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어디로 가나

3. 그 해 겨울

오늘의 쉼터 2014. 8. 26. 01:16

3. 그 해 겨울
 
 
   열차가 부산에 도착한 것은 밤 열 시가 훨씬 지나서였다.
   차가 홈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모두들 선반위에 얹힌 짐들를 챙기느라 분주했다.
   강희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제대장병 답게 보따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소영은 제법 묵직한 빽 하나와 어깨끈이 긴 핸드백이 있었다.
   강희는 선반에서 그녀의 빽을 내려들고 앞장을 섰고,
소영은 즐거운 듯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의 뒤를 다라 출찰구를 빠져나왔다.
   멀리 눈앞을 막아선 수정동 고지대엔 마치 고층 빌딩의 불빛처럼
수많은 전등빛이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 별들과 맞닿아 있었다.
   가을이 채 가시지 않은 넓은 역광장에는 스산한 바람이 한기를 몰아왔고,
밝은 광장을 벗어난 승객들은 제각기 어둠속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 어디로 갈까 ?.)
   막상 갈데가 없다.
출발이 부산이었기 때문에 그는 제대를 하고 막연하게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을 뿐이었다.
고향은 분명 부산이로되 자기를 반겨줄 친척 하나 없다.
그렇다고 지금 그 나이에 다시 고아원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몸이다.
   그는 그동안 고아원에서 자랐다.
   거기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육군에 입대하여 어느새 제대를 한 것이다.
그가 양아치시절 털치기을 하다 붙들린 핸드백의 주인이 바로 누이동생을 찾으려 부산으로 올 때
버스비를 대어주었던 여인이었고,
그가 또 공교롭게도 대연 국민학교 시절 자기반 짝지인 소영의 어머니였다.
 
   소영의 집은 보수동 검정 다리 옆으로 조금 올라가면 죄측으로 첫 구름다리가 놓인 집이었다.
적산 가옥을 지붕만 남겨두고 내부는 완전 양식으로 개조한 대궐 같은 기와집의 넓은 정원에는
수많은 나무와 그 사이로 군데군데 석탑까지 있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주위의 환경과는 달리 새소리까지 들리는 것이 별개의 세상 같았다.
 
   아주머니가 시키는 대로 목욕을 하고 나오니,
어느새 도어 소리를 듣고 나왔는 지
계집아이 하나가 두 손으로 내의를 받쳐들고 나오며
 
   "자 이걸로 갈아 입어."
 
   하더니, 커다란 눈이 되며
 
   " 아니 너 강희 아니야 ?"
 
   " 어 소영이 !..."
 
   둘은 똑 같이 놀랐다.
소영은 들고 있던 내의를 응접실 바닥에 떨어 뜨리며 덥석 강희의 손을 잡았다.
 
   " 너네 집이었구나 !."
 
   " 그래. 지난 봄에 이사를 했어."
 
   " 아니 너희들 아는 사이냐 ?."
 
   그 때 황여사가 남편이 입던 잠옷 바지를 들고 들어서며 물었다.
   강희는 소영에게 잡힌 손을 슬며시 빼며 빨게진 얼굴로 몸둘바를 몰랐다.
   그 어색한 분위기를 변명이라도 하듯
 
   " 네 엄마. 얘가 글쎄, 바로 저번에 검정다리 위에서 만났다는 그 때 우리반 반장이예요."
 
   하며 소영은 바닥에 떨어뜨린 내의를 주워들었다.
 
   " 응 그러니. 참 사람의 인연이란 이상하구나 !."
 
   황여사는 남편의 잠옷을 강희 앞으로 내밀었다.
 
   " 얘 배고프겠다. 어서 옷 갈아 입고 밥을 먹도록 하자."
 
   " 그래 강희야, 옷 갈아 입고 얼른 식당으로 나와."
 
   소영은 엄마의 손을 잡고 응접실을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강희는 부랴부랴 땟국이 질질 흐르는 넝마를 벗어 버리고 새 내의를 갈아 입었다.
그리고 그 위에다 흰 바탕에 연한 푸른 줄무늬가 있는 잠옷 바지를 입었다.
 
   " 아니 이 건..."
 
   소영의 아버지가 입었던 것이라 헐렁한 것이 커도 너무 컸다.
품은 자기 또래가 셋이 들어가도 남을 것 같았고,
길이는 머리 끝까지 올려도 바닥에 질질 끌렸다.
 
   " 얘  뭘해. 어서 나오지 않고."
 
   " 응, 그래."
 
   강희는 빨게진 얼굴로 잠옷 바지를 입었다 벗었다 하면서 어쩔 줄을 몰랐다 .
그러다 소영이 재촉하는 바람에 식당으로 나가다
질질 끌리는 잠옷 바지 가랭이를 밟고 그대로 넘어졌다.
 
   " 호호호 !."
 
   " 하하하 !"
 
   그 꼴을 보고 소영은 배를 쥐고 웃었다.
   황여사는 넘어진 강희를 잡아 일으키며
 
   " 어디 다친덴 없니 ?
내 이럴 줄 알았으면 잠옷도 같이 사올 걸,.
잠시 입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러면서 손수 가랭이를 올려 주었지만 부드러운 옷감이라 금방 또 내려왔다.
   이 날 밤 강희는 열 시가 넘도록 그 집안 식구들과 지나 온 날들을 얘기 하며 놀다가
정해준 방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
 
   소영의 소망대로 당분간 이 집에서 학교를 다녀야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빵 집에서 했던 황여사의 말처럼 시골 큰 아버지댁으로 돌아가야 할 것인지,
이런 저런 생각에 긴 겨울 밤을 뜬 눈으로 보냈다.
 
                
소영에게
   너의 온 집안 식구들이 내게 준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생각이 난다 해도 당장 갚을 수 없는 현실이 서글프기만 하구나.
   어쨌든 이제 내 앞 길은 내가 개척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얻었기에 나는 떠나기로 했단다.
   소영아 , 내가 네게 줄 것이라고는 내 동생 영아의 찢어진 인형 하나 뿐이니 어찌 하겠느냐.
다만 내 온 정성이 거기에 있으니 기쁘게 받아주렴.
                                그럼 안녕
 
날이 채 밝기도 전 소영의 집을 빠져 나온 강희는 어이 없게도 밤 새도록
옆 골목에서 지키고 있던 사파리에게 목털미를 잡히고 말았다.
 
   " 야 이 얼간이 같은 새끼야. 여태 무얼하고 자빠졌어 ?
남은 동태가 되어 밤 새도록 네 놈이 도망쳐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는 데,
너는 이 놈아 따근한 방에서 편히 주무시고 이제야,
그것도 맨 손으로 어슬렁어슬렁 기어나와 이 우라질 놈아."
 
   강희는 따귀를 서너 대 얻어 맞고 또다시 양아치 신세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행인지 불행인지 날치기를 하다가 경찰에 잡혀 갔고,
거기서 일정한 기간을 거쳐 고아원으로 넘겨졌다.
   그는 그 고아원에서 만길을 만났다.
 
   " 어어이 , 니 촌놈 아이가 ?."
 
   " 응, 만길아 !."
 
   철망이 쳐진 스리코트에서 뛰어 내리자,
만길은 금방 알아보고 달려와서 강희의 따귀를 때리며 얼싸 안았다.
   이래서 그는 고아원을 세 군데나 전전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입대한 것이다.
   처음엔 그도 고아원 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탔인지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어서
두어 달도 목되어 만길이와 함께 탈출을 하여 온천장 부근을 돌아다니며 구걸을 했고,
거기서 부랑아 단속반에 잡혀 다시 하단 골짜기에 있는 초원의 집으로 넘겨졌다.
   그 때 약삭 빠른 만길은 도망을 쳐서 잡히지 않았다.
   거기서는 배가 고픈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고아원에서 운영하는 밭에서
일을 하는 것이 고되었고, 규율도 너무나 엄하여 탈출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도 또 얼마 가지 않아서 다른 고아원에서 나온 단속반에 걸려
보수동 산비탈에 있는 천사의 집으로 끌려갔다.
   그는 그 고아원에서 중학생이 된 만길을 또다시 만났다.
 
   " 강희야 우리 인자 공부 좀 하자. 그래야 앞으로 좋은 사람이 안 되겠나."
 
   남의 호주머니에 든 것을 제멋대로 꺼내 쓰기를 좋아했고,
누구보다도 먼저 탈출를 선동했던 놈이 중학 모자를 썼다고 생판 달라져 있었다.
 
   " 임마야 뛰어 봤자 아이더나."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도 여기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
 
   이래서 강희도 갖은 고난을 겪으며 이 천사의 집에서 충실히 일을 했고,
열심히 공부를 하여 중학부터 고등학교 삼 년까지 쭉 우등을 했고,
장학생으로 졸업을 했다.
그러나 만길은 중 3 때 학교반 아이의 공납금을 슬쩍하다
퇴학을 당한 그 길로 다시 천사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몇 일 후, 잃어버렸다는 돈은 피해 학생의 도덕 책갈피속에서 발견 되었다.
그날이 마침 시간표에 도덕이 들어 있어 그 전날 밤 아버지로부터 받은 돈을
거기에 넣어 두었다가 아침에 잊어버리고 등교를 하였으며,
그 학생은 다만 책속에 넣어두었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그것이 없자,
자기 짝지의 소행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수 박에 없는 것이 만길은 평소 친구들에게 무용담처럼
양아치시절의 날치기라든가 남의 호주머니를 슬쩍한 경험담을 들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만길이가 천사의 집을 떠난 어느 날 그의 반 단임과 돈을 잃어 버렸다는
그 학생이 고아원을 찾아왔다.
 
   " 원장님 어떠한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단임은 죽어가는 얼굴로 사건의 경위를 설명한 후에 고개를 푹 떨구었다.
   고아원으로 찾아와 보니 비로써 만길이가 그 날로 지금 껏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원장의 말을 듣고 단임은 전생에 씻지 못할 실수를 뼈저리게 느꼈다.
   학생도 말없이 울고 있었다.
 
   "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사회가 우리 아이들을 바로 볼 수 없게 한 책임을 우리 스스로 질 수 밖에요."
 
   그 후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단임은 그 길로 사표를 내고 교단을 떠났다고 했다.
 
   강희가 소영을 다시 만난 것은 어느 비오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잔뜩 찌뿌려 있던 하늘은 오후가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비를 버붓기 시작했다.
   종래가 끝나도 비는 좀처럼그칠 것 같지 않아서 그는 할 수 없이 여느 때처럼
책가방을 옆꾸리에 끼고 교문을 향해 빗속을 달렸다.
사대 부속 국민학교 앞을 지나 검정다리를 막 들어설 무렵이었다.
누군가가 뒤에서
 
   " 저 , 저어 여봐요."
 
   하고,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는 뜀박질을 계속하면서 뒤돌아 보았다.
우산을 받쳐든 어떤 여학생이 쫓아오던 걸음을 멈추면서
 
   " 저 혹시 강희씨가 아니세요 ? "
 
   " 네에, 강희요 ? 강희는 강흰데요."
 
   " 아 맞았군요 ! 역시 강희씨가..."
 
   여학생은 장대 같은 비를 그대로 맞고 서 있는 강희를 자기의 우산으로 덮었다.
   강희는 이마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팔소매로 훔치고 나서 빤히 우산속의 여학생을 바라봤다.
 
   " 아이 참! 절 모르세요 ? 소영이에요."
 
   " 아, 소영이 !."
 
   "네, 소영이."
 
   " 그래 정말 소영이구나 !
근데 하도 오래되어서 그런지 영 몰라 보겠는 데 !."
 
   ( 아이 미워 ! )
 
   소영은 말없이 눈을 흘키며
 
   " 아이 참 왜 자꾸 밖으로 빠져 나가세요 ?."
 
   " 옷은 이미 젖었는 걸."
 
   " 그래두요."
 
   낯이 빨게진 강희를 다시 우산 속으로 끌어들였다.
   둘은 잠시 말을  잃은 채 묵묵히 걸었다.
그러다가 소영이 먼저 빵집으로 들어서자 강희는 멈칫 걸음을 멈추며 난처한 얼굴을 했다.
   " 제게 돈 있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둘은 구석진 식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 자 빗물을 좀 닦으세요."
   소영은 잠자리 날개처럼 얇고 꽃무늬가 있은 손수건을 꺼내어 강희 앞으로 내밀었다.
   강희는 피식 웃으며 그것을 받아 두어 번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자 그것은 생각한 대로 이내 젖어버렸다.
닦은 이마에서는 금방 머리로부터 쭈루룩 빗물이 타고 내렸다.
 
   " 자요. 머리도 좀 닦으세요."
 
   소영은 젖은 손수건을 짜서 다시 강희 앞으로 내밀었다.  
   어릴 때는 계집애처럼 하얗고 야들야들 하던 얼굴이 여드름 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코 믿까지 꺼무스름한 것이 이젠 완전히 어른 티가 났다.
딱 벌어진 어깨에 언제부터 입었던 교복인지는 몰라도
누렇게 바래진 남방이 터질 듯 팽팽했다.
 
   " 왜 자꾸 웃어 ? 내 얼굴에..."
 
   소영은 고개를 살래살래 좌우로 흔들었다.
고개를 흔들 때마다 단발 머리가 물결처럼 출렁였고,
그 사이로 샛별 같은 눈동자가 곱게 웃고 있었다.
 
