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부여헌(扶餘軒) (8)
그날 밤 눌최는 도비가 퇴궐하기를 기다렸다가 해론을 데리고 들어가서 절하여 뵙고
그 자리에 꿇어앉아 이렇게 물었다.
“아버지께서는 가잠성에서 백제군의 침략을 받아 장렬하게 돌아가신 찬덕 어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도비가 아들의 돌연한 질문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찬덕과 나는 서로 마음이 통하고 뜻이 같아 숭모하여 지낸 지 오래다.
그가 순국한 뒤로 침식을 거르고 절통해하는 아비의 심정을 네가 정녕 몰라서 묻는 게냐?”
“제가 어찌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눌최는 침착하게 대답한 뒤에 말을 이었다.
“그러나 소자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조정의 처사를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지난 무진년에는 고구려에 우명산성(牛鳴山城)을 빼앗기고 이번에는 또 화친을 말하던 백제가
불시에 가잠성을 공격해 성주를 죽이고 성을 가로챘는데 나라에서는 어찌하여 이를 보고만 있는지
모르겠나이다.
자고로 일국의 근본은 영토를 수호하고 제 나라 백성들을 보살피는 데 있고,
고금에 이를 등한히한 나라치고 망하지 않았다는 소리를 들은 바가 없는데,
우리는 근자 10여 년간에 번번이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을 받고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으니
그 연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항차 우리 성을 빼앗고 찬덕 어른을 죽인 백제를 응징하기는커녕
대찰을 짓는 데 쓸 백공까지 딸려 보냈다고 하니 세상에 이런 경우가 둘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라도 성을 지키다 돌아가신 찬덕 어른의 영령이 지하에서나마
편히 눈을 감을 수가 있겠는지요?”
분기에 가득 찬 눌최의 말을 들으며 도비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로서도 왕실의 처사가 여간 불만스럽지 않았던 터에 자식이 빈틈없는 말로 따지고 나오니
대답이 궁한 것은 자명한 노릇이었다.
시종 입맛을 다시던 도비가 눌최와 해론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를 볼 낯이 없구나. 하나 조정의 중론이 그러하고 전하의 뜻이 그러하니 어쩌겠느냐?
지금은 수나라가 백만이 넘는 대병으로 고구려 정벌에 나선 터라 북방의 일이 매우 중요하다.
조정에서는 만일 고구려가 수나라에 망한다면 그 틈을 타서 북진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으므로
섣불리 백제를 응징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고구려가 망하고 나면 반드시 백제를 쳐서 가잠성을 되찾고 찬덕의 원혼을 달랠 것이니
너희는 조정의 처사가 다소 불만스럽더라도 훗날을 지켜보도록 해라.”
“응징을 뒤로 미룬 것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백공을 보낸 것은 또 무슨 까닭입니까?
지금 그 일을 두고 분노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너희에게 이런 말을 하기가 부끄럽다만 나라의 상신이 시원치를 않아
국사를 올바로 보필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전하의 성총도 전만 같지 않고…… 난들 어찌 그처럼 상없는 짓을 반대하지 않았겠느냐?”
도비는 탄식과 함께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지금 뜻 있는 낭도들 사이에선 백반이 물러나고 용춘(龍春) 어른이 상신을 맡아야 한다고들 합니다.
또한 만호 태후가 어서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한둘이 아닙니다.”
“글쎄다. 인명은 재천이니 사람의 천수를 어찌하겠니……”
“아버지.”
“오냐.”
“그런 것은 다 어쩔 수 없다고 쳐도 해론이 지금껏 오갈 데가 없어 중악의 한 암자에서
나뭇짐을 해주고 동냥밥을 얻어먹으며 지냈습니다.
아버지는 성을 지키다가 죽고 아들은 갈 곳이 없어 산야를 떠도니
이런 딱한 노릇이 또 어느 나라에 있겠습니까?”
눌최의 말에 도비가 깜짝 놀랐다.
“저런! 진작에 내 집으로 오지 그랬느냐?
해론은 앞으로 눌최와 함께 내 집에서 지내도록 해라.
내 너를 친자식과 같이 거둘 것이다!”
도비가 눌최의 곁에 말없이 꿇어앉은 해론의 손을 붙잡고 눈물까지 글썽였다.
눌최가 말하기를,
“소자도 처음에는 그렇게 말을 했으나 차차 생각하니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하고서,
“찬덕 어른이 비록 가잠성을 잃었다고는 하나 끝내 투항하지 않고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것은
나라에 큰 귀감이 아닐는지요?”
하고 물었다.
도비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귀감이고말고! 이는 찬덕과 같은 지조가 아니고선 결코 이루지 못했을 아름다운 일로,
전하께서도 비보를 듣고는 용포가 젖도록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셨느니라.”
하자 눌최가 대번 그 말을 받아,
“자고로 귀중한 목숨을 초개같이 버려 절개를 드높이고 만인의 귀감이 된 이에게
그 혈족을 찾아 포상하고 벼슬을 내리는 것은 조정이 해야 할 당연한 일입니다.
특히 해론은 올해 나이 스물로 능히 벼슬을 지낼 만하고 자질과 기개 또한 누구와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만일 나라에서 해론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앞으로 어느 누가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적을 맞아 싸우려 하겠습니까?”
하였다. 도비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너의 생각하는 바가 아비보다 윗길이구나. 그와 같은 뜻이 정녕코 네 마음에서 나왔더란 말이냐?”
장성한 아들을 대견스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이튿날 도비가 어전에 나가 전날 눌최한테 들었던 말에다 자신의 소견까지 덧붙여 진언하고
왕의 처분을 구하니 왕이 당석에서,
“이는 진작에 했어야 할 일로 오히려 그 시기가 늦은 감이 없지 않다.”
하고는 위화부에 명하여 해론에게 전날 찬덕의 벼슬을 그대로 잇게 하고 금성에 집과 전지를 하사하였다. 일부에서는 해론이 약관의 나이로 하루아침에 대내마가 되는 것을 과하다고 말하는 이가 없지 않았는데 왕이 이들을 꾸짖으며,
“나라의 근본을 세우는 일이다! 죽은 찬덕을 기려 그대로 행하라!”
하여 시비가 그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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