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부여헌(扶餘軒) (6)
왕은 분부를 마치자 그 장대하고 기굴한 체구를 이끌고 잠시 내전으로 향했다.
내전에는 외손 춘추가 와서 한껏 재롱을 피우고 있었다.
약관의 나이에 보위에 올라 어언 서른 몇 해,
이미 예순에 가까워 백발이 성성해진 백정왕이었다.
타고난 건강체라 아직은 별문제가 없었지만, 정사를 보는 도중에 자주 피곤함을 느껴
내전을 찾는 일이 부쩍 늘어난 그즈음이었다.
하지만 왕이 내전에 이르렀을 때는 마야 왕비와 춘추 외에 또 한 사람의 손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영흥사의 무량대사였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외손 춘추를 무릎에 앉힌 채로 대사와 긴한 얘기를 나누고 있던 왕비가 왕을 맞이하고
서신 한 통을 건넸다.
“할마마마께서 보내셨습니다.”
왕이 서찰을 읽어보니 백제국의 사신을 해치지 말 것과 이웃 나라 불사에 백공을 보내어
돕는 것은 왕가와 불가에 두루 아름다운 일이며, 무엇보다 종작없는 부허지설로 억울하게 쫓겨나
백제국의 왕비가 된 선화의 일을 깊이 생각하라는 당부의 뜻이 담겨 있었다.
“할머니께서 어찌 백제의 사신이 온 것을 아신단 말이오?”
왕은 왕비에게 안겨 있던 열 살바기 춘추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며 무량에게 물었다.
무량은 두 사신이 영흥사에 들렀다 간 일과 그 가운데 연문진은 전날 용화산 사자사에 거처하던
도승 지명의 제자여서 구연이 있음을 자세히 설명했다.
무량의 말을 듣는 동안 왕은 부여장이 무량과 지명을 통해 금말을 보내왔던 과거지사를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그래 대사의 생각은 어떠하오?”
“소승도 노태후마마의 뜻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무량은 한술 더 떠서 이렇게 덧붙였다.
“만일 대왕께서 허락하신다면 소승이 백공을 인솔해 가서 대찰을 짓는 데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한때 장왕을 향해 끓어올랐던 노여움과 배신감이 부여헌의 말을 들으며 많이 누그러진 데다
사도 태후의 당부와 무량의 말까지 듣고 나자 왕은 드디어 백제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작심했다.
심성이 유순하고 정이 많았던 그는 울면서 쫓겨난 선화의 모습을 두고두고 마음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왕의 결심뿐 아니라 조정 중신들의 중론도 이때쯤은 백제의 화친 제의를 받아들이고 장왕에게
시일과 기회를 주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물론 일길찬 변품을 비롯한 몇몇 사람의 반대가 없었던 바는 아니지만 국론을 주도하는 자는
언제나 진정왕 백반이었고, 그는 애당초 빙부국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백제에 대찰을 지어주자고 주장했던 사람이었다.
특히 고구려의 멸망을 확신하고 북방의 전쟁 결과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는 백반에게
가잠성 따위가 안중에 있을 리 만무했다.
이리하여 장왕의 아우 부여헌은 성을 빼앗은 나라에 들어가서 화를 당하기는커녕
대찰을 지을 백공까지 얻어서 무사히 돌아왔는데,
그 귀국 행차가 무릇 전승군(戰勝軍)의 그것처럼 성대하고 자못 위풍이 있었다.
장왕은 소식을 듣자 만면에 희색이 가득하여,
“이는 내 아우가 아니었으면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다!”
하며 친히 궐 밖까지 나가서 환국하는 부여헌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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