말 큰일 날 아이로구나."
"집에는 들어가기 싫어요."
아버지가 무섭다고 했다.
" 그러니까 빨리 들어가야지."
" 그런게 아니예요."
" 그런게 아니면 뭐야 ?."
만길은 마음이 조급했다. 시간이 12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기어이 절 돌려보내야 하나요 ?."
" 이 철부지야. 그걸 말이라고 하니. 만약 네가 내 방에서 자고 간 걸 사장님이 알아 봐. 난 당장 형무소 행일꺼다. 너도 봤지너하고 드라이브 조금 했다고 귀사대기를 올려 붙이고, 그것도 모자라서 경찰을 부르라고 하는 거."
순영은 쿡쿡 웃었다.
" 제가 친구집에서 잤다고 할께요.'
" 다 큰 처녀가 친구 집은 무슨 놈의 친구 집."
만길은 진짜 제 동생을 야단치 듯 빽 소리를 첬다.
" 아이 깜짝이야 ! 소리 치지 말아요. 무서워요 !."
" 내 데려다 줄께, 어서 따라 와."
순영는 더 이상 떼를 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