   ( 아 너도 이제 다 컸구나 !)
 
   강희는 먼저 거리감이 왔다.
조금 과하게 파인 듯 한 얇은 원피스 위에 드러난 목덜미에 살이 통통하게 붙어 있었고,
노르스름한 솜털이 윤기를 냈다.
그 아래로 볼룩하게 드러난 젖무덤,
그 아래로 깎아내리다 빗나간 것처럼 잘룩한 허리며,
의자 위에 얹혀저 있는 펑퍼짐한 엉덩판이 강희의 얼굴을 뜨겁게 자극했다.
   그는 어색한 가운대서도 황홀감을 금치 못하며
이 후 다시 만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이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
 
   " 아 아무것두..."
 
   둘은 옛날처럼 이래라 저래라 말을 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네, 아니요 라고 할수도 없어서 거북하기만 했다.
 
   " 근데, 학교는 ?."
 
   " 고 삼이에요. N여고....오늘은 특별히 조퇴를 했어요."
 
   ' 조퇴를 ? 특별이..."
 
   " 네, 거기 자기를 만나려구요."
 
   소영은 빨게진 얼굴로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 그럼 오늘의 해후가 우연이 아니었단 말이요 ?."
 
   " 그러면요. 내가 얼마나 비 오는 날을 기다렸다구요."
 
   " 비오는 날을 ?."
 
   " 언젠가 어느 학생지에 실린 비오는 날이라는 수필을 읽었거든요."
 
   소영은 점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 비오는 날이면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검정다리 위에 발걸음이 멈추어진다.
   오 년 전 넝마 광주리 대신 내 옆꾸리에 낀 책가방은 그 때처럼 비에 흠벅 젖고 있지만,
나는 흙탕물에 떠내려가는 빈 강통이라든가 찢어진 공과 헌 신짝,
그리고 나무토막 등 잡다한 물건들을 내려다 보며 그리움에 젖군한다.
   어느 해인가  네가 양아치시절 다리 밑에서 홍수를 만나
내 동생 영아의 인형이 떠내려가는 것을 건져 내려다
급류에 휘말려 죽을 고비를 넘긴 일이 어제와 같은데,
세월은 흘러 나는 지금 어였한 고교생이 되었구나.
   영아야, 너는 지금 어느 하늘 아래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
 너도 나처럼 이 비를 맞으며 오빠가 보고 싶어 울고 있느냐 ?>
 
   라는, 대목에서 나는 언듯 강희씨의 글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그 후 얼마나 비오는 날을 기다렸는 지 몰라요. "
   그러면서 소영은 노끈으로 묵은 흰 종이 뭉치를 강희 앞으로 내밀었다.
 강희는 잠에서 깨어난 듯 훔칫 놀라며
   " 그게 뭔데 ?."
   하고, 겁부터 냈다.
   " 끌러 보세요. 우의예요."
   ' 뭐, 우의 ?."
   " 네, 그 수필을 읽고 진작 사 두었는 데 좀처럼 비가 와야죠."
   그래서 전해 줄 길이 없어 하늘만 처다보고 기다렸단다.
   " 응, 고맙긴 하지만 이 건 좀 곤란한데.
우리 고아원에서는 아무도 우의를 가진 사람이 없거든."
   만약 그렇게 좋은 우의를 입고 다니는 걸 보면
어디서 훔친 물건이라고 오해 받기 십상이라고 했다.
   " 그럼 선물을 받았다고 하면 되잖아요."
   강희는 피식하고 씁쓸히 웃으며
   " 그건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아, 우리 고아에겐."
   " 하긴 그렇기도 하군요. 하지만 어떻게 하지요. 난 주고 싶은 데."
   " 미안해. 내 처지를 이해해 줘."
   강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먹어 치웠는 지 빵 한 접시와 단팟죽 한 그릇이
사이다병과 함께 비워 있었다.
   ' 왜 벌써 일어 나세요. 우리 좀더 이야기 해요."
   " 나 빨리 가야 돼."
   " 왜요 ? 빵 더 시킬께요."
   " 아니야. 일이 있어. 신문도 배달해야 하고,
동생들 공부도 가르쳐야 하거든."
   그는 벌써 빵집 문을 나서고 있었다.
   " 아이 참 ! 잠간만 더 있어 줘요."
   소영이 발을 동동 구르며 빵값을 지불하고 나왔을 때
강희는 어느새 간 곳이 없었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거기에다 바람까지 휘몰아쳐 힌겹게 편 우산도 뒤집힐 듯이 펄럭였다.
 
   ( 무심한 사람 !  얼마나 갈구한 만남이었는 데.)
 
   소영은 힘없이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바람에 견디지 못해 그런지는 몰라도 우산은 접어진 채 손에 들려 있었다.
얼굴에는 눈물과 빗물이 뒤범벅이 되어 흘려 내렸고,
옷은 몸에 찰싹 달라붙어 걸음을 방해했다.
 
   " 보래 학생. 이거 학생거 아이가 ?."
 
   빵집 아주머니는 응급결에 우산도 쓰지 않은 채 허급지급 달려 나오면서
우의가 든 종이 봉투를 내밀었다.
   소영은 말없이 그것을 받아 들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보수천에는 흙탕물이 성난 파도처럼 무섭게 흐르고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대문과 연결된 구름다리 위에 서서
철책에 부딫이는 빈 깡통 소리와  구비치는 물결속에 잠겼다
올라와서 떠내려 가고 있는 나무조각들을 넋 나간 사람처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비를 맞아서일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 온 소영은 그 길로 자리에 누웠다.
열이 나고 오한이 왔다. 공영히 슬프지고 자구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의사선생님이 다녀가고, 물수건으로 이마를 닦아주시는
어머니의 근심스러운 물음에도일채 입을 열지 않았다.
자꾸 눈물만 흘렸다.
 
   " 엄마 아무 일도 아니에요. 저 곧 이러날게요."
 
   그러나 그는 삼 일째 등교를 하지 못했다.
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엉뚱하게도 훤칠한 키와 떡 벌어진 가슴에
어울리지 않게 어깨를 축 늘어 뜨리고 빗속으로 사라지는 강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럴 때면 또 까닭없이 눈물이 쭈르륵 흘렀다.
 
   ( 내가 왜 이럴까 ? 혹시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
 
   사랑이라니 , 당치도 않을 소리다.
   내가 왜 그까짓 고아 나부랑이를 좋아한단 말인가.
그도 왕년에는 떵떵거리던 목재소 사장의 아들이긴 하였으나
지금은 신문팔이 고아가 아닌가.
아버지의 말마따나 나는 적어도 외교관이나 대학교수의 부인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가 비록 고아이긴 하여도 일류 고등학교를 다니는 수재이고 보면
외교관이 못되라는 법도 없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더욱더 그가 밉고 보고도 싶어졌다.
 
   소영이 한 열차를 탄 것을 안 것은 서울발 경부선 열차가 수원을 조금 지나서 였다.
   강희는 뜻밖이였으나 소영은 모든 것이 계획된 일이었다.
그것은 제대복을 입고 초라하게 앉아 있는 그를 발견하고
 
   " 어머 여기 계셨군여 !."
 
   라고, 한 그녀의 말을 들어 보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희는 그것을 억지로라도 부인 하려는 듯
역 광장을 지나 큰 길로 나와서 고개를 들고 소영 앞으로 백을 내밀었다.
 
   " 꽤 무겁죠. 같이 들어 드릴께요.'
 
   " 아니야. 들고 가."
 
   소영은 마주 들려던 손을 거두며 우뚝 섰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래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돌아섰다.
   오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그들을 쳐다 봤다.
   강희는 할 수 없이 또 혼자 빽을 들고 앞장을 섰다.
 
   " 어디로 가아 ?."
 
   강희가 시내 버스에 오르자.
소영도 뒤따라 오르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속 눈섭은 아직도 물기에 젖어 있었다.
 
   " 어디로 가느냐고요 ?."
 
   " 가는 데까지...."
 
   " 가는 데까지 어디 ?.'
 
   " 그건 나도 몰라."
 
   늦은 밤이라 그런지 버스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둘은 맨 뒤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강희는 눈을 감은 채 흔들리는 차체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고,
소영은 불안한 얼굴로 가끔 어두운 창 밖을 내다 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들이 부산대학 앞 버스 종점에 내렸을 때는 밤 열한 시 반이 가까워 지고 있었다.
 
   " 어디로 자꾸 가기만 해 ?."
 
   소영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앞장서서 걸어가는 강희의 빽을 마주 들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보아하니 버스가 왔던 길로 되돌아 가는 듯 했다.
   " 여긴 너무 어두워."
   " 그럼 날이 샐 때까지 이렇게 걷는단 말이야 ?."
 소영이 발걸음을 멈추자 한쪽 백을 들고 있던 강희도 동시에 우뚝 서졌다.
   " 잔소리 말고 따라 와."
   강희도 빽을 확 잡아당기며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둘은 한참 동안 또 말없이 걸었다.
   어쩌자고 자꾸 가기만 할까 ?.
   정작 집이 없어서 일까. 소영은 이렇게 무작정
그를 따라 방황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우리 어디 가던 오늘은 여기서 자구 가요. 전 더 이상 못 걷겠어요."
   그러면서 이번엔 소영이 앞서 여관으로 들어서며 빽을 잡아 당겼다.
   강희는 엉거주춤 딸려가다 말고 눈이 뚱그래지며 얼굴을 붉혔다.
   " 할 수 없잖아요."
   소영은 눈으로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들을 놓칠세라, 안에서 종업원이 달려 나와 빼았 듯 빽을 받아 들고 앞장을 섰다.
   둘은 그를 따라 이 층으로 올라갔다.
   온천지대라 그런지는 몰라도 방마다 욕실이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방엔 아늑하고 환하게 새로 도배가 되어 있었고,
윗목엔  조그마한 탁자위에 다이얄 없는 전화기와 그 옆으로는 물 주전자와 컵이 얹혀져 있었다.
그 아래로는 핑크빛 비단 이불이 가지른히 놓인 두 개의 베개 아래 깔려 있었다.
머리맡에는 웬일인지 욕실에 가 있어야 할 타올 두 장이 얌전히 포개어져 있었다.
   " 어어이, 방 하나 더 없냐 ?."
   강희가 숙박계를 내미는 종업원에게 물었다.
   " 와 이 방이 마음에 안 드능기요."
   " 아니 그게 아니라..."
   " 그라면 와요 ?."
   종업원은 이상한 얼굴로 둘을 번갈라 쳐다보며 물었다.
   " 나 방 두 개 얻을 돈 없어요."
   " 그 정도는 내게도 있어."
   종업원이 무슨 눈치를 채었는 지 더 이상 빈 방은 없다고 짤라 말했다.
   " 응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 나 잠간 나갔다 올께. 먼저 목욕하고 계세요."
   숙박계를 받아들고 종업원이 나가자 소영도 뒤따라 나서며
고소해 죽겠다는 듯 속으로 쿡쿡 웃었다.
   " 응 그래. 그러지."
 
