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부여헌(扶餘軒) (5)
“백제는 지금 우리 군사가 모두 북방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 허를 노려 가잠성을 취한 것이요,
이제 우리가 군사를 일으키려 하자 언변가인 그대를 보내 부러 백공을 청하며 궤변을 늘어놓는 것이오. 소문에 듣기로 장왕은 보위에 오른 직후 나라의 늙은 중신들을 내몰고 젊고 새로운 인물들을 과감히
기용하여 조정의 면모를 일신했다고 하는데, 그런 왕이 신하들에게 휘둘려서 정사를 뜻대로 펴지 못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외다.
내가 보기에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장왕이 세운 계책일 뿐이오.”
진정왕 백반이 나라에서 제일로 치는 책사답게 칠숙의 눈은 과연 예리한 데가 있었다.
그러나 부여헌도 결코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잡찬의 방금 말씀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이 반반쯤 뒤섞여 있습니다.
옳은 것은 형님께서 대위에 올라 조정의 면모를 일신한 것인데,
결국은 그로 말미암아 군왕의 위엄이 더욱 약해졌습니다.
국사를 어찌 젊고 새로운 인물에게만 맡겨둘 수 있겠습니까?
이제 다 흘러간 옛일이니 말씀을 드립니다만,
그때 대신들이 일제히 반발하며 왕비마마의 출신을 거론하고 백정대왕께서 보낸
서신을 문제로 삼는 바람에 한때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곤욕을 치른 것이 사실입니다.
대왕께서 계신 존엄한 어전에서 아뢰기는 대단히 면구스러운 말씀이오나,
지금 저희 형님께서 정사를 마음대로 처결하지 못하는 내면에는 아직도 방금 전에 말씀드린
왕비마마의 고향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저희 백제국엔들 어찌 절을 지을 만한 백공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굳이 신라의 백공을 청하러 온 뜻을 깊이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부여헌은 입을 다물 듯하다가 다시 이렇게 덧붙였다.
“저는 일국의 왕제로 높은 지위와 풍족한 생활을 누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몸이올시다.
하지만 이곳에 사죄사로 온다면 천우신조가 없이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게 뻔합니다.
또한 만일 모종의 흑막이 있다면 굳이 신이 올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미관말직의 달변가 하나를 뽑아 적당한 벼슬을 책봉하여 보내면 그만이올시다.
그럼에도 저는 죽기를 각오하고 사죄사를 자청하였고,
형님 또한 이를 알고도 허락하여 마침내 이곳에 이른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계략이 있고 두 가지 마음이 있겠습니까?
가잠성 대신에 하찮은 저의 목을 베어 분풀이를 하시겠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하오나 지금 두 왕실이 이미 남이 아님에도 서로 믿지 못하고 국경에서 싸움이 끊이지 않는 까닭은
바로 전조의 구원(舊怨) 때문입니다.
신이 죽는 것은 하나도 두렵지 않으나 양국의 앞날을 생각하매
오직 마음이 착잡하고 무거울 따름입니다.”
“하면 그대 나라에서는 언제까지 군왕의 위엄이 서지 않은 것을 핑계로
작금과 같은 행태를 계속하겠단 말인가?
또한 우리는 언제까지 그대들의 침략을 받고도 이를 참아주어야 한단 말인가?”
사람들이 소리나는 곳을 보니 그는 백제의 응징을 주장했던 내마 설담날이었다.
부여헌이 침착한 소리로 대답했다.
“신도 그 점을 딱히 못 박을 수 없어 민망하고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본래 천심을 움직이는 것은 민심이요,
민심을 움직이는 것은 정성이라고 했습니다.
형님께서 양국의 화친을 비는 마음으로 대찰을 짓고,
그곳에 신라의 백공들이 가서 힘써 돕는다면 차차로 옹서지국의 아름다운 전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미구에는 반드시 그렇게 하자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설담날이 입맛을 다시며 물러나자
도저히 울분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무은이 입을 열었다.
“나는 지난 모산성 싸움에서 금쪽같은 아들 귀산과 추항을 잃은 사람이다!
그대가 무슨 말을 하건 나는 백제의 진심을 믿을 수가 없다!
그때 내가 칼날을 마주하고 싸운 장수들은 거의 새파란 젊은이들이요,
그들의 입을 통해 장왕이 직접 군령을 내리고 계략을 세웠다고 들었다!
이제 또다시 동무인 찬덕이 죽었는데 성을 되찾지도 못하고 화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백제의 사정이야 어떻든 먼저 가잠성부터 돌려주고 얘기를 시작해야
사리에 맞는 일이 아닌가?
이쪽에 와서 도리어 그대 나라의 어지러움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본말이 뒤바뀐 것이다!”
급찬 벼슬에 있던 무은은 모산성에서 공을 세운 뒤 이때는 아찬 벼슬로 승차해 있었다.
부여헌이 노여움에 가득 찬 무은을 향해 별안간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공손히 예를 표했다.
“무은 장군의 존함은 우레와 같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저로서는 다시없는 영광입니다.”
뒤이어 그는 차분한 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은 장군께는 입이 열이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본시 전쟁이란 그토록 무섭고 끔찍한 일이올시다.
저의 증조부이신 성대왕께서도 관산성에서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에
무은 장군의 심경이 어떠한 줄은 능히 헤아릴 수가 있습니다.
저는 증조부의 얼굴조차 뵌 일이 없지만 요즘도 누가 그 일을 말하면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실로 무은 장군께는 유구무언입니다.”
부여헌이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혀 사죄의 인사를 올렸다.
무은으로서도 더 뭐라고 나무랄 형편이 아니었다.
그 역시 개운찮은 듯 입맛을 다시며 함구했다.
백정왕은 좌중을 둘러보며,
“더 할 말들이 없는가?”
하고 물었는데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자,
“부여장은 참으로 명민하고 믿음직한 아우를 두었구나.
그대는 그만 영객부로 돌아가서 편히 쉬고 있으라.”
하고 온화한 낯으로 부여헌에게 말했다.
부여헌과 연문진은 왕에게 두 번 절하고 어전을 물러났다.
“이제 사신도 만나보았으니 중론을 모아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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