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부여헌(扶餘軒) (4)
자그마한 키에 얼굴이 희고 몸이 약해 언뜻 병색마저 도는 듯한 부여헌이
당당한 체구의 연문진을 대동하고 들어와 왕에게 공손히 절한 뒤 권하는 자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연문진이 그런 부여헌의 등뒤에 시립하였다.
왕이 부여헌을 향해,
“짐의 신하들은 두 번에 걸친 백제의 표리부동함을 들어 장왕의 진의를 깊이 의심하고 있으니
그대는 불쾌히 여기지 말고 묻는 말에 답해주기 바라오.”
하자 부여헌은 허리를 굽혀,
“제 어찌 감히 불쾌한 마음을 품겠나이까.
의심을 받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니 신이 아는 데까지 해명을 올리겠나이다.”
하였다. 부여헌을 상대로 제일 먼저 입을 연 이는 대내마 도비였다.
“그대가 정녕 장왕의 아우 부여헌인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너무도 뻔뻔하고 무례한 방문이 아닌가?
형은 군사를 내어 함부로 우리 성을 치고, 성주를 죽이고, 백성들을 모조리 붙잡아갔는데
그 아우는 누가 썼는지도 알 길 없는 글 한 장을 달랑 들고 찾아와 절을 짓는 데 필요한 백공을 청하니
대관절 그대 나라에서는 우리를 뭘로 보고 이따위 해괴한 짓을 벌이는가?
금성에는 모두 바보 천치들만 있다고 여기는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매번 이따위 후안무치한 수작을 벌일 수가 있더란 말인가?”
도비의 노기등등한 말에 부여헌은 잠깐 할말을 잃은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저희 형님께서 대위(大位)에 오르신 지 이제 겨우 10여 년입니다.
그에 반해 사비성의 장수와 신하들 가운데는 수십 년 전부터 나라의 녹봉을 받아온 이들이 수두룩합니다. 게다가 형님께서는 대위에 오르시기 한두 해 전만 하더라도 왕이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으셨던
분입니다.
그분이 경사의 못가에서 마를 캐어 팔던 마동 왕자라는 사실은 여러분도 잘 아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다가 창졸간 하늘의 뜻이 형님께 임하여 나라를 경영하게 되었습니다.
대개 일이 이와 같을 적에 제왕의 위엄이 만조에 고루 미치지 못하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의 일만은
아닌 줄로 압니다.
비록 군왕이 만승의 지위에 있다고는 하나 어찌 반드시 모든 일이 군왕의 뜻대로만 되겠습니까?
두 번에 걸친 백제의 표리부동함은 그로 말미암아 생긴 불가피한 일이지 결코 형님의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형님 내외분께서는 가잠성에 군사를 낸 뒤 밤낮으로 슬퍼하고 한숨짓는 것이 곁에서 뵙기에도
민망할 지경이었습니다.
신은 바로 그와 같은 일을 금성에 알리고 형님 내외분을 대신해 사죄를 하고자 왔습니다.
오죽하면 대찰을 짓고 불덕의 힘을 빌려 양국의 화친과 선린을 이루고자 하시겠습니까?
또한 신라는 저희 왕비마마께서 태어나고 자란 곳입니다.
감히 뉘라서 왕비마마의 본향이요 친정인 신라를 얕잡아볼 수 있겠습니까?”
부여헌의 청산유수와도 같은 깍듯한 대답에 도비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석품이 도비의 뒤를 이어 말했다.
“내 그대의 말을 들어보니 도리어 더욱 의심이 가오. 만일 백제왕이
그토록 가잠성의 일을 마음 아파하고 선화 공주께서 태어나신 신라국을 중히 여긴다면,
그대가 사죄하러 올 적에 하다못해 붙잡아간 성민과 포로가 된 군사는 데리고 왔어야 하지를 않소?
어찌하여 빈손으로 와서 백공까지 청할 수가 있더란 말이오?”
부여헌은 석품을 바라보며 가볍게 목례하고 대답했다.
“저에겐들 어찌 그러한 생각이 없었겠습니까?
하나 사람을 놓아 알아보니 성민들은 모두 가잠성 인근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라
살림의 근거와 터전이 그곳에 있고 또 왕비마마께서 국모로 계시므로 굳이 가잠성을 떠나고자 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왕실에서 이미 가잠성 성민들을 살뜰히 돌보아주라는 추상같은 하명이 있은 마당이라
집집마다 먹을 것이 곳간에 그득하고, 평화롭고 안락하기가 마치 깊은 물 속과 같았습니다.
특히 왕비마마께서는 가잠성 장리(長吏)로 임명된 자를 친히 내전으로 부르시고
아주 옛날 저잣거리에 떠돌던 아이들의 노랫소리 때문에 대궐에서 쫓겨난 중국의 어느 가련한
공주 얘기를 들려주셨는데, 어리석은 신으로서 마마의 깊은 뜻을 다 알지는 못하오나
각별히 선정을 펴달라는 당부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했습니다.”
부여헌의 이 말은 신라 조정의 왕과 신하들을 한꺼번에 침묵시키기에 충분했다.
선화 공주를 내쫓는 데 앞장섰던 백반은 그때까지 덤덤한 표정으로 앉아 얘기를 경청하다가
홀연 안색이 벌개졌고, 그를 따르던 무리들도 자라목을 하며 잔기침을 터뜨렸다.
백제가 가잠성을 공격한 뒤로 심기가 잔뜩 불편했던 백정왕도 그 대목에 이르러서는
막내딸 선화에 대한 한 줄기 회한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가 얄팍한 술수와 세 치 혀로 우리 조정을 마음껏 농락하고 있으나 어찌 내 눈을 속이리요!”
무거운 침묵을 깨고 나선 사람은 백반의 신임을 톡톡히 받고 있는 잡찬 칠숙(柒宿)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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