둘이 나가고 도어가 닫히자 강희는 긴 안도의 숨을 내어쉬며 얼른 제대복을 벗었다.
육군 마크가 희미하게 박힌 낡은 동내의도 벗었다. 
고무 끈이 늘어져 반바지 보다 헐렁한 팬티도 벗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것을 소영에게 보이지 않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지 모른다.
   그는 그녀가 돌아오기 전에 목욕을 끝내야 한다고 부랴부랴 서둘렸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욕실 도어에 노크 소리가 났다.
   " 아니, 왜 ?."
   강희는 무엇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후다닥 욕탕 안으로 뛰어 들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욕실문이 뾰쪽이 열리고 있었다.
그는 응급결에 머리에 묻은 비누거품을 걷어 모아 도어를 향해 집어 던졌다.
   " 어머 ! 저이가...."
   소영은 반사적으로 도어를 닫았으나 얼굴은 온통 그것을 덮어 쓴 후였다
   강희는 욕탕에서 뛰어나와 안으로 문을 잠그려고 더듬어 보았지만 문걸이 같은 것이 없었다.
   " 이런 빌어 먹을..."
   여관이나 호텔 같은 욕실에는 아예 그런 것이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남성의 욕망을 도와주기 위해 만들어  두지 않은 모양이었다.
   " 에이 안심하세요. 인제 안 그럴게요."
   잠시 후 욕실에서 노크 소리가 나자 소영은 방안에서 소리쳤다.
   " 아니야, 나 목욕 끝났어."
   " 아니 벌써요 ?."
   " 그래."
   " 그럼 옷 안에 넣어 줘요 ?."
   " 아니야. 잠시 나가 있어."
   " 에이 무슨 남자가 그래요."
   소영은 할 수 없이 밖으로 나와 도어 앞에 붙어 서서
   "거기 내의 새 걸로 갈아 입으세요. 잠옷도요."
   그러고 보니 면으로 된 하얀 삼각팬티 밑에 하늘색 줄무늬가 있는 흰 바탕의 융 잠옷이 포개져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미리 준비하여 빽에 넣어 온 듯 했다. 자기가 벗어 둔 옷가지는 간곳이 없다.
   " 아니 내 내의는 ?."
   " 아이 금방 주무실 사람이 내의는 찾아 뭘 해요."
   강희는 할 수 없이 새 팬티에 잠옷만 걸친 채 소영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 어머 자기 정말 멋져 !."
   그러면서 안겨오려는 그녀를 강희는 벽에 붙은 거울을 보는 채가볍게 피하며
   " 나 밖에 나가 있을께 소영도....."
   " 그럴 필요 없어요. 돌아만 앉아 계세요. 옷 벗을 때까지만요."
   " 그래 그럼. 내 눈 깜고 돌아 앉아 있을 게."
   소영이 목욕을 하는 동안 강희는 안절부절 못했다.
열차에서 사 온 주간지를 뒤적였으나 무엇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담배를 피워 보아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 어떻게 해야 하나 ?.)
   이윽고 물소리자 뚝 그쳤다.
   강희는 놀란 듯이 담배 불을 비벼 끄고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때 소영이 도어를 열고 얼굴을 내밀며
   " 저 잠옷 좀 가져다 주실래요."
   " 응 벌써 다 했어. 내 밖으로 나가 줄께."
   강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 났다.
   "자꾸 그러심 저 이대로 뛰어 나갈거예요.
   " 그래 그래, 알았어 ! 잠간 기다려. 근데 잠옷이 어디 있더라 ?."
   "아이 거기 탁자위에 있잖아요."
   " 어 그래. 여기 있구만 !."  
   잠옷을 집어 든 강희의 손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는 차마 욕실 쪽을 바로 보고 갈 수가 없어서 외면을 한 채 더듬거리며 그것을 내밀었다.
   " 아, 아야 !."
   " 자기가 무슨 수도승인가 뭐."
   잠옷은 뺏기고 손등은 꼬집혔다.
   욕실에서 나온 소영은 정말 아름다웠다.
땀방울이 송송 돋아난 쫑긋한 콧날과 촉촉히 젖은 동그스럼한 얼굴에
약간 두터운 듯한 입술이 개물고 싶도록 귀여웠다. 깃 없는 잠옷이라
그런지 탐스러운 목덜미는 무우쪽처럼 희고 길었다.
그 아래로 살아서 움직이는 두 개의 젖무덤,
그것은 다만 얇은 잠옷 하나로만 가려서인지 몹시 출렁거려 강희의 눈길을 어지럽혔다.
   " 목 타시지요. 맥주 한 잔 드릴게요."
   소영은 그가 목욕을 하는 동안 밖에 나가 사 온 맥주 두 병과 마른 안주,
그리고 여관에서 빌려온 그라스를 강희 앞으로  들고 왔다.
그녀는 주간지 위에 땅콩과 대구포를 뜯어 얹어두고 빈 잔에다 술을 부었다.
   " 자, 드세요."
   " 응, 영아도 한 잔..."
   " 네. 저도 목 말라요."
   소영이 내미는 잔에 강희가 술을 부었다.
   " 우리 건배해요. 우리들의 앞날에 행복 있기를..."
   그러면서 소영은 남자처럼 맥주잔을 탁 부딛쳐 왔다.
   " 어머 !."
   그녀는 순간 얼굴에 싹 웃은기가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다.
   " 왜 그러고 있어 ? 쭉 들이키지 않고."
   강희는 빈잔을 내려 놓고 입술에 묻은 거품을 손으로 닦으며 물었다.
   " 맥주잔이 금 갔어요."
   " 그까짓 잔 하나 갖고 뭘 그래. 기분 나쁘면 버리고, 자 이걸로 한 잔 받아."
   " 네 그래요. 이걸 버리고 올께요."
   소영은 이상하게도 그것이 눈에 거쓸리는 지 문 밖에 내다 놓고 들어와서 잔을 받았다.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맥주 두 병이 바닥을 비웠다.
술 기운은 벌써 온 몸에 돌아 초조하고 불안하던 둘의 마음을 즐거움으로 바궈 놓았다.
처음부터 대담성을 보였던 소영은 더욱더  용감해 졌고,
강희의 마음도 그 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자고 싶었다. 그래서 소영은 술자리을 구석으로 물리치고 난 후
 빽에서 칫솔 두 개를 꺼내어 치약을 묻혀 하나는 강희 앞으로 내 밀었다.
   " 난 아침에 했는 데."
   " 아이 아침에만 하면 어떻게 해요. 이제부턴 주무시기 전에도 하셔야 해요."
   소영은 나무라듯 눈으로 곱게 흘켰다.
   양치질이 끝나고 한참 있어도 강희가 자리에 들 생각을 하지 않고 담배만 태우고 있자,
소영은 다시 치솔에 치약을 묻혀 강희 앞으로 내밀었다.
   " 왜 ?."
   " 다시 이를 딲고 오세요."
   " 허 참! 내."
   할 수 없이 다시 양치질을 하고 들어 온 강희가 우물주물하고 서 있자
   " 뭘하세요. 얼른 들어오지 않고요."
   " 응, 그래."
   " 아이 참 ! 응 그래가 벌써 몇 번짼인  줄이나 아세요."
   " 졸리면 먼저 자. 난 왠지 잠이 안 오는 구만."
   " 그래도 그렇게 있으면 어떻게 해요. 몹시 피료할 텐데. 이리로 들어와서 좀 누우세요."
   ( 이 여자가 어쩌자고 이러는 것일까. 자기 곁어 와서 누우라니.
나는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한 이불속에서 밤을 새울 수는 없다.
그를 어제 그대로의 몸으로 제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황여사에게 은혜를 갚는 길은 지금으로서는 오직 그 길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가 고등학교 졸업이 가가워 올 무렵 하루는 황여사가 교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운 다과점에서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 내가 학생을 만나려고 한 것은 자네도 짐작은 하겠네만 내 딸 아이에 대한 문젠데..."
   " 네 알겠습니다. 다시는 만나지 말아 달라는 말씀이시지요."
 
   " 아니 그렇게 내 말을 막지는 말게.
내 지금까지의 일에 대해서는 학생을 나무랄 하등의 이유가 없네.
그동안 자네들의 사이가 그저 친구의 관계로만 보아왔는 데,
오늘 우연히 딸 아이의 일기에서 자기를 피하기만 하는
자네 때문에 죽고 싶다고 하는 글귀가 수없이 있는 걸 보면,
그 아이는 깊이 무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학생과 의논을 좀 하려고 왔네."
 
   " 네 어머니. 솔직히 말해서 저도 소영을 좋아 합니다.
우정을 훨씬 넘어서요.
하지만 저의 처지로서는 감히 장래를 약속할 몸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멀리 하려고만 했는 데...."
   " 그래, 학생인들 어찌 괴롭지 않겠나.
하지만 아직 배움의 단계에 있는 몸이고,
지금은 그런 일에 정신을 팔 때가 아니질 않겠는 가.
그래서 하는 말인데...."
 
   " 네 어머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요.
다시 좋은 방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 그래 학생은 영리하니가 피차 마음의 엉어리가 맺치지 않도록 잘 처리해 주기 바라네."
   황여사가 그 일로 자기를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가 그렇게 급하게 졸업과 동시에
무엇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군에 입대하지 않았고,
또 소영 몰래 떠나지 앟았을 지도 몰랐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강희가 복무했던 부대의 사단장이 소영의 아버지였다.
그 무렵 후방에서 근무하던 아버지가 별을 하나 달고 전방 사단장으로 부임해 왔으며
가족들도 서울로 이사를 했던 것이다.
   강희가 수송학교를 졸업하고 사단장의 운전병이 된 것은 제대를 일 년 남짓 남겨둔 병장 때였고,
사단장의 숙소에서 다시 소영을 만난지 열흘도 못되어 죄전방 분대장으로 쫓겨가는 신세가 되었다.
   거기서는 외출이나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소영은 어떻게 주소를 알았는 지 거기까지 편지질을 했다.
수십 통의 편지를 받고, 그것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아서 강희는 할 수 없이
그녀의 친구집 주소로 답장을 썼다.
 
   < 영아 이 후 다시 편지를 보내지 말아다오.
나를 잊지 못해하는 너의 고통보다 글을 받고 답장을 주지 못하는
나의 슬픔을 생각해 보지는 않았느냐.
너는 단순히 사랑 하나만이면 만사가 해결되는 줄 아는 지는 모르지만
세상 일이란 그렇지가 않단다.
늘 내가 네게 말했지만 내가 오럴 수 없는 성벽 위에 네가 있단다.
   너는 그때마다 내게 말했지.
내가 내려가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맑은 물에 살던 숭어가 웅덩이에서 송사리떼와 같이 살 수 없듯이
너는 금방 질식하고 말 것이다.
내 어찌 너의 파멸을 나로 하여금 갖게 하겠느냐.>
 
   이러한 편지에 소영의 답장을 이외의 반응으로 금방 되돌아 왔다.
 
   < 정말 참으로 숱한 날들이 고통속에 흘러갔습니다.
   오늘에야 처음으로 강희씨가 보내주신 글월을 받고,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내 뽈을 고집어 보기도 하였답니다.
사연이야 어찌 되었건 당신에게서 답장을 받았다는
그것만으로도 저의 앞날에 서광이 비치는 듯 마구 가슴이 뜁니다.
   당신은 사내 대장부로서 어찌 그리도 옹졸하십니까.
비록 가정 환경이 차이가 난다고는 하나 결혼이란
어디까지나 남여 당사자의 결합이지 결코 가문의 대결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정 당신의 주제가 그러하시다면 저도 기꺼이 집을 나가 당신과 같은 고아가 되겠습니다.
하오니 저로 하여금 부모님에게 두 번 불효을 하게 하지 말아 주시길 비옵니다.>
 
   그러나 소영은 기어이 부모님에게 불효를 범하고야 말았다.
강희로부터 두 번 다시 답장이 없자,
그의 제대 날자를 아버지의 부관을 통해 알고
그가 탄 열차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 자기 자 ?."
 
   " 아니."
 
   " 그럼 무얼해 ?. 나 정말 이렇게 둘꺼야 ?."
 
   강희는 갑자기 말 문이 막혔다.
지금까지 북받쳐 오는 감정을 싺이느라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 데,
거기에다 부채질까지 하고 있으니
 
   ( 내가 왜 이러는가 ?.)
 
   지금까지 참아온 것만으로도 너무나 바보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이젠 무엇이 두려우세요 ? 아직도 절 장군의 딸로 생각하시나요. 저도 지금은 자기와 조금도 다름 없는 고아란 말이예요. 당신을 얻기 위해 제 스스로 고아가 되었어요. 자, 그러니 어서 절 가지세요. 어서요."
   " 영아 그렇게 성급하게 덤비지 말아줘. 너는 마치 신혼여행이라도 온 기분인지는 모르지만 난 하늘이 문어지는 심정이라고."
   " 성급하다니요. 제가 자기를 안 것은 고 일 년과 대학 삼 년, 거기에다 국민학교 시절을 합하면 십 년이 넘어요.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데, 자기는 어쩜 한결 같이 그 모양인지 몰라. 제가 애초에 점을 잘 못 찍었나 봐."
   소영은 장난스럽게 방그레 웃었다.
   " 그래, 그건 네 말이 맞아. 그러니 제발 오늘 밤은 이대로 고이 보내고 내일 네 집으로 돌아가 줘. 내게는 너의 행복을 지켜 줄만한 힘이 없어. 보시다 싶이 이렇게 빈틀틀이 잖아. 내일 당장 끼니를 때울만한 돈도 내게는 없어."
   " 그런 걱정은 말아요. 일자리를 구할때까지 당분간 먹고 살 돈은 제가 갖고 왔어요. 부디 돌아가라는 말만은 말아 줘요. 그리고 이제 다시 사랑하기 때문에 가질 수 없다는 삼류 소설 나부랑이 같은 말두요. 저는 요,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와 살고 싶어요. 그러니, 자 어서요."
   소영은 파들거리는 젖가슴을 대들 듯이 강희 앞으로 내었엇다.
   ( 어떻게 해야 하나 ?)
   그는 또 망스렸다.
   강희의 품 안으로 파고들던 소영은 그래도 아무 반응이 없자, 돌아 누워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별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왜 이 남자는 내 가슴을 이렇게도 애태우는 지. 이제는 금이 간 술잔에까지 신경이 쓰였다. 기쁜 나머지 너무나 새게 부딪쳤던 것이 후회스럽다. 그도 그 술잔처럼 파멸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하여 더욱더 슬퍼졌다.
   " 영아 울지 말고 우리 조용히 얘기 해."
   강희는 두 손으로 소영을 안아 일으켰다.
   " 끝났어요. 전 아무래도 자기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몸인가 봐요."
   "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 아까 금간 술잔 보셨죠 ?."
   " 그래서 ?."
   " 그게 아마 나쁜 징조 같아요."
   " 무슨 소리야. 그따위 미신이 어딨어."
   강희는 품안에서 벗어난 소영을 와락 껴안았다.
   " 좋아 ! 난 사랑할꺼야. 지금 이 순간부터 죽도록 너를 ....그래서 이제 네게 그것이 헛된 미신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일꺼야."
   " 어머 정말 ! 오오 하느님 감사 합....."
   뒷말은 강희의 입 안에서 뱀돌았다.
 
