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부여헌(扶餘軒) (16)
부지런히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고 그릇된 국법과 해이해진 기강을 추스르며 일념으로
국력을 키워온 장왕은 이때에 즈음하여 드디어 내정과 외무에 두루 자신감을 얻었다.
끊임없는 적간과 숙청을 통해 즉위 초 마동 왕자가 보위에 오른 것을 탐탁찮게 여기던
일부 호족들과 전조의 중신들도 말끔히 권세의 중심에서 몰아냈고,
백성들의 살림살이도 한결 나아져 폭넓은 민심을 얻었으며,
시종일관 군역에 대한 대우를 높이고 해마다 젊은 장수들을 선발함으로써 군사력도 크게 증강시켰다.
특히 걸출한 장수들과 수만의 정병을 보유하게 된 일은 장왕에게는 국경을 접한 신라나
북방의 고구려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고,
한발 더 나아가 예전의 강력하고 찬란했던 백제국을 재건하려는 야심에 찬 정복욕까지 불러일으켰다.
그 야심의 시험장이자 전초전이 바로 가잠성이었고, 다시 이번의 모산성이었던 셈인데,
즉위 초에는 수만의 군사를 내고도 얻지 못한 모산성을 고작 백기가 이끄는 8천의 군사로
함락시킨 것이었다.
장왕의 기쁨은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그는 승전보가 날아든 그날로 궁중에서 크게 잔치를 베풀고,
“보라! 까마귀 떼가 성주산을 찾아든 것이 어찌 흉조더냐?
천지신명의 도우심과 불력의 영험함이 드디어 우리 백제 땅에 찾아들고 있다!
대신들은 나라 전체에 이같은 소식을 전파하여 차후 두 번 다시는 근거 없는 흉문이 나돌지 않도록 하라!”
하고 연하여,
“짐은 영물 떼가 나타난 성주산에도 웅장하고 화려한 대찰을 지어 불교의 번창함이
나라의 장래와 더불어 만대에 이르도록 할 것이며, 그 대찰의 이름은 오합사라 할 것이다.
아울러 천하에 교지를 내려 사람마다 가일층 불법을 믿고 성심으로 축건 태자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도록 짐의 뜻을 전하라.
이는 붕어하신 내 아버지 법대왕께서 이 나라 전체를 불국정토로 만드시고자 했던
생전의 유업을 잇는 길이기도 하다!”
하고 공언하였다. 그로부터 수일간 백제의 군신과 백성들은 한덩어리가 되어
모산성의 승리를 자축하였다.
장왕은 이 자리에도 백석을 불러 나라의 장래와 여러 사람의 앞날 점괘를 논하다가 문득,
“전에 춘남이 죽어가면서 하늘에 대고 맹세하기를 장차 반드시 신라의 이름있는 장수로 환생하여
기필코 우리나라를 멸하겠다며 악담과 독설을 퍼부었다 하는데,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하고 물었다.
그때까지 왕의 묻는 말에 한 번도 망설이거나 주저한 일이 없었던 백석이 유독 이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난처한 낯으로 즉답을 하지 않았다.
왕이 이를 더욱 수상히 여기고,
“어째서 우물거리는가?”
하고 다그치자 백석이 한참 만에야 가까스로 입을 열고,
“춘남이 신라국에 환생한 것은 사실입니다.”
듣기에 놀라운 소리를 했다.
“춘남이 죽은 것은 네가 나기도 전의 일인데 어찌하여 그것을 안단 말이냐?”
“본래 사람이 죽으면 그 혼백이 마흔아홉 날 동안 중유(中有)에 유하며 다음 생을 받게 마련입니다.
이때 원한이 깊은 혼백은 이승에서 얻은 한을 지우지 못해 거듭 태어나는 예가 없지 않습니다.
춘남이 생전에 삼명육통(三明六通)한 사람이요,
귀신과 내통하던 처지였으니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신도 집안 사람들한테서 전조의 일을 듣고 나서 섬기던 귀신의 힘을 빌려
신라에 인도 환생한 백부를 비경에서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습니다.”
이미 백석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던 왕은 그의 얘기가 결코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하면 누구로 환생하였단 말인가?”
“그것은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우정 찾으려고 들면 찾지 못할 바도 아니옵니다.”
“환생한 자를 알지 못한다면서 어떻게 찾느냐?”
왕이 궁금해하자 백석이 몇 가지를 말하는데, 만일 춘남이 원한을 품고 환생하였다면
신라 명문의 자손으로 태어난 것이 분명하고, 그 태어난 시기는 춘남이 죽임을 당한 계축년에서
한 해쯤 뒤일 것이며, 따라서 자신과 연배가 비슷한 신라의 화랑 가운데 한 사람일 거라고 추측한 뒤에,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이 만나 그 눈빛을 본다면 능히 가려낼 수 있습니다.”
하고 입찬소리를 하였다.
왕도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춘남이 죽어가며 후생에 기어코 신라의 이름있는 장수가 되어 우리나라를 멸하겠다고 했으니
그가 그토록 무서운 독기를 품고 죽어 환생을 했다면 결코 예사로운 인물은 아닐 것이다.
다행히 너의 재주가 비상하고 또 네가 환생한 춘남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하니 어떤가,
네가 신라국에 남몰래 숨어 들어가서 그를 찾아내어 나라의 우환을 미리 없애지 않겠느냐?
네가 그 일을 무사히 끝마치고 오면 내 너에게 높은 벼슬과 후한 상을 내려 평생 걱정 없이
지내도록 해줄 것이니라.”
왕의 말에 백석이 허리를 굽혀 절하며 대답했다.
“신은 이미 대왕 전하의 하해와 같은 성은을 입었습니다.
어찌 더 높은 벼슬과 상을 바라겠나이까.
성은에 만 분의 일이나마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기필코 그 일을 하겠나이다.”
“아무리 다른 사람으로 환생을 하였기로 춘남은 너의 백부요,
그 혼백은 한사람이다.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지 않겠느냐?”
“본래 생사의 법도란 인정을 초탈하는 법이옵고,
사람은 한번 죽으면 그 인연도 덩달아 소멸하는 것이옵니다.
어찌 전생의 인연으로 후생의 사사로움을 논하겠습니까?
더욱이 그는 우리나라를 멸하려 적국에 태어난 자요,
신은 대왕 전하의 녹봉을 받는 백제의 신하올시다.
반드시 그의 목을 취해 전하의 근심과 나라의 우환을 한꺼번에 없애도록 하겠습니다.”
“너의 말을 들으니 만시름이 절로 사그라지는 듯하구나.”
장왕은 크게 흡족해하였다.
곧 백석에게 노자를 후히 주면서 장차 일을 성공하고 돌아오면 곁에 두고 중히 쓰겠노라 말하니
백석이 그 길로 행장을 꾸려 사비성을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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