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42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
주인의 권하는 말을 듣고 문덕은 개소문과 유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자 두 청년이 다투어 대답하는데,
“천하를 경략하신 호태대왕의 기상을 좇아 이곳까지 이른 우리가
어찌 한낱 도적패 따위를 겁내어 몸을 숨기겠습니까?”
이것은 먼저 입을 연 개소문의 말이었고,
“그깟 한줌도 안 되는 도적패는 소자 혼자서도 능히 제압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저를 믿고 일찍 잠자리에 드십시오.”
유자의 나중 대답은 이러했다.
본래 유자는 머리가 영특하고 나이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식견이 높아
글하는 선비의 자질을 갖춘 아이였다.
그러나 문덕은 유자의 친부인 단귀유의 유지를 받들어 일찍부터 손에 무기를 잡도록 가르쳤다.
시초에 유자는 대개의 선비 재목들이 그러하듯 몸을 움직이기 귀찮아하고 문덕이 몸을 단련하라고
시키는 것들을 잘 하지 않았다.
엇비슷한 또래들이 모여 씨름이나 수박(手薄:권투), 돌팔매질 따위를 하고 놀아도 유자는 늘
뒷전을 맴돌거나 아예 방안에 틀어박혀 글을 읽었다.
보다못한 문덕이 하루는 은밀히 부하 몇 사람을 불러 말하기를,
“너희는 오늘부터 유자를 보거든 그 녀석이 읽고 있는 서책을 빼앗고 안 죽을 만치
뭇매나 조리돌림을 놓아서 못살게 굴어라.”
하고서 궁금히 여기는 자들에게 그 까닭까지 설명하자
모두 고개를 쾌히 끄덕이며,
“염려하지 맙시오.
장군의 뜻을 알았으니 반드시 머리 끝까지 약이 뻗치도록 만들겠습니다.”
하고는 시키는 대로 하였다.
그전까지는 하늘같은 상장군의 아들이라 누구나 자신을 보면 깍듯하고 귀하게만 여기던
성안의 군졸들이 별안간 길을 에워싸고 서책을 빼앗아 찢어놓거나,
이를 나무라면 공공연히 주먹질까지 일삼으니
유자는 의아한 중에도 분통이 터져 어쩔 줄을 몰랐다.
“이놈들이 무엇을 잘못 처먹고 와서 나한테 이러느냐?”
“이놈이라니? 쬐끄만 녀석이 시건방지게 누구더러 이놈 저놈이래?”
“어째서 남이 읽는 서책을 빼앗아 함부로 찢느냔 말이다!”
“내 맘이다, 이놈아!”
그리곤 한꺼번에 네댓 명이 와르르 달려들어 머리통을 쥐어박고 엉덩이에 발길질을 가하니
유자로선 창졸간에 날벼락을 맞은 것만 같았다.
그는 즉시 문덕을 찾아가서 이 사실을 일러바쳤다.
얻어맞은 곳을 내보이며 한동안 입에 거품을 물고 졸개들의 소행을 낱낱이 고하였지만
매사에 자상하던 문덕의 반응은 시큰둥하기 이를 데 없었다.
“네가 무얼 잘못한 게지.”
“소자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늘을 두고 맹세합니다, 아버지!”
“그런데 어째 그런 일이 있었을까?”
“그러니까 소자가 억울해서 이렇게 달려왔지 않습니까!
그놈들을 불러다가 혼구멍을 좀 내주십시오!”
“듣고 보니 억울하기는 하겠다만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니고,
또 너한테 한 일을 가지고 내가 뭐라고 하겠느냐?”
유자는 기가 막혔다.
“자식이 백주 대낮에 아무 까닭도 없이 얻어맞고 왔는데
아버지께서 어찌 자식의 억울함을 밝혀주시지 않는단 말씀입니까?”
“네가 일신의 앞가림도 못하는 어린애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겠지만
너는 이미 장성한 축에 드는 사내 장부다.
혹시 너는 이담에 장가를 들어 처자를 거느리고도
그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달려와 일러바칠 참이냐?”
그리고 을지문덕은 이렇게 덧붙였다.
“가서 서책이나 열심히 뒤져보아라.
혹시 그 속에 너의 억울함을 풀어줄 좋은 묘책이 있는지 아니?”
그 뒤로도 유자는 근 서너 달이나 봉변을 당하고 다녔지만
그때마다 문덕이 하는 말은 늘 매한가지였다.
“이상하구나? 어찌하여 서책 속에 그런 묘책이 없단 말이냐?”
이에 유자는 드디어 힘을 기르고 무예를 배우리라 결심하고 문덕을 찾아갔다.
하지만 반길 줄로만 알았던 문덕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무예를 닦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서책을 읽는 것보다 열 갑절은 힘들고
또 뼈를 깎는 인내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너는 보나마나 사나흘 하다가 힘에 부친다고 그만둘 게 뻔하니
아예 시작을 안하는 것만 못하다.”
급기야 유자는 문덕의 앞에 무릎을 꿇고 여러 날을 간청한 끝에야 가까스로 승낙을 얻어냈다.
한번 뜻을 세우고 덤벼들자 유자의 무술을 연마하고 습득하는 속도는 글을 깨우치고
학문을 터득하는 것만큼이나 빨라서 가르치던 문덕이 은연중에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았다.
“머리 좋은 자가 칼도 잘 쓴다더니 너를 가르쳐보니 정말 그렇구나.”
문덕은 유자에게 자신이 지닌 검법과 창법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가르쳤다.
유자의 무예는 일취월장하여 4년이 지나고 나자 웬만한 장수들과도 겨룰 수 있을 만한 정도가 되었다.
“남자는 무릇 재주보다도 실력이 있어야 한다.
재주는 하늘에서 얻어 나오는 것이지만 실력은 사람이 열심히 구해 세상에서 얻는 것이다.
이제 네가 얻은 실력이라면 어디를 가도 노상참변과 비명횡사 신세는 면할 듯하구나.”
이것이 아들의 성취에 대한 문덕의 칭찬이었다.
그 후로 전쟁이 나는 바람에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자연히 중단되었지만
유자는 혼자서도 나날이 체력을 단련하였고, 무예를 익히는 일을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44 (0) | 2014.08.24 |
---|---|
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43 (0) | 2014.08.24 |
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41 (0) | 2014.08.24 |
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40 (0) | 2014.08.24 |
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39 (0) | 201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