   다음 날 여관에서 나온 둘은 복덕방을 통하여 금강원 기슭에 있는 차밭골이라는 마을에 월세를 얻어 첫 보금자리를 꾸몄다. 원래 가내공업을 하던 슬레이트 건물을 개조하여 여러개의 방을 만들어 갓 세를 놓은 방이라 보기보다 내부는 새집처럼 깨끗하게 도배도 잘되어서 밝고 아늑하게 보였다. 앞뜰은 공장을 했던 땅이라 꽤 넓었고, 동쪽으로는 시내가 눈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고지대여서 높기는 하나 뒤로는 금정산이, 좌우로는 금강공원의 수목들이 욱어져 언제나 나무가지에 부딪치는 바람소리와 이름 모럴 새들의 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때로는 그것이 슬프고, 또 즐거울 때는 더욱더 그들을 즐겁게 하기도 했다.
   소영은 두부찌개를 연탄불 위에 올려 놓고 밖으로 나갔다.
   대문 앞에는 돌다리 아래로 맑은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의 현실처럼 밤이면 꽁공 얼어 붙었다가도 해가 뜨면 슬그머니 풀리기도 하였다.
   ( 오늘은 왜 여태 돌아오지 않을 까 ?)
   산 그림자를 따라 차밭골엔 금방 어둠이 깔려 왔다. 그녀는 한 발자욱 한 발자욱 실개천을 따라 내려갔다. 전날 같으면 강희가 벌써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는 요즘 하루도 빼 놓지 않고 아침을 먹는등 마는등 일자리를 구하려 시내로 나갔다가 어둠이 깔릴 무렵에야 어깨를 축 늘어 뜰이고 돌아 온다.
   요즘 같이 각박한 세상에 더욱이 보증조차 새울 수 없는 고아에게 일자리를 내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하루 종일 헤매다 보면 몸은 허기가 지고 마음은 초조하여 죽고만 싶었다.
   " 아니 추운데 여기까진 왜 나와 있어 ?."
   " 이제 오는 군요. 하도 안 오시길래."
   소영은 그저 눈치만 살필 뿐 취직이 어떻게 되었느냐고는 묻지 않았다.
   강희에게 약간 술 냄새가 났다.
   괴로워서 마셨으리라. 그녀는 자기 때문에 그가 더 고통을 받고 있는 것 같아서 슬펐다.
   " 자기 너무 걱정말아요. 아직 저에게 돈이 좀 있으니까 너무 초조해 하지 말고 우리 천천히 살 방도를 찾아요."
   " 그래, 어서 올라 갑시다. 그렇지 않아도  무엇이 좀 풀릴 듯 하는데. 그 일이 어떨는 지."
   " 그 일이라니요 ?."
   " 택시 운전."
   " 네 ! 택시 운전요 ?."
   적어도 외교관 부인을 꿈꾸었던 그가 택시 운전사의 아내가 되다니. 그것은 너무나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소영은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내색은 할 수 없어서
   " 할 수 없죠. 그거래도."
   그래서 강희에게 조금이나마 삶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었다. 나중에야 어떻게 될 값에 ."
   " 정말 미안해 ! 내 영아에게 실망을 주지 않을 직업을 가지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어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금강원 입구에서였다.
   오늘도 그는 취직 때문에 고등학교 동창 집을 몇 군데 들렸다가 허탕을 치고 오는 길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바지포켙에 두 손을 찌른 채 먼 하늘가를 쳐다보며 온천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데 지나가던 택시 한 대가 갑자기 U 자로 회전을 하더니 그를 앞질러 급 정거를 했다.
   강희는 그냥 지나가라고 손짓을 했다. 혹시 자기가 차를 잡는 줄 알고 세운 것이 아닌가 해서였다.
   그런데 택시는 가지 않고 도어가 열리며
   " 어어이, 니 강희 아이가 ?."
   했다. 그래도 대답이 없자, 택시 운전사는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강희의 앞으로 걸어오며
   " 니, 강희 맞제 ? 야 니 정말 오래간만이다 !."
   그는 손에 낀 흰장갑을 벗으며 악수를 청했다.
   " 근데, 당신은 ?...'
   강희는 손을 내밀어 악수는 받았으나 도무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 임마야, 내다. 만길이."
   그제서야 그는 철없이 낀 색안경을 벗으며 보란듯이 햇빛에 그얼린 얼굴을 내밀었다.
   " 야 그래. 너 정말 만길이로구나 !."
   이제 어른이 되어서일까. 고아원 시절 같았으면 벌써 강희의  뺨에 철썩 하고 소리가 났을 텐데, 놈은 점잖게 악수를 한 후 얼른 자기의 차에 타라고 했다.
   " 어이 타라. 여기서 이랄끼 아이라, 우리 어디 가서 한 잔 하자."
   " 한 잔이라니 ? 운전을 하다 말고."
   "야 운전이고 나팔이고 니 놈을 만났는 데...."
   만길은 반 강제로 강희를 운전대 옆에 밀어 넣었다.
   " 너 정말 이래도 되는 거니 ? 술을 마시고 운전을...."
   " 염려말거라. 요 앞 로타리에 나가면 스피야 천지다."
   그러면서 만길은 차를 돌렸다. 과연 온천 입구 신호대 옆 담벼락 밑에 운전사 차림의 청년 서넛이 화투판을 벌리고 있었다.
   " 야 이 놈아들아. 고마 말아라. 어두어지는데 무슨 지랄이고. 야 ,박군아. 니 이 차 좀 해라. 나는 오늘 저녁에 볼 일이 좀 있다."
   " 예, 형님요. 운전이사 내가 하지요. 근데 오늘 밤에 또 이거 만나는 기요 ?."
   놈은 씨익 웃으며 새끼 손가락을 까닥까닥해 보였다.
   " 야, 촐랑거리지 말고 운전이나 조심해 하거라."
   둘은 택시를 버리고 다시 온천교를 건너서 극장 옆골목에 있는 통술집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꽤 오래 다닌 단골인지 마담이 직접 나와 손님을 맞았다.
   만길에게 오빠, 자기라고 생각나는 대로 불러대는 예쁘장한 아가씨 둘이 한복 차림으로 들어오고 뒤이어 술상이 들어왔다.
   강희는 난생 처음으로 대하는 분위기에 좀 얼떨떨 했으나 술이 몇 잔 들어가고 나니 분위기에 조금 젖어 드는 것 같았다.
   ' 어이 이 가스나야. 안주만 나불나불 죽이지 말고 이 손님한테 술 좀 권해라. 내한테는 정말 귀한 손님인기라. 죽마고우 아이가."
   " 그래 예. 이 분이 오빠 친구라 예."
   그러면서 색시는 강희의 무릎에 올라 앉을 듯 바짝 닦아 앉으며
   " 자기 이 술잔 받으이소 예."
   술잔을 떼기가 무섭게 파적이 강희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민망한 얼굴이 되어 얼른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만길은 자기의 파트너와 주거니 받거니 하더니 어느새 색시의 가슴에 손을 넣고 시시득거리고 있었다.
   " 아이 서방님, 무얼 그렇게 넋나간 사람처럼 그러고 있어요. 저한테도 술 한 잔 주이소예."
   색시는 몸을 비고며 강희 앞으로 빈 잔을 내밀었다.
   벌써 술기운이 도는 지 만길은 이 쪽 사정은 묻지도 않고 그간 자기가 살아온 과거를 늘어 놓았다.
   중학에서 남의 공낙금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퇴학을 당하자, 그는 너무나 억울하여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교무실에 불려갔다가 책가방을 가지려 교실로 돌아왔을 때 왁짜지껄 떠들어대던 반 아이들은 갑자기 쥐죽은 듯 조용해 졌다. 교문을 나서자 그는 정말 죄인이 된 기분이 들어 차마 큰길로 걸어갈 수가 없어서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얼마를 걸었는 지, 그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보수동 산비탈에 있는 천사의 집을 훨씬 지난 대청동 어느 교회 앞이었다. 반쯤 열려 있는 철문 안의 교회는 바깥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조용하고 무시무시할 정도로 장엄했다.
   " 그런데 씨팔, 나는 예수님에게 내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고 위로라도 받을라켔는 데, 거기서도 안 쫓겨났나."
   " 아니 교회에서 기도 하려온 사람을 쫓아 내다니 ?."
   " 하기야 대낮에 책가방을 옆꾸리에 낀 학생이 교회 안을 기웃거리고 있으니까 목사님의 눈에는 농땡이를 친 불량학생으로 보였겠지."
   그래서 하루 종일 용두산 공원에서 책가방을 깔고 앉아 오륙도 위를 나는 갈매기와 고갈산 위에 떠 있는 뭉개구름을 바라보며 하염없이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벤치에 앉아 있는 아베크족에게 껌을 팔고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 나도 껌팔이를 하자.)
   그러나 수중에는 땡전 한 잎 없었다.
   슬픔과 절망과 분노 같은 것을 느끼며 그는 어두워서야 공원을 내려왔다.
   역시 이번에도 뒷골목 길로 하염없이 걸었다.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지나치다가 책가방에 든 책을 꺼내 팔았다.
   그 때의 돈으로 얼마였는 지 기억은 없으나 풀빵 두 개를 사 먹고 이튿 날 새벽, 조간 신문 백 매를 살 수 있었다. 그것을 판 돈으로 낮에는 국제시장에서 검을 받아 팔고, 또 오후에는 석간을 사서 팔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호구지책 뿐이었지 돈이 모이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길을 건너다가 지나가는 트럭에 부딪쳐 사고를 당했다. 이른 새벽이라 거리는 한산했고, 사고를 목격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당황한 운전사 ( 후에 안 일이지만 그는 무면허 차주로 운전 연습을 하느라고 차를 끌고 나왔다고 했다.)는 환자를 차에 싣고 병원으로 가지 않고 거제리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갔다.
   다행히 중상은 아니었다. 골절된 오른 쪽 다리는 접골원에 가서 기브스를 했다. 벗겨진 무럽에는 머큐름이면 족했다. 그래서 차주는 보호자를 만나 합의를 보려고 하였지만 고아에겐 그런 것이 있을리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차주의 집에서 먹고 자며 회복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차주도 그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만길은 거기서 그냥 놀고 먹기도 뭤해서 회복을 기다리는 동안 집안 청소도 해주고, 자동차 수리하는 일도 거들었다.
   이윽고 기부스를 떼는 날이 왔다.
   그것을 떼고 나니 천근 같던 다리가 날아갈 듯 가벼웠다. 그러나 갈곳이 없다. 그간 정이 들었는 지 떠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보상금조로, 장사 밑천을 하라고 주는 살 한 가마 값을 받아 들고 종일 헤매다 그날 밤 다시 차주의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 아니 너 돈이 적어서 그러느냐 ?."
   떠날 때 받은 돈을 도로 내어 밀자 차주는 못마땅한 얼굴로 물었다.
   " 아니라 예."
   " 그럼...?"
   '갈 곳이 없어서...."
   " 그래, 그럼 니 우리차 조수 노릇을 하지 않겠니 ? 나도 진작 그렇게 권하고 싶었다만, 혹시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차주는 거제서야 그가 돌아온 것을 좋아했다.
   " 요즘 세상에 뭐니뭐니 해도  기술이 제일이란다. 먹고 사는 데는 말이다. 너도 차차 기술을 읶혀 면허증이라도 하나 따 봐라. 당장 월급이 얼만데....그가짓 신문팔이 백 년을 해 봐야 무슨 돈이 되겠느냐."
   이래서 만길은 트럭 조수 오 년에 급기야 면허증을 땄다. 그래서 그분이 가지고 있는 택시를 맡아 운전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벌써 삼 년. 이제는 자기의 말마따나 베트랑급이란다.
   " 근데, 니는 요즘 우째 지내노.? 고아원에서 나온지는 오래 됐제 ?."
   그제서야 만길은 강희의 아래 위를 쓱 흘터 보며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 어이, 술 좀 더 가져 온나....자 들어라. 어서.... 오늘 우리 실컷 마셔보자."
   만길은 제법 취해 있었다.
   " 이노무 가시나들아, 술 좀 더 가지고 오라카는 데 뭐하노."
   그는 연방 방바닥에다 대고 빈 주전자를 두들겼다.
   한참 동안 머리를 끄덕이며 강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만길은
   " 뭐라고. 니가 벌써 장가를 들었다고 ?."
   " 장가라고야 할 것 없지만, 난 그 애 때문에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모르겠어. 그 전처럼 혼자 몸이라면 무슨 고생을 해도 좋겠는 데..."
   " 야 임마야 니, 장군의 딸을 물었으면 출세 길이 훤 하구마는. 야 당장 깔치를 앞세우고 올라 가거라."
   " 그건 안 돼,  그랬다간 당장 다리 몽둥이가 남아나지 않아."
   " 뭐라카노. 니가 꼬신기 아이고, 니 깔치가 꼬신 거 아이가 ?."
   " 그래도 그건 안 돼. 그도 제 집으로 돌아갈 사람이 아니야."
   " 그라먼 그 야단인데. 요세 세상에 취직이 잘 되야 말이지....씨팔 더군다나 고아원 출신이라면 순 곤조통으로 아니 원...."
   만길은 그렇게 투들거리며 또 술잔을 내밀었다.
   " 니 너무 걱정마라.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나."
   그러다가 그는 생각난 듯 눈을 크게 뜨며
   ' 근데 참 ! 니 군에 있을 때 차를 몰았다고 했제 ?
 
