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47
화제는 자연히 대흥에 들어선 신왕조에 대한 얘기로 옮아갔다.
문덕은 상기가 송로생의 휘하에 있다가 이세민에게 망해 도망왔다는 말을 들은 터라,
“장안의 사정은 어떠한가? 과연 중원은 당의 천하인가?”
하고 묻자 상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금년에만 해도 왕세충의 군대가 크게 성했고, 소선(蕭銑)이란 자는 형주(荊州)를 점령했다고 합니다.
또한 개주(開州)에서는 염조칙이 반란을 일으켜 기주(夔州)로 진격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 중에 왕세충은 이세민의 심복인 이정(李靖)에게 망했지만 소선이나 염조칙의 세력은
이연과 견주어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여기에다 크고 작은 무리까지 모두 합친다면 세상은 다시 어떻게 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상기의 말을 듣고 문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도 조공을 바치는 얼빠진 자들이 있으니!”
“누가 누구에게 조공을 바친단 말씀입니까?”
“아, 아닐세……”
문덕이 황급히 말머리를 돌리며 팔을 내둘렀다.
일행은 갈석산에서 이틀밤을 묵으며 상기와 팽지만에게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저자의 소문에 팽지만 일패는 범을 부리고 끼니 때마다 인육을 씹는다고 했으나
모조리 헛소문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황노학과 주술에 능하다는 대허 선생이란 사람은 실제로 산채에 있었는데,
그는 체구가 작고 성품이 온순하게 생긴 오십줄의 중늙은이였다.
문덕이 상기한테서 대허 선생을 소개받고,
“선생은 전에 갈석산에 있었던 주괴라는 분을 아십니까?”
하고 묻자 대허가 돌연 크게 반가워하며,
“주괴 선생이 곧 나의 스승입니다!”
하고서 주괴뿐 아니라 단향(段香), 단귀유 부자와도 각별한 인연이 있었음을 술회하였다.
문덕이 그 말을 듣고 유자를 불러 대허에게 절을 올리도록 하며,
“저 아이가 바로 귀유공의 아들이자 저의 양자입니다.”
하니 대허가 흡사 제 친자식을 대하듯이 얼굴과 손을 어루만졌는데,
그날 밤에 은밀히 문덕을 찾아와 말하기를,
“저는 중국 사람이 아니라 금주에 사는 백제 사람이올시다.”
하고서,
“주괴 선생한테서 배운 황노학을 가르칠 마땅한 제자를 찾지 못해 근심하였는데 유자를 보니
그 영특하고 비범한 것이 마치 생전의 귀유를 보는 듯합니다.
장군께서 저를 믿는다면 유자를 한두 해만 저에게 맡겨두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문덕이 대허의 말을 듣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선생을 믿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세상이 흉흉하고 갈석산이 번잡스러우니
그게 마음에 걸릴 뿐입니다.
차라리 선생이 우리와 함께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지금은 낙양과 장안을 둘러보러 가는 길이지만 내년 가을쯤에는 백산(白山:백두산)에 이를 것입니다.
저는 그곳에 작은 암자를 짓고 살기로 이미 마음에 결정을 내렸습니다.
만일 선생께서 같이 가신다면 저는 말벗이 생겨 좋고 유자는 스승을 얻어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권하니 대허가 싫지 않은 얼굴로,
“백산이야 비길 데 없는 영산입지요.”
뜻이 있는 듯이 대답하므로 문덕이 다시,
“지금 저희와 같이 가시든 후일 따로 백산으로 오시든 그것은 선생이 편할 대로 하십시오.”
하였더니,
“그러나 팽지만이 과연 이를 허락할지 의문입니다.”
하며 근심스럽게 말하였다.
본래 대허에게는 청령(淸玲)이라는 아리따운 딸이 하나 있었는데,
팽지만이 청령을 탐내어 여러 차례 구혼을 했지만 당자인 청령이 한사코 이를 마다해
팽지만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던 처지였다.
문덕이 대허한테 내막을 듣고 상기를 불러 의논하니 상기가 웃으며,
“지만이 놈이 두 눈을 뻔히 뜨고 색싯감을 잃게 생겼습니다요.”
하고서,
“그러나 장군의 뜻이 그렇다면 팽지만인들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뜻대로 하십시오.
지만에게는 제가 얘기를 잘하겠습니다.”
하고 순순히 허락하였다.
처음 문덕과 대허가 이야기를 할 때는 명년 가을쯤에 백산에서 만나기로 하였는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청령이 그때 가서 팽지만의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가 없는 데다,
이참에 저도 장안 구경을 하고 싶다며 기를 쓰고 문덕 일행을 따라가겠노라 우겼다.
이리하여 갈석산을 떠날 때는 대허 내외와 청령까지 동행하게 되자
그러잖아도 산채에 머무는 동안 청령의 미색에 넋이 팔렸던 개소문과 유자는
신바람이 나서 어쩔 줄을 몰라하였다.
산을 내려와 대흥으로 가는 길에 유자는 산채에서 들은 중국의 어지러움을 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공사를 파견한 왕실의 처사를 격분해 마지 않았다.
그러자 유자의 격분하는 모습을 말없이 보고 있던 개소문이 한참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고 나서
문덕에게 가만히 말하기를,
“제가 지난 병자년에 대흥에서 몇 달 지낼 때 사귄 사람 가운데
이세민이란 이름을 가진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저보다 나이가 서너 살 위로 성품이 활달하고 제법 사리에 통달하였는데,
서로 사는 곳을 오가며 밤을 지샐 만치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그때 그가 한 말 중에 자신의 아버지가 어느 지방의 유수 벼슬을 지낸다는 소리를
언뜻 들은 기억이 납니다.”
하고는,
“들리는 말에 이연이 태원에서 유수를 지냈다 하고 또 그의 아들 가운데
이세민이란 자가 있다고 하니 어쩌면 제가 아는 이세민과 지금 당을 건국한
이연의 아들이 같은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대흥에 가서 만나보면 알 일이지만 아무래도 제 느낌에는 그런 것만 같습니다.”
돌연한 소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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