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부여헌(扶餘軒) (17)
북방의 고구려가 수나라와 거듭되는 대전에서 잇달아 승리를 거두는가 하면,
백제는 젊은 군주 부여장의 시대를 맞아 국력을 키우고 오랜 수세에서 탈피하는 동안에
백정왕의 신라는 전조의 위용과 기세가 많이 꺾이고 수그러들어 삼국 가운데 가장 열세인
나라로 전락하였다.
국운이 다한 것이었을까. 법흥, 진흥 양대를 거치며 걷잡을 수 없이 맹렬한 기세로 수백 년 역사의
가야제국을 아우르고 주변국의 성과 영토를 병탄하여 여제(麗濟) 조정을 불안에 떨게 했던 신라가
이제는 거꾸로 걸핏하면 양국의 공격을 받는 판인데,
싸움만 벌어졌다 하면 번번이 패하여 땅과 백성들을 잃기만 할 뿐 근년에 이르러 단 한 번도
제대로 이겨본 경우가 없었다.
물론 일이 그렇게 된 데는 고구려에서 남진파들이 득세했다거나 백제의 국력이 무섭게 신장한
나라 밖의 변화가 없지 않았지만, 가장 큰 책임은 뭐니뭐니 해도 전조의 왕성한 기운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한 백정왕과 신라 조정에 있었다.
사상 초유의 금왕(眞智王) 폐위 사건에 뒤이은 백정왕의 등극과 그의 즉위를 둘러싼 여러 잡음들,
그로 말미암아 위축된 왕권, 태후들의 보이지 않는 알력, 여기에다 일을 잘 결단하지 못하는
왕의 우유부단함이 겹쳐져서 빚어진 일이었다.
왕권이 위축되자 강신(强臣)들이 기세를 부려 초입에는 노리부(弩里夫),
후일에는 왕제 백반의 입지가 제왕보다 높아졌고, 이들의 국정농단이 40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신라 군사들의 매서운 예기 또한 여지없이 꺾이고 정사는 안팎으로 크게 어지러웠다.
임금을 보필하고 국사를 책임진 자들이 급변하는 시류에 현명히 대처하지 못한 것도
나라를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은 번갈아 계속되어 진흥대왕이 서북으로 확보했던 영토가
야금야금 줄어들자 백성들은 급격히 살아갈 의욕을 잃고 불안감과 패배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왕제 백반이 나라의 상신 노릇을 하며 주도한 여러 가지 실정 가운데
특히 그가 맹신한 여수대전(麗隋大戰)의 그릇된 판단은 동서로 대치한 백제의 사기만을
한껏 북돋아주었을 뿐,
가뜩이나 어려운 신라를 치명적인 곤경에 빠뜨렸다.
백반은 양광이 첫번째 요동 정벌에서 패해 대흥으로 도망갔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예견이 빗나갔음을 직관으로 알아차렸지만 체면과 위신이 깎일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한사코 객기를 부리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가, 당나라가 들어서고
양광이 남중국의 강도(江都)로 쫓겨간 다음에야 마지못해 북방 국경에 배치한 군사들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곤 마치 그 모든 일의 책임이 병부령 남승에게 있는 것인 양 떠들어댔는데,
사실 남승은 갑술년(614년)부터 병이 들어 백반이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할 적에는
말 한 마디 대꾸하지 못할 형편이었다.
여전히 일부 귀족 사회에서 신망이 두텁던 백반은 어지러운 민심을 수습하고
또 자신의 실추된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 부득불 몇 가지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공석으로 비워둔 상대등에 칠순을 넘긴 노신 임종(林宗)을 천거하는 한편,
병중에 있는 남승을 폐하고 대신 자신이 총애하던 잡찬 칠숙을 이찬으로 높여
신임 병부령에 추천함으로써 노소 귀족들의 불만을 무마했다.
이는 외견상 모양새를 갖추면서 실제로는 막후에서 여전히 국정을 장악하려는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조치였다.
만일 잠시라도 그가 물러나 있을 때 늙은 왕에게 변고가 생기고 화백회의라도 열린다면
일평생 가꾸어온 꿈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젊어서부터 야심이 오로지 다음 보위에 있었던 백반으로서는
그와 같은 상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인년(618년) 정초,
신라 조정은 상대등 임종의 주도로 내외 관직의 면면을 대폭 교체하였다.
이 역시 명분은 민심 수습과 기강 확립에 있었지만 실상은 자신에게 반감을 가진 자들을
적간하여 축출하려는 백반의 뜻이었다.
그런 뒤에야 백반은 왕에게 표문을 올려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조정 안팎의 따가운 눈총을 당분간 피하면서 일변으론 힘을 비축하고
피아(彼我)를 명징하게 구분하여 훗날에 대비하려는 일석이조의 계산에서 나온 조치였다.
막후로 물러난 백반은 경향 각지에 구종별배(驅從別陪)와 사병(私兵)들을 풀어 백성들 사이에
나도는 여러 가지 소문을 직접 확인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만노군(萬弩郡) 태수 김서현(金舒玄)의 주변에 가야국 망민들이 모여들어
성군작당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백반이 곰곰 꼽아보니 서현이 만노군에 봉직한 지가 어언 20년이나 지나 있었다.
그는 급히 임종과 의논하여 서현을 다른 곳으로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작 임종이 왕을 배알하고 서현의 일을 진언했을 때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백정왕은 종조부인 숙흘종과 고모뻘인 만명부인을 생각하고 또 서현이 너무 오래 외관에 봉직한 것을
들어 그를 금성으로 불러들이고자 했던 것이다.
게다가 덕만이 중이 되고 선화가 백제 왕비가 된 후로 뜻 맞는 말벗 하나 없이 줄곧 외롭게 지내던
천명 공주도 그 사실을 알고는 몇 번이나 마야 왕비를 찾아와 같은 부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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