 
 
 
 
   열차가 부산에 도착한 것은 밤 열 시가 훨씬 지나서였다.
   차가 홈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모두들 선반위에 얹힌 짐들를 챙기느라 분주했다.
   강희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제대장병 답게 보따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소영은 제법 묵직한 빽 하나와 어깨끈이 긴 핸드백이 있었다.
   강희는 선반에서 그녀의 빽을 내려들고 앞장을 섰고,
소영은 즐거운 듯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의 뒤를 다라 출찰구를 빠져나왔다.
   멀리 눈앞을 막아선 수정동 고지대엔 마치 고층 빌딩의 불빛처럼
수많은 전등빛이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 별들과 맞닿아 있었다.
   가을이 채 가시지 않은 넓은 역광장에는 스산한 바람이 한기를 몰아왔고,
밝은 광장을 벗어난 승객들은 제각기 어둠속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 어디로 갈까 ?.)
   막상 갈데가 없다.
출발이 부산이었기 때문에 그는 제대를 하고 막연하게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을 뿐이었다.
고향은 분명 부산이로되 자기를 반겨줄 친척 하나 없다.
그렇다고 지금 그 나이에 다시 고아원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몸이다.
   그는 그동안 고아원에서 자랐다.
   거기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육군에 입대하여 어느새 제대를 한 것이다.
그가 양아치시절 털치기을 하다 붙들린 핸드백의 주인이 바로 누이동생을 찾으려 부산으로 올 때
버스비를 대어주었던 여인이었고,
그가 또 공교롭게도 대연 국민학교 시절 자기반 짝지인 소영의 어머니였다.
 
   소영의 집은 보수동 검정 다리 옆으로 조금 올라가면 죄측으로 첫 구름다리가 놓인 집이었다.
적산 가옥을 지붕만 남겨두고 내부는 완전 양식으로 개조한 대궐 같은 기와집의 넓은 정원에는
수많은 나무와 그 사이로 군데군데 석탑까지 있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주위의 환경과는 달리 새소리까지 들리는 것이 별개의 세상 같았다.
 
   아주머니가 시키는 대로 목욕을 하고 나오니,
어느새 도어 소리를 듣고 나왔는 지
계집아이 하나가 두 손으로 내의를 받쳐들고 나오며
 
   "자 이걸로 갈아 입어."
 
   하더니, 커다란 눈이 되며
 
   " 아니 너 강희 아니야 ?"
 
   " 어 소영이 !..."
 
   둘은 똑 같이 놀랐다.
소영은 들고 있던 내의를 응접실 바닥에 떨어 뜨리며 덥석 강희의 손을 잡았다.
 
   " 너네 집이었구나 !."
 
   " 그래. 지난 봄에 이사를 했어."
 
   " 아니 너희들 아는 사이냐 ?."
 
   그 때 황여사가 남편이 입던 잠옷 바지를 들고 들어서며 물었다.
   강희는 소영에게 잡힌 손을 슬며시 빼며 빨게진 얼굴로 몸둘바를 몰랐다.
   그 어색한 분위기를 변명이라도 하듯
 
   " 네 엄마. 얘가 글쎄, 바로 저번에 검정다리 위에서 만났다는 그 때 우리반 반장이예요."
 
   하며 소영은 바닥에 떨어뜨린 내의를 주워들었다.
 
   " 응 그러니. 참 사람의 인연이란 이상하구나 !."
 
   황여사는 남편의 잠옷을 강희 앞으로 내밀었다.
 
   " 얘 배고프겠다. 어서 옷 갈아 입고 밥을 먹도록 하자."
 
   " 그래 강희야, 옷 갈아 입고 얼른 식당으로 나와."
 
   소영은 엄마의 손을 잡고 응접실을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강희는 부랴부랴 땟국이 질질 흐르는 넝마를 벗어 버리고 새 내의를 갈아 입었다.
그리고 그 위에다 흰 바탕에 연한 푸른 줄무늬가 있는 잠옷 바지를 입었다.
 
   " 아니 이 건..."
 
   소영의 아버지가 입었던 것이라 헐렁한 것이 커도 너무 컸다.
품은 자기 또래가 셋이 들어가도 남을 것 같았고,
길이는 머리 끝까지 올려도 바닥에 질질 끌렸다.
 
   " 얘  뭘해. 어서 나오지 않고."
 
   " 응, 그래."
 
   강희는 빨게진 얼굴로 잠옷 바지를 입었다 벗었다 하면서 어쩔 줄을 몰랐다 .
그러다 소영이 재촉하는 바람에 식당으로 나가다
질질 끌리는 잠옷 바지 가랭이를 밟고 그대로 넘어졌다.
 
   " 호호호 !."
 
   " 하하하 !"
 
   그 꼴을 보고 소영은 배를 쥐고 웃었다.
   황여사는 넘어진 강희를 잡아 일으키며
 
   " 어디 다친덴 없니 ?
내 이럴 줄 알았으면 잠옷도 같이 사올 걸,.
잠시 입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러면서 손수 가랭이를 올려 주었지만 부드러운 옷감이라 금방 또 내려왔다.
   이 날 밤 강희는 열 시가 넘도록 그 집안 식구들과 지나 온 날들을 얘기 하며 놀다가
정해준 방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
 
   소영의 소망대로 당분간 이 집에서 학교를 다녀야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빵 집에서 했던 황여사의 말처럼 시골 큰 아버지댁으로 돌아가야 할 것인지,
이런 저런 생각에 긴 겨울 밤을 뜬 눈으로 보냈다.
 
                
소영에게
   너의 온 집안 식구들이 내게 준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생각이 난다 해도 당장 갚을 수 없는 현실이 서글프기만 하구나.
   어쨌든 이제 내 앞 길은 내가 개척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얻었기에 나는 떠나기로 했단다.
   소영아 , 내가 네게 줄 것이라고는 내 동생 영아의 찢어진 인형 하나 뿐이니 어찌 하겠느냐.
다만 내 온 정성이 거기에 있으니 기쁘게 받아주렴.
                                그럼 안녕
 
날이 채 밝기도 전 소영의 집을 빠져 나온 강희는 어이 없게도 밤 새도록
옆 골목에서 지키고 있던 사파리에게 목털미를 잡히고 말았다.
 
   " 야 이 얼간이 같은 새끼야. 여태 무얼하고 자빠졌어 ?
남은 동태가 되어 밤 새도록 네 놈이 도망쳐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는 데,
너는 이 놈아 따근한 방에서 편히 주무시고 이제야,
그것도 맨 손으로 어슬렁어슬렁 기어나와 이 우라질 놈아."
 
   강희는 따귀를 서너 대 얻어 맞고 또다시 양아치 신세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행인지 불행인지 날치기를 하다가 경찰에 잡혀 갔고,
거기서 일정한 기간을 거쳐 고아원으로 넘겨졌다.
   그는 그 고아원에서 만길을 만났다.
 
   " 어어이 , 니 촌놈 아이가 ?."
 
   " 응, 만길아 !."
 
   철망이 쳐진 스리코트에서 뛰어 내리자,
만길은 금방 알아보고 달려와서 강희의 따귀를 때리며 얼싸 안았다.
   이래서 그는 고아원을 세 군데나 전전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입대한 것이다.
   처음엔 그도 고아원 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탔인지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어서
두어 달도 목되어 만길이와 함께 탈출을 하여 온천장 부근을 돌아다니며 구걸을 했고,
거기서 부랑아 단속반에 잡혀 다시 하단 골짜기에 있는 초원의 집으로 넘겨졌다.
   그 때 약삭 빠른 만길은 도망을 쳐서 잡히지 않았다.
   거기서는 배가 고픈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고아원에서 운영하는 밭에서
일을 하는 것이 고되었고, 규율도 너무나 엄하여 탈출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도 또 얼마 가지 않아서 다른 고아원에서 나온 단속반에 걸려
보수동 산비탈에 있는 천사의 집으로 끌려갔다.
   그는 그 고아원에서 중학생이 된 만길을 또다시 만났다.
 
   " 강희야 우리 인자 공부 좀 하자. 그래야 앞으로 좋은 사람이 안 되겠나."
 
   남의 호주머니에 든 것을 제멋대로 꺼내 쓰기를 좋아했고,
누구보다도 먼저 탈출를 선동했던 놈이 중학 모자를 썼다고 생판 달라져 있었다.
 
   " 임마야 뛰어 봤자 아이더나."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도 여기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
 
   이래서 강희도 갖은 고난을 겪으며 이 천사의 집에서 충실히 일을 했고,
열심히 공부를 하여 중학부터 고등학교 삼 년까지 쭉 우등을 했고,
장학생으로 졸업을 했다.
그러나 만길은 중 3 때 학교반 아이의 공납금을 슬쩍하다
퇴학을 당한 그 길로 다시 천사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몇 일 후, 잃어버렸다는 돈은 피해 학생의 도덕 책갈피속에서 발견 되었다.
그날이 마침 시간표에 도덕이 들어 있어 그 전날 밤 아버지로부터 받은 돈을
거기에 넣어 두었다가 아침에 잊어버리고 등교를 하였으며,
그 학생은 다만 책속에 넣어두었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그것이 없자,
자기 짝지의 소행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수 박에 없는 것이 만길은 평소 친구들에게 무용담처럼
양아치시절의 날치기라든가 남의 호주머니를 슬쩍한 경험담을 들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만길이가 천사의 집을 떠난 어느 날 그의 반 단임과 돈을 잃어 버렸다는
그 학생이 고아원을 찾아왔다.
 
   " 원장님 어떠한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단임은 죽어가는 얼굴로 사건의 경위를 설명한 후에 고개를 푹 떨구었다.
   고아원으로 찾아와 보니 비로써 만길이가 그 날로 지금 껏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원장의 말을 듣고 단임은 전생에 씻지 못할 실수를 뼈저리게 느꼈다.
   학생도 말없이 울고 있었다.
 
   "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사회가 우리 아이들을 바로 볼 수 없게 한 책임을 우리 스스로 질 수 밖에요."
 
   그 후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단임은 그 길로 사표를 내고 교단을 떠났다고 했다.
 
   강희가 소영을 다시 만난 것은 어느 비오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잔뜩 찌뿌려 있던 하늘은 오후가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비를 버붓기 시작했다.
   종래가 끝나도 비는 좀처럼그칠 것 같지 않아서 그는 할 수 없이 여느 때처럼
책가방을 옆꾸리에 끼고 교문을 향해 빗속을 달렸다.
사대 부속 국민학교 앞을 지나 검정다리를 막 들어설 무렵이었다.
누군가가 뒤에서
 
   " 저 , 저어 여봐요."
 
   하고,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는 뜀박질을 계속하면서 뒤돌아 보았다.
우산을 받쳐든 어떤 여학생이 쫓아오던 걸음을 멈추면서
 
   " 저 혹시 강희씨가 아니세요 ? "
 
   " 네에, 강희요 ? 강희는 강흰데요."
 
   " 아 맞았군요 ! 역시 강희씨가..."
 
   여학생은 장대 같은 비를 그대로 맞고 서 있는 강희를 자기의 우산으로 덮었다.
   강희는 이마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팔소매로 훔치고 나서 빤히 우산속의 여학생을 바라봤다.
 
   " 아이 참! 절 모르세요 ? 소영이에요."
 
   " 아, 소영이 !."
 
   "네, 소영이."
 
   " 그래 정말 소영이구나 !
근데 하도 오래되어서 그런지 영 몰라 보겠는 데 !."
 
   ( 아이 미워 ! )
 
   소영은 말없이 눈을 흘키며
 
   " 아이 참 왜 자꾸 밖으로 빠져 나가세요 ?."
 
   " 옷은 이미 젖었는 걸."
 
   " 그래두요."
 
   낯이 빨게진 강희를 다시 우산 속으로 끌어들였다.
   둘은 잠시 말을  잃은 채 묵묵히 걸었다.
그러다가 소영이 먼저 빵집으로 들어서자 강희는 멈칫 걸음을 멈추며 난처한 얼굴을 했다.
   " 제게 돈 있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둘은 구석진 식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 자 빗물을 좀 닦으세요."
   소영은 잠자리 날개처럼 얇고 꽃무늬가 있은 손수건을 꺼내어 강희 앞으로 내밀었다.
   강희는 피식 웃으며 그것을 받아 두어 번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자 그것은 생각한 대로 이내 젖어버렸다.
닦은 이마에서는 금방 머리로부터 쭈루룩 빗물이 타고 내렸다.
 
   " 자요. 머리도 좀 닦으세요."
 
   소영은 젖은 손수건을 짜서 다시 강희 앞으로 내밀었다.  
   어릴 때는 계집애처럼 하얗고 야들야들 하던 얼굴이 여드름 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코 믿까지 꺼무스름한 것이 이젠 완전히 어른 티가 났다.
딱 벌어진 어깨에 언제부터 입었던 교복인지는 몰라도
누렇게 바래진 남방이 터질 듯 팽팽했다.
 
   " 왜 자꾸 웃어 ? 내 얼굴에..."
 
   소영은 고개를 살래살래 좌우로 흔들었다.
고개를 흔들 때마다 단발 머리가 물결처럼 출렁였고,
그 사이로 샛별 같은 눈동자가 곱게 웃고 있었다.
 
