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6장 부여헌(扶餘軒) (3)

오늘의 쉼터 2014. 8. 24. 17:48

제16장 부여헌(扶餘軒) (3)

 

 

 

 

이 무렵 신라의 대궐에서는 백제를 향해 군사를 내는 문제로 연일 중신들간에 뜨거운 설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차제에 백제를 응징하자는 데는 반대하는 이가 없었지만 단지 그 방법과 시기에서 사람마다

약간 생각이 달랐다.

백제 왕실의 화친 제의를 믿을 수 없으니 대군을 내어 전면전을 벌여야 한다는 이도 없지는 않았으나,

지금은 수나라가 고구려에 대군을 내었으니 우선 동태를 살폈다가 북방을 치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하는 이가 많았다.

특히 상대등 수을부(首乙夫)가 죽은 뒤로 나라의 상신 노릇을 해온 진정왕 백반(伯飯)과

그의 심복인 병부령 남승(南勝)은 나라의 장수와 군사들이 거의 북방에 가 있는 것을 들어

후자의 주장을 선도했다.

“백제가 소적이라면 고구려는 대적입니다.

백제 따위는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휩쓸어버릴 수 있는 하찮은 무리들이지만

북방의 고구려는 다릅니다.

만일 고구려가 수나라와 화친하고 요동의 군사를 모두 남쪽으로 내려 보낸다면 우리나라는

실로 엄청난 환난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조에서는 그간 수나라로 사신을 보내고 걸사표까지 지어 바치며 어떻게든

수나라 황제를 부추기고자 그토록 애쓴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드디어 양제의 마음을 움직여 전대미문의 대병이 이제 막 요동 정벌에 나섰습니다.

소문에 듣자하니 이번에 탁군을 출발한 수나라 군대는 정군만도 백만이 훨씬 넘고,

여기에 공부와 역부들까지 합치면 그 숫자가 무릇 삼사백만에 이른다고 합니다.

싸움에 동원된 군자와 기계는 산더미와 같고, 행군을 하는 데만도 달반이 걸려

그 천지를 집어삼킬 위엄과 기세는 가히 산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바다를

통째로 옮길 지경이라고 합니다.

고구려가 비록 강국이라고는 하나 그 군사가 고작 30만 안팎인데 무슨 수로 열 배가 넘는

수나라를 대적하겠으며, 버틴다고 해봐야 몇 날을 버틸 수 있겠습니까?

이제 고구려가 망하는 것은 필지의 일이며 그 시기는 비조즉석(非朝則夕)이올시다.

우리는 모든 군사를 북방에 대기시키고 기다리다가 요동이 무너지기만 하면

곧장 북진하여 수나라보다 한발 앞서 장안성을 수중에 넣을 것입니다.

일에는 무릇 선후가 있는 법입니다.

백제를 토벌하는 것이야 후에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며,

어쩌면 백제는 스스로 두려워하여 가잠성을 다시 가져와서 전죄를 빌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지금은 가잠성 따위에 연연할 때가 결코 아니올시다.”

백반은 방심하고 있던 백제에 일격을 당한 것이 오랫동안 왕을 보필하고 국정을 도맡아온 처지로

무참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그보다는 수백 년간 솥발처럼 정립(鼎立)해 내려온 삼국의 구도가

마침내 깨어지게 됐다는 사실에 몹시 흥분하고 있었다.

그는 수나라가 군사를 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고구려의 멸망을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긴 이 같은 믿음이 어찌 백반 혼자만의 것이었으랴.

대다수 신라 대신들의 견해도 백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일길찬 변품(邊品)과 대내마 도비(都非), 내마 설담날(薛談捺),

그리고 백제와 벌인 싸움에서 아들 귀산을 잃은 무은(武殷) 등 몇몇이 남방의 향군을 동원해서라도

백제를 쳐서 가잠성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도였고,

찬덕과 친했던 덕활의 손자 어생(漁生)과 후직의 아들 일부(金日夫)가 임지에서 표를 올려

백제의 응징을 진언했을 뿐이었다.

부여헌과 연문진이 장왕의 서신을 가지고 대궐을 찾아온 것은 이럴 무렵이었다.

백제왕의 아우가 왔다는 소식에 신라 조정이 발칵 뒤집힌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입조 전갈을 받고 중신들이 속속 어전으로 몰려들자 왕은 백제왕의 서신을 공개한 뒤에

조정의 중론을 물었다.

“이는 알아볼 것도 없이 부여장의 간교한 술책입니다.

대개 한쪽으로 군사를 내어 성을 빼앗고 다른 한쪽으로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말하는 것은

위계의 기본이올시다.

그는 지난번에도 우리의 모산성(母山城)을 치면서 뒤로는 선화 공주를 내세워 화친을 제의하였는데,

이번에 다시 같은 짓을 되풀이하는 것은 우리 조정을 혼란스럽게 하여 갑론을박과 자중지란을

유도하려는 수작입니다.

마땅히 사신으로 온 자들의 목을 쳐서 이같은 위계가 통하지 않음을 보여주어야 옳습니다.”

가잠성 탈환을 주장했던 일길찬 변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찬 석품(石品)이란 자가 입을 열었다.

“그것도 일리는 있으나 섣불리 속단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

백제왕인들 어찌 우리가 의심한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며,

더욱이 이제 막 가잠성을 빼앗고 성주를 죽이기까지 했는데

그 적지에 다른 사람도 아닌 아우를 사신으로 보냈겠습니까?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더라도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두 사람의 상이한 주장에 노신 설문보가 조용한 어투로 말했다.

“아룁니다. 양쪽 말에 각기 취할 바가 없지 않으니

신 등이 백제의 사신으로 온 자를 불러 진의를 알아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문보의 제의에 모든 신하들이 이구동성으로 찬성하고 이를 들은 백정왕도 그것이 상책일 듯하여

곧 영객부에 머물고 있는 부여헌 일행을 어전으로 데려오도록 하였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6장 부여헌(扶餘軒) (5)  (0) 2014.08.24
제16장 부여헌(扶餘軒) (4)  (0) 2014.08.24
제16장 부여헌(扶餘軒) (2)  (0) 2014.08.24
제16장 부여헌(扶餘軒) (1)  (0) 2014.08.24
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47   (0) 2014.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