   ( 아 너도 이제 다 컸구나 !)
 
   강희는 먼저 거리감이 왔다.
조금 과하게 파인 듯 한 얇은 원피스 위에 드러난 목덜미에 살이 통통하게 붙어 있었고,
노르스름한 솜털이 윤기를 냈다.
그 아래로 볼룩하게 드러난 젖무덤,
그 아래로 깎아내리다 빗나간 것처럼 잘룩한 허리며,
의자 위에 얹혀저 있는 펑퍼짐한 엉덩판이 강희의 얼굴을 뜨겁게 자극했다.
   그는 어색한 가운대서도 황홀감을 금치 못하며
이 후 다시 만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이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
 
   " 아 아무것두..."
 
   둘은 옛날처럼 이래라 저래라 말을 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네, 아니요 라고 할수도 없어서 거북하기만 했다.
 
   " 근데, 학교는 ?."
 
   " 고 삼이에요. N여고....오늘은 특별히 조퇴를 했어요."
 
   ' 조퇴를 ? 특별이..."
 
   " 네, 거기 자기를 만나려구요."
 
   소영은 빨게진 얼굴로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 그럼 오늘의 해후가 우연이 아니었단 말이요 ?."
 
   " 그러면요. 내가 얼마나 비 오는 날을 기다렸다구요."
 
   " 비오는 날을 ?."
 
   " 언젠가 어느 학생지에 실린 비오는 날이라는 수필을 읽었거든요."
 
   소영은 점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 비오는 날이면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검정다리 위에 발걸음이 멈추어진다.
   오 년 전 넝마 광주리 대신 내 옆꾸리에 낀 책가방은 그 때처럼 비에 흠벅 젖고 있지만,
나는 흙탕물에 떠내려가는 빈 강통이라든가 찢어진 공과 헌 신짝,
그리고 나무토막 등 잡다한 물건들을 내려다 보며 그리움에 젖군한다.
   어느 해인가  네가 양아치시절 다리 밑에서 홍수를 만나
내 동생 영아의 인형이 떠내려가는 것을 건져 내려다
급류에 휘말려 죽을 고비를 넘긴 일이 어제와 같은데,
세월은 흘러 나는 지금 어였한 고교생이 되었구나.
   영아야, 너는 지금 어느 하늘 아래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
 너도 나처럼 이 비를 맞으며 오빠가 보고 싶어 울고 있느냐 ?>
 
   라는, 대목에서 나는 언듯 강희씨의 글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그 후 얼마나 비오는 날을 기다렸는 지 몰라요. "
   그러면서 소영은 노끈으로 묵은 흰 종이 뭉치를 강희 앞으로 내밀었다.
 강희는 잠에서 깨어난 듯 훔칫 놀라며
   " 그게 뭔데 ?."
   하고, 겁부터 냈다.
   " 끌러 보세요. 우의예요."
   ' 뭐, 우의 ?."
   " 네, 그 수필을 읽고 진작 사 두었는 데 좀처럼 비가 와야죠."
   그래서 전해 줄 길이 없어 하늘만 처다보고 기다렸단다.
   " 응, 고맙긴 하지만 이 건 좀 곤란한데.
우리 고아원에서는 아무도 우의를 가진 사람이 없거든."
   만약 그렇게 좋은 우의를 입고 다니는 걸 보면
어디서 훔친 물건이라고 오해 받기 십상이라고 했다.
   " 그럼 선물을 받았다고 하면 되잖아요."
   강희는 피식하고 씁쓸히 웃으며
   " 그건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아, 우리 고아에겐."
   " 하긴 그렇기도 하군요. 하지만 어떻게 하지요. 난 주고 싶은 데."
   " 미안해. 내 처지를 이해해 줘."
   강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먹어 치웠는 지 빵 한 접시와 단팟죽 한 그릇이
사이다병과 함께 비워 있었다.
   ' 왜 벌써 일어 나세요. 우리 좀더 이야기 해요."
   " 나 빨리 가야 돼."
   " 왜요 ? 빵 더 시킬께요."
   " 아니야. 일이 있어. 신문도 배달해야 하고,
동생들 공부도 가르쳐야 하거든."
   그는 벌써 빵집 문을 나서고 있었다.
   " 아이 참 ! 잠간만 더 있어 줘요."
   소영이 발을 동동 구르며 빵값을 지불하고 나왔을 때
강희는 어느새 간 곳이 없었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거기에다 바람까지 휘몰아쳐 힌겹게 편 우산도 뒤집힐 듯이 펄럭였다.
 
   ( 무심한 사람 !  얼마나 갈구한 만남이었는 데.)
 
   소영은 힘없이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바람에 견디지 못해 그런지는 몰라도 우산은 접어진 채 손에 들려 있었다.
얼굴에는 눈물과 빗물이 뒤범벅이 되어 흘려 내렸고,
옷은 몸에 찰싹 달라붙어 걸음을 방해했다.
 
   " 보래 학생. 이거 학생거 아이가 ?."
 
   빵집 아주머니는 응급결에 우산도 쓰지 않은 채 허급지급 달려 나오면서
우의가 든 종이 봉투를 내밀었다.
   소영은 말없이 그것을 받아 들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보수천에는 흙탕물이 성난 파도처럼 무섭게 흐르고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대문과 연결된 구름다리 위에 서서
철책에 부딫이는 빈 깡통 소리와  구비치는 물결속에 잠겼다
올라와서 떠내려 가고 있는 나무조각들을 넋 나간 사람처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비를 맞아서일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 온 소영은 그 길로 자리에 누웠다.
열이 나고 오한이 왔다. 공영히 슬프지고 자구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의사선생님이 다녀가고, 물수건으로 이마를 닦아주시는
어머니의 근심스러운 물음에도일채 입을 열지 않았다.
자꾸 눈물만 흘렸다.
 
   " 엄마 아무 일도 아니에요. 저 곧 이러날게요."
 
   그러나 그는 삼 일째 등교를 하지 못했다.
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엉뚱하게도 훤칠한 키와 떡 벌어진 가슴에
어울리지 않게 어깨를 축 늘어 뜨리고 빗속으로 사라지는 강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럴 때면 또 까닭없이 눈물이 쭈르륵 흘렀다.
 
   ( 내가 왜 이럴까 ? 혹시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
 
   사랑이라니 , 당치도 않을 소리다.
   내가 왜 그까짓 고아 나부랑이를 좋아한단 말인가.
그도 왕년에는 떵떵거리던 목재소 사장의 아들이긴 하였으나
지금은 신문팔이 고아가 아닌가.
아버지의 말마따나 나는 적어도 외교관이나 대학교수의 부인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가 비록 고아이긴 하여도 일류 고등학교를 다니는 수재이고 보면
외교관이 못되라는 법도 없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더욱더 그가 밉고 보고도 싶어졌다.
 
   소영이 한 열차를 탄 것을 안 것은 서울발 경부선 열차가 수원을 조금 지나서 였다.
   강희는 뜻밖이였으나 소영은 모든 것이 계획된 일이었다.
그것은 제대복을 입고 초라하게 앉아 있는 그를 발견하고
 
   " 어머 여기 계셨군여 !."
 
   라고, 한 그녀의 말을 들어 보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희는 그것을 억지로라도 부인 하려는 듯
역 광장을 지나 큰 길로 나와서 고개를 들고 소영 앞으로 백을 내밀었다.
 
   " 꽤 무겁죠. 같이 들어 드릴께요.'
 
   " 아니야. 들고 가."
 
   소영은 마주 들려던 손을 거두며 우뚝 섰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래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돌아섰다.
   오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그들을 쳐다 봤다.
   강희는 할 수 없이 또 혼자 빽을 들고 앞장을 섰다.
 
   " 어디로 가아 ?."
 
   강희가 시내 버스에 오르자.
소영도 뒤따라 오르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속 눈섭은 아직도 물기에 젖어 있었다.
 
   " 어디로 가느냐고요 ?."
 
   " 가는 데까지...."
 
   " 가는 데까지 어디 ?.'
 
   " 그건 나도 몰라."
 
   늦은 밤이라 그런지 버스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둘은 맨 뒤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강희는 눈을 감은 채 흔들리는 차체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고,
소영은 불안한 얼굴로 가끔 어두운 창 밖을 내다 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들이 부산대학 앞 버스 종점에 내렸을 때는 밤 열한 시 반이 가까워 지고 있었다.
 
   " 어디로 자꾸 가기만 해 ?."
 
   소영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앞장서서 걸어가는 강희의 빽을 마주 들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보아하니 버스가 왔던 길로 되돌아 가는 듯 했다.
   " 여긴 너무 어두워."
   " 그럼 날이 샐 때까지 이렇게 걷는단 말이야 ?."
 소영이 발걸음을 멈추자 한쪽 백을 들고 있던 강희도 동시에 우뚝 서졌다.
   " 잔소리 말고 따라 와."
   강희도 빽을 확 잡아당기며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둘은 한참 동안 또 말없이 걸었다.
   어쩌자고 자꾸 가기만 할까 ?.
   정작 집이 없어서 일까. 소영은 이렇게 무작정
그를 따라 방황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우리 어디 가던 오늘은 여기서 자구 가요. 전 더 이상 못 걷겠어요."
   그러면서 이번엔 소영이 앞서 여관으로 들어서며 빽을 잡아 당겼다.
   강희는 엉거주춤 딸려가다 말고 눈이 뚱그래지며 얼굴을 붉혔다.
   " 할 수 없잖아요."
   소영은 눈으로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들을 놓칠세라, 안에서 종업원이 달려 나와 빼았 듯 빽을 받아 들고 앞장을 섰다.
   둘은 그를 따라 이 층으로 올라갔다.
   온천지대라 그런지는 몰라도 방마다 욕실이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방엔 아늑하고 환하게 새로 도배가 되어 있었고,
윗목엔  조그마한 탁자위에 다이얄 없는 전화기와 그 옆으로는 물 주전자와 컵이 얹혀져 있었다.
그 아래로는 핑크빛 비단 이불이 가지른히 놓인 두 개의 베개 아래 깔려 있었다.
머리맡에는 웬일인지 욕실에 가 있어야 할 타올 두 장이 얌전히 포개어져 있었다.
   " 어어이, 방 하나 더 없냐 ?."
   강희가 숙박계를 내미는 종업원에게 물었다.
   " 와 이 방이 마음에 안 드능기요."
   " 아니 그게 아니라..."
   " 그라면 와요 ?."
   종업원은 이상한 얼굴로 둘을 번갈라 쳐다보며 물었다.
   " 나 방 두 개 얻을 돈 없어요."
   " 그 정도는 내게도 있어."
   종업원이 무슨 눈치를 채었는 지 더 이상 빈 방은 없다고 짤라 말했다.
   " 응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 나 잠간 나갔다 올께. 먼저 목욕하고 계세요."
   숙박계를 받아들고 종업원이 나가자 소영도 뒤따라 나서며
고소해 죽겠다는 듯 속으로 쿡쿡 웃었다.
   " 응 그래. 그러지."
 
둘이 나가고 도어가 닫히자 강희는 긴 안도의 숨을 내어쉬며 얼른 제대복을 벗었다.
육군 마크가 희미하게 박힌 낡은 동내의도 벗었다. 
고무 끈이 늘어져 반바지 보다 헐렁한 팬티도 벗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것을 소영에게 보이지 않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지 모른다.
   그는 그녀가 돌아오기 전에 목욕을 끝내야 한다고 부랴부랴 서둘렸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욕실 도어에 노크 소리가 났다.
   " 아니, 왜 ?."
   강희는 무엇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후다닥 욕탕 안으로 뛰어 들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욕실문이 뾰쪽이 열리고 있었다.
그는 응급결에 머리에 묻은 비누거품을 걷어 모아 도어를 향해 집어 던졌다.
   " 어머 ! 저이가...."
   소영은 반사적으로 도어를 닫았으나 얼굴은 온통 그것을 덮어 쓴 후였다
   강희는 욕탕에서 뛰어나와 안으로 문을 잠그려고 더듬어 보았지만 문걸이 같은 것이 없었다.
   " 이런 빌어 먹을..."
   여관이나 호텔 같은 욕실에는 아예 그런 것이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남성의 욕망을 도와주기 위해 만들어  두지 않은 모양이었다.
   " 에이 안심하세요. 인제 안 그럴게요."
   잠시 후 욕실에서 노크 소리가 나자 소영은 방안에서 소리쳤다.
   " 아니야, 나 목욕 끝났어."
   " 아니 벌써요 ?."
   " 그래."
   " 그럼 옷 안에 넣어 줘요 ?."
   " 아니야. 잠시 나가 있어."
   " 에이 무슨 남자가 그래요."
   소영은 할 수 없이 밖으로 나와 도어 앞에 붙어 서서
   "거기 내의 새 걸로 갈아 입으세요. 잠옷도요."
   그러고 보니 면으로 된 하얀 삼각팬티 밑에 하늘색 줄무늬가 있는 흰 바탕의 융 잠옷이 포개져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미리 준비하여 빽에 넣어 온 듯 했다. 자기가 벗어 둔 옷가지는 간곳이 없다.
   " 아니 내 내의는 ?."
   " 아이 금방 주무실 사람이 내의는 찾아 뭘 해요."
   강희는 할 수 없이 새 팬티에 잠옷만 걸친 채 소영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 어머 자기 정말 멋져 !."
   그러면서 안겨오려는 그녀를 강희는 벽에 붙은 거울을 보는 채가볍게 피하며
   " 나 밖에 나가 있을께 소영도....."
   " 그럴 필요 없어요. 돌아만 앉아 계세요. 옷 벗을 때까지만요."
   " 그래 그럼. 내 눈 깜고 돌아 앉아 있을 게."
   소영이 목욕을 하는 동안 강희는 안절부절 못했다.
열차에서 사 온 주간지를 뒤적였으나 무엇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담배를 피워 보아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 어떻게 해야 하나 ?.)
   이윽고 물소리자 뚝 그쳤다.
   강희는 놀란 듯이 담배 불을 비벼 끄고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때 소영이 도어를 열고 얼굴을 내밀며
   " 저 잠옷 좀 가져다 주실래요."
   " 응 벌써 다 했어. 내 밖으로 나가 줄께."
   강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 났다.
   "자꾸 그러심 저 이대로 뛰어 나갈거예요.
   " 그래 그래, 알았어 ! 잠간 기다려. 근데 잠옷이 어디 있더라 ?."
   "아이 거기 탁자위에 있잖아요."
   " 어 그래. 여기 있구만 !."  
   잠옷을 집어 든 강희의 손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는 차마 욕실 쪽을 바로 보고 갈 수가 없어서 외면을 한 채 더듬거리며 그것을 내밀었다.
   " 아, 아야 !."
   " 자기가 무슨 수도승인가 뭐."
   잠옷은 뺏기고 손등은 꼬집혔다.
   욕실에서 나온 소영은 정말 아름다웠다.
땀방울이 송송 돋아난 쫑긋한 콧날과 촉촉히 젖은 동그스럼한 얼굴에
약간 두터운 듯한 입술이 개물고 싶도록 귀여웠다. 깃 없는 잠옷이라
그런지 탐스러운 목덜미는 무우쪽처럼 희고 길었다.
그 아래로 살아서 움직이는 두 개의 젖무덤,
그것은 다만 얇은 잠옷 하나로만 가려서인지 몹시 출렁거려 강희의 눈길을 어지럽혔다.
   " 목 타시지요. 맥주 한 잔 드릴게요."
   소영은 그가 목욕을 하는 동안 밖에 나가 사 온 맥주 두 병과 마른 안주,
그리고 여관에서 빌려온 그라스를 강희 앞으로  들고 왔다.
그녀는 주간지 위에 땅콩과 대구포를 뜯어 얹어두고 빈 잔에다 술을 부었다.
   " 자, 드세요."
   " 응, 영아도 한 잔..."
   " 네. 저도 목 말라요."
   소영이 내미는 잔에 강희가 술을 부었다.
   " 우리 건배해요. 우리들의 앞날에 행복 있기를..."
   그러면서 소영은 남자처럼 맥주잔을 탁 부딛쳐 왔다.
   " 어머 !."
   그녀는 순간 얼굴에 싹 웃은기가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다.
   " 왜 그러고 있어 ? 쭉 들이키지 않고."
   강희는 빈잔을 내려 놓고 입술에 묻은 거품을 손으로 닦으며 물었다.
   " 맥주잔이 금 갔어요."
   " 그까짓 잔 하나 갖고 뭘 그래. 기분 나쁘면 버리고, 자 이걸로 한 잔 받아."
   " 네 그래요. 이걸 버리고 올께요."
   소영은 이상하게도 그것이 눈에 거쓸리는 지 문 밖에 내다 놓고 들어와서 잔을 받았다.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맥주 두 병이 바닥을 비웠다.
술 기운은 벌써 온 몸에 돌아 초조하고 불안하던 둘의 마음을 즐거움으로 바궈 놓았다.
처음부터 대담성을 보였던 소영은 더욱더  용감해 졌고,
강희의 마음도 그 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자고 싶었다. 그래서 소영은 술자리을 구석으로 물리치고 난 후
 빽에서 칫솔 두 개를 꺼내어 치약을 묻혀 하나는 강희 앞으로 내 밀었다.
   " 난 아침에 했는 데."
   " 아이 아침에만 하면 어떻게 해요. 이제부턴 주무시기 전에도 하셔야 해요."
   소영은 나무라듯 눈으로 곱게 흘켰다.
   양치질이 끝나고 한참 있어도 강희가 자리에 들 생각을 하지 않고 담배만 태우고 있자,
소영은 다시 치솔에 치약을 묻혀 강희 앞으로 내밀었다.
   " 왜 ?."
   " 다시 이를 딲고 오세요."
   " 허 참! 내."
   할 수 없이 다시 양치질을 하고 들어 온 강희가 우물주물하고 서 있자
   " 뭘하세요. 얼른 들어오지 않고요."
   " 응, 그래."
   " 아이 참 ! 응 그래가 벌써 몇 번짼인  줄이나 아세요."
   " 졸리면 먼저 자. 난 왠지 잠이 안 오는 구만."
   " 그래도 그렇게 있으면 어떻게 해요. 몹시 피료할 텐데. 이리로 들어와서 좀 누우세요."
   ( 이 여자가 어쩌자고 이러는 것일까. 자기 곁어 와서 누우라니.
나는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한 이불속에서 밤을 새울 수는 없다.
그를 어제 그대로의 몸으로 제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황여사에게 은혜를 갚는 길은 지금으로서는 오직 그 길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가 고등학교 졸업이 가가워 올 무렵 하루는 황여사가 교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운 다과점에서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 내가 학생을 만나려고 한 것은 자네도 짐작은 하겠네만 내 딸 아이에 대한 문젠데..."
   " 네 알겠습니다. 다시는 만나지 말아 달라는 말씀이시지요."
 
   " 아니 그렇게 내 말을 막지는 말게.
내 지금까지의 일에 대해서는 학생을 나무랄 하등의 이유가 없네.
그동안 자네들의 사이가 그저 친구의 관계로만 보아왔는 데,
오늘 우연히 딸 아이의 일기에서 자기를 피하기만 하는
자네 때문에 죽고 싶다고 하는 글귀가 수없이 있는 걸 보면,
그 아이는 깊이 무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학생과 의논을 좀 하려고 왔네."
 
   " 네 어머니. 솔직히 말해서 저도 소영을 좋아 합니다.
우정을 훨씬 넘어서요.
하지만 저의 처지로서는 감히 장래를 약속할 몸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멀리 하려고만 했는 데...."
   " 그래, 학생인들 어찌 괴롭지 않겠나.
하지만 아직 배움의 단계에 있는 몸이고,
지금은 그런 일에 정신을 팔 때가 아니질 않겠는 가.
그래서 하는 말인데...."
 
   " 네 어머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요.
다시 좋은 방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 그래 학생은 영리하니가 피차 마음의 엉어리가 맺치지 않도록 잘 처리해 주기 바라네."
   황여사가 그 일로 자기를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가 그렇게 급하게 졸업과 동시에
무엇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군에 입대하지 않았고,
또 소영 몰래 떠나지 앟았을 지도 몰랐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강희가 복무했던 부대의 사단장이 소영의 아버지였다.
그 무렵 후방에서 근무하던 아버지가 별을 하나 달고 전방 사단장으로 부임해 왔으며
가족들도 서울로 이사를 했던 것이다.
   강희가 수송학교를 졸업하고 사단장의 운전병이 된 것은 제대를 일 년 남짓 남겨둔 병장 때였고,
사단장의 숙소에서 다시 소영을 만난지 열흘도 못되어 죄전방 분대장으로 쫓겨가는 신세가 되었다.
   거기서는 외출이나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소영은 어떻게 주소를 알았는 지 거기까지 편지질을 했다.
수십 통의 편지를 받고, 그것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아서 강희는 할 수 없이
그녀의 친구집 주소로 답장을 썼다.
 
   < 영아 이 후 다시 편지를 보내지 말아다오.
나를 잊지 못해하는 너의 고통보다 글을 받고 답장을 주지 못하는
나의 슬픔을 생각해 보지는 않았느냐.
너는 단순히 사랑 하나만이면 만사가 해결되는 줄 아는 지는 모르지만
세상 일이란 그렇지가 않단다.
늘 내가 네게 말했지만 내가 오럴 수 없는 성벽 위에 네가 있단다.
   너는 그때마다 내게 말했지.
내가 내려가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맑은 물에 살던 숭어가 웅덩이에서 송사리떼와 같이 살 수 없듯이
너는 금방 질식하고 말 것이다.
내 어찌 너의 파멸을 나로 하여금 갖게 하겠느냐.>
 
   이러한 편지에 소영의 답장을 이외의 반응으로 금방 되돌아 왔다.
 
   < 정말 참으로 숱한 날들이 고통속에 흘러갔습니다.
   오늘에야 처음으로 강희씨가 보내주신 글월을 받고,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내 뽈을 고집어 보기도 하였답니다.
사연이야 어찌 되었건 당신에게서 답장을 받았다는
그것만으로도 저의 앞날에 서광이 비치는 듯 마구 가슴이 뜁니다.
   당신은 사내 대장부로서 어찌 그리도 옹졸하십니까.
비록 가정 환경이 차이가 난다고는 하나 결혼이란
어디까지나 남여 당사자의 결합이지 결코 가문의 대결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정 당신의 주제가 그러하시다면 저도 기꺼이 집을 나가 당신과 같은 고아가 되겠습니다.
하오니 저로 하여금 부모님에게 두 번 불효을 하게 하지 말아 주시길 비옵니다.>
 
   그러나 소영은 기어이 부모님에게 불효를 범하고야 말았다.
강희로부터 두 번 다시 답장이 없자,
그의 제대 날자를 아버지의 부관을 통해 알고
그가 탄 열차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 자기 자 ?."
 
   " 아니."
 
   " 그럼 무얼해 ?. 나 정말 이렇게 둘꺼야 ?."
 
   강희는 갑자기 말 문이 막혔다.
지금까지 북받쳐 오는 감정을 싺이느라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 데,
거기에다 부채질까지 하고 있으니
 
   ( 내가 왜 이러는가 ?.)
 
   지금까지 참아온 것만으로도 너무나 바보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이젠 무엇이 두려우세요 ? 아직도 절 장군의 딸로 생각하시나요. 저도 지금은 자기와 조금도 다름 없는 고아란 말이예요. 당신을 얻기 위해 제 스스로 고아가 되었어요. 자, 그러니 어서 절 가지세요. 어서요."
   " 영아 그렇게 성급하게 덤비지 말아줘. 너는 마치 신혼여행이라도 온 기분인지는 모르지만 난 하늘이 문어지는 심정이라고."
   " 성급하다니요. 제가 자기를 안 것은 고 일 년과 대학 삼 년, 거기에다 국민학교 시절을 합하면 십 년이 넘어요.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데, 자기는 어쩜 한결 같이 그 모양인지 몰라. 제가 애초에 점을 잘 못 찍었나 봐."
   소영은 장난스럽게 방그레 웃었다.
   " 그래, 그건 네 말이 맞아. 그러니 제발 오늘 밤은 이대로 고이 보내고 내일 네 집으로 돌아가 줘. 내게는 너의 행복을 지켜 줄만한 힘이 없어. 보시다 싶이 이렇게 빈틀틀이 잖아. 내일 당장 끼니를 때울만한 돈도 내게는 없어."
   " 그런 걱정은 말아요. 일자리를 구할때까지 당분간 먹고 살 돈은 제가 갖고 왔어요. 부디 돌아가라는 말만은 말아 줘요. 그리고 이제 다시 사랑하기 때문에 가질 수 없다는 삼류 소설 나부랑이 같은 말두요. 저는 요,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와 살고 싶어요. 그러니, 자 어서요."
   소영은 파들거리는 젖가슴을 대들 듯이 강희 앞으로 내었엇다.
   ( 어떻게 해야 하나 ?)
   그는 또 망스렸다.
   강희의 품 안으로 파고들던 소영은 그래도 아무 반응이 없자, 돌아 누워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별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왜 이 남자는 내 가슴을 이렇게도 애태우는 지. 이제는 금이 간 술잔에까지 신경이 쓰였다. 기쁜 나머지 너무나 새게 부딪쳤던 것이 후회스럽다. 그도 그 술잔처럼 파멸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하여 더욱더 슬퍼졌다.
   " 영아 울지 말고 우리 조용히 얘기 해."
   강희는 두 손으로 소영을 안아 일으켰다.
   " 끝났어요. 전 아무래도 자기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몸인가 봐요."
   "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 아까 금간 술잔 보셨죠 ?."
   " 그래서 ?."
   " 그게 아마 나쁜 징조 같아요."
   " 무슨 소리야. 그따위 미신이 어딨어."
   강희는 품안에서 벗어난 소영을 와락 껴안았다.
   " 좋아 ! 난 사랑할꺼야. 지금 이 순간부터 죽도록 너를 ....그래서 이제 네게 그것이 헛된 미신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일꺼야."
   " 어머 정말 ! 오오 하느님 감사 합....."
   뒷말은 강희의 입 안에서 뱀돌았다.
 
   다음 날 여관에서 나온 둘은 복덕방을 통하여 금강원 기슭에 있는 차밭골이라는 마을에 월세를 얻어 첫 보금자리를 꾸몄다. 원래 가내공업을 하던 슬레이트 건물을 개조하여 여러개의 방을 만들어 갓 세를 놓은 방이라 보기보다 내부는 새집처럼 깨끗하게 도배도 잘되어서 밝고 아늑하게 보였다. 앞뜰은 공장을 했던 땅이라 꽤 넓었고, 동쪽으로는 시내가 눈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고지대여서 높기는 하나 뒤로는 금정산이, 좌우로는 금강공원의 수목들이 욱어져 언제나 나무가지에 부딪치는 바람소리와 이름 모럴 새들의 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때로는 그것이 슬프고, 또 즐거울 때는 더욱더 그들을 즐겁게 하기도 했다.
   소영은 두부찌개를 연탄불 위에 올려 놓고 밖으로 나갔다.
   대문 앞에는 돌다리 아래로 맑은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의 현실처럼 밤이면 꽁공 얼어 붙었다가도 해가 뜨면 슬그머니 풀리기도 하였다.
   ( 오늘은 왜 여태 돌아오지 않을 까 ?)
   산 그림자를 따라 차밭골엔 금방 어둠이 깔려 왔다. 그녀는 한 발자욱 한 발자욱 실개천을 따라 내려갔다. 전날 같으면 강희가 벌써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는 요즘 하루도 빼 놓지 않고 아침을 먹는등 마는등 일자리를 구하려 시내로 나갔다가 어둠이 깔릴 무렵에야 어깨를 축 늘어 뜰이고 돌아 온다.
   요즘 같이 각박한 세상에 더욱이 보증조차 새울 수 없는 고아에게 일자리를 내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하루 종일 헤매다 보면 몸은 허기가 지고 마음은 초조하여 죽고만 싶었다.
   " 아니 추운데 여기까진 왜 나와 있어 ?."
   " 이제 오는 군요. 하도 안 오시길래."
   소영은 그저 눈치만 살필 뿐 취직이 어떻게 되었느냐고는 묻지 않았다.
   강희에게 약간 술 냄새가 났다.
   괴로워서 마셨으리라. 그녀는 자기 때문에 그가 더 고통을 받고 있는 것 같아서 슬펐다.
   " 자기 너무 걱정말아요. 아직 저에게 돈이 좀 있으니까 너무 초조해 하지 말고 우리 천천히 살 방도를 찾아요."
   " 그래, 어서 올라 갑시다. 그렇지 않아도  무엇이 좀 풀릴 듯 하는데. 그 일이 어떨는 지."
   " 그 일이라니요 ?."
   " 택시 운전."
   " 네 ! 택시 운전요 ?."
   적어도 외교관 부인을 꿈꾸었던 그가 택시 운전사의 아내가 되다니. 그것은 너무나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소영은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내색은 할 수 없어서
   " 할 수 없죠. 그거래도."
   그래서 강희에게 조금이나마 삶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었다. 나중에야 어떻게 될 값에 ."
   " 정말 미안해 ! 내 영아에게 실망을 주지 않을 직업을 가지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어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금강원 입구에서였다.
   오늘도 그는 취직 때문에 고등학교 동창 집을 몇 군데 들렸다가 허탕을 치고 오는 길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바지포켙에 두 손을 찌른 채 먼 하늘가를 쳐다보며 온천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데 지나가던 택시 한 대가 갑자기 U 자로 회전을 하더니 그를 앞질러 급 정거를 했다.
   강희는 그냥 지나가라고 손짓을 했다. 혹시 자기가 차를 잡는 줄 알고 세운 것이 아닌가 해서였다.
   그런데 택시는 가지 않고 도어가 열리며
   " 어어이, 니 강희 아이가 ?."
   했다. 그래도 대답이 없자, 택시 운전사는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강희의 앞으로 걸어오며
   " 니, 강희 맞제 ? 야 니 정말 오래간만이다 !."
   그는 손에 낀 흰장갑을 벗으며 악수를 청했다.
   " 근데, 당신은 ?...'
   강희는 손을 내밀어 악수는 받았으나 도무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 임마야, 내다. 만길이."
   그제서야 그는 철없이 낀 색안경을 벗으며 보란듯이 햇빛에 그얼린 얼굴을 내밀었다.
   " 야 그래. 너 정말 만길이로구나 !."
   이제 어른이 되어서일까. 고아원 시절 같았으면 벌써 강희의  뺨에 철썩 하고 소리가 났을 텐데, 놈은 점잖게 악수를 한 후 얼른 자기의 차에 타라고 했다.
   " 어이 타라. 여기서 이랄끼 아이라, 우리 어디 가서 한 잔 하자."
   " 한 잔이라니 ? 운전을 하다 말고."
   "야 운전이고 나팔이고 니 놈을 만났는 데...."
   만길은 반 강제로 강희를 운전대 옆에 밀어 넣었다.
   " 너 정말 이래도 되는 거니 ? 술을 마시고 운전을...."
   " 염려말거라. 요 앞 로타리에 나가면 스피야 천지다."
   그러면서 만길은 차를 돌렸다. 과연 온천 입구 신호대 옆 담벼락 밑에 운전사 차림의 청년 서넛이 화투판을 벌리고 있었다.
   " 야 이 놈아들아. 고마 말아라. 어두어지는데 무슨 지랄이고. 야 ,박군아. 니 이 차 좀 해라. 나는 오늘 저녁에 볼 일이 좀 있다."
   " 예, 형님요. 운전이사 내가 하지요. 근데 오늘 밤에 또 이거 만나는 기요 ?."
   놈은 씨익 웃으며 새끼 손가락을 까닥까닥해 보였다.
   " 야, 촐랑거리지 말고 운전이나 조심해 하거라."
   둘은 택시를 버리고 다시 온천교를 건너서 극장 옆골목에 있는 통술집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꽤 오래 다닌 단골인지 마담이 직접 나와 손님을 맞았다.
   만길에게 오빠, 자기라고 생각나는 대로 불러대는 예쁘장한 아가씨 둘이 한복 차림으로 들어오고 뒤이어 술상이 들어왔다.
   강희는 난생 처음으로 대하는 분위기에 좀 얼떨떨 했으나 술이 몇 잔 들어가고 나니 분위기에 조금 젖어 드는 것 같았다.
   ' 어이 이 가스나야. 안주만 나불나불 죽이지 말고 이 손님한테 술 좀 권해라. 내한테는 정말 귀한 손님인기라. 죽마고우 아이가."
   " 그래 예. 이 분이 오빠 친구라 예."
   그러면서 색시는 강희의 무릎에 올라 앉을 듯 바짝 닦아 앉으며
   " 자기 이 술잔 받으이소 예."
   술잔을 떼기가 무섭게 파적이 강희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민망한 얼굴이 되어 얼른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만길은 자기의 파트너와 주거니 받거니 하더니 어느새 색시의 가슴에 손을 넣고 시시득거리고 있었다.
   " 아이 서방님, 무얼 그렇게 넋나간 사람처럼 그러고 있어요. 저한테도 술 한 잔 주이소예."
   색시는 몸을 비고며 강희 앞으로 빈 잔을 내밀었다.
   벌써 술기운이 도는 지 만길은 이 쪽 사정은 묻지도 않고 그간 자기가 살아온 과거를 늘어 놓았다.
   중학에서 남의 공낙금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퇴학을 당하자, 그는 너무나 억울하여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교무실에 불려갔다가 책가방을 가지려 교실로 돌아왔을 때 왁짜지껄 떠들어대던 반 아이들은 갑자기 쥐죽은 듯 조용해 졌다. 교문을 나서자 그는 정말 죄인이 된 기분이 들어 차마 큰길로 걸어갈 수가 없어서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얼마를 걸었는 지, 그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보수동 산비탈에 있는 천사의 집을 훨씬 지난 대청동 어느 교회 앞이었다. 반쯤 열려 있는 철문 안의 교회는 바깥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조용하고 무시무시할 정도로 장엄했다.
   " 그런데 씨팔, 나는 예수님에게 내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고 위로라도 받을라켔는 데, 거기서도 안 쫓겨났나."
   " 아니 교회에서 기도 하려온 사람을 쫓아 내다니 ?."
   " 하기야 대낮에 책가방을 옆꾸리에 낀 학생이 교회 안을 기웃거리고 있으니까 목사님의 눈에는 농땡이를 친 불량학생으로 보였겠지."
   그래서 하루 종일 용두산 공원에서 책가방을 깔고 앉아 오륙도 위를 나는 갈매기와 고갈산 위에 떠 있는 뭉개구름을 바라보며 하염없이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벤치에 앉아 있는 아베크족에게 껌을 팔고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 나도 껌팔이를 하자.)
   그러나 수중에는 땡전 한 잎 없었다.
   슬픔과 절망과 분노 같은 것을 느끼며 그는 어두워서야 공원을 내려왔다.
   역시 이번에도 뒷골목 길로 하염없이 걸었다.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지나치다가 책가방에 든 책을 꺼내 팔았다.
   그 때의 돈으로 얼마였는 지 기억은 없으나 풀빵 두 개를 사 먹고 이튿 날 새벽, 조간 신문 백 매를 살 수 있었다. 그것을 판 돈으로 낮에는 국제시장에서 검을 받아 팔고, 또 오후에는 석간을 사서 팔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호구지책 뿐이었지 돈이 모이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길을 건너다가 지나가는 트럭에 부딪쳐 사고를 당했다. 이른 새벽이라 거리는 한산했고, 사고를 목격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당황한 운전사 ( 후에 안 일이지만 그는 무면허 차주로 운전 연습을 하느라고 차를 끌고 나왔다고 했다.)는 환자를 차에 싣고 병원으로 가지 않고 거제리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갔다.
   다행히 중상은 아니었다. 골절된 오른 쪽 다리는 접골원에 가서 기브스를 했다. 벗겨진 무럽에는 머큐름이면 족했다. 그래서 차주는 보호자를 만나 합의를 보려고 하였지만 고아에겐 그런 것이 있을리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차주의 집에서 먹고 자며 회복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차주도 그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만길은 거기서 그냥 놀고 먹기도 뭤해서 회복을 기다리는 동안 집안 청소도 해주고, 자동차 수리하는 일도 거들었다.
   이윽고 기부스를 떼는 날이 왔다.
   그것을 떼고 나니 천근 같던 다리가 날아갈 듯 가벼웠다. 그러나 갈곳이 없다. 그간 정이 들었는 지 떠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보상금조로, 장사 밑천을 하라고 주는 살 한 가마 값을 받아 들고 종일 헤매다 그날 밤 다시 차주의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 아니 너 돈이 적어서 그러느냐 ?."
   떠날 때 받은 돈을 도로 내어 밀자 차주는 못마땅한 얼굴로 물었다.
   " 아니라 예."
   " 그럼...?"
   '갈 곳이 없어서...."
   " 그래, 그럼 니 우리차 조수 노릇을 하지 않겠니 ? 나도 진작 그렇게 권하고 싶었다만, 혹시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차주는 거제서야 그가 돌아온 것을 좋아했다.
   " 요즘 세상에 뭐니뭐니 해도  기술이 제일이란다. 먹고 사는 데는 말이다. 너도 차차 기술을 읶혀 면허증이라도 하나 따 봐라. 당장 월급이 얼만데....그가짓 신문팔이 백 년을 해 봐야 무슨 돈이 되겠느냐."
   이래서 만길은 트럭 조수 오 년에 급기야 면허증을 땄다. 그래서 그분이 가지고 있는 택시를 맡아 운전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벌써 삼 년. 이제는 자기의 말마따나 베트랑급이란다.
   " 근데, 니는 요즘 우째 지내노.? 고아원에서 나온지는 오래 됐제 ?."
   그제서야 만길은 강희의 아래 위를 쓱 흘터 보며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 어이, 술 좀 더 가져 온나....자 들어라. 어서.... 오늘 우리 실컷 마셔보자."

   만길은 제법 취해 있었다.


   " 이노무 가시나들아, 술 좀 더 가지고 오라카는 데 뭐하노."
   그는 연방 방바닥에다 대고 빈 주전자를 두들겼다.
   한참 동안 머리를 끄덕이며 강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만길은


   " 뭐라고. 니가 벌써 장가를 들었다고 ?."
   " 장가라고야 할 것 없지만, 난 그 애 때문에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모르겠어.

     그 전처럼 혼자 몸이라면 무슨 고생을 해도 좋겠는 데..."
   " 야 임마야 니, 장군의 딸을 물었으면 출세 길이 훤 하구마는. 야 당장 깔치를 앞세우고 올라 가거라."
   " 그건 안 돼,  그랬다간 당장 다리 몽둥이가 남아나지 않아."
   " 뭐라카노. 니가 꼬신기 아이고, 니 깔치가 꼬신 거 아이가 ?."
   " 그래도 그건 안 돼. 그도 제 집으로 돌아갈 사람이 아니야."
   " 그라먼 그 야단인데. 요세 세상에 취직이 잘 되야 말이지....

     씨팔 더군다나 고아원 출신이라면 순 곤조통으로 아니 원...."


   만길은 그렇게 투들거리며 또 술잔을 내밀었다.


   " 니 너무 걱정마라.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나."

   그러다가 그는 생각난 듯 눈을 크게 뜨며
   ' 근데 참 ! 니 군에 있을 때 차를 몰았다고 했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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