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35

오늘의 쉼터 2014. 8. 24. 09:00

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35

 

 

 

“을지문덕은 고개를 들라.”

대왕의 목소리는 온화하면서도 거역하기 힘든 위엄이 서려 있었다.

문덕이 떨리는 마음으로 고개를 들자 황금빛 갑옷을 입고 마상에 높이 앉은 대왕이 다시 말하기를,

“내 그대의 기상과 충절을 이미 아노라. 하나 행여 자진할 마음 따위는 품지 말라.

그대는 따로 할일이 있다.”

하였다. 문덕은 사뭇 감격하여 눈에 왈칵 눈물이 솟구쳤으나 이내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대왕께 감히 아룁니다. 신 을지문덕은 전날 대왕의 성스러운 유지를 받들어

양광의 백만 군대를 물리쳤고, 내친 김에 고구려의 오랜 우환인 중국을 토평하려 하였나이다.

그리하여 이제 천금과 같은 호기를 얻었사온데 인덕이 박하고 시운이 불우하여 임금과 조정의

반대에 부닥뜨리고 말았습니다.

대왕께서는 일찍이 화북의 맹주로 떠오른 후연을 멸하였고,

거란과 백제를 정벌하였으며, 남으로 왜와 신라를 복종시켜 천하를 경략하셨는데,

불초한 문덕은 수족 같은 부하 장수들의 목숨만 앗았을 뿐 정작 가슴에 품은 뜻은 펴보지도 못한 채

마침내는 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신이 더 무슨 일을 하오리까. 곰곰 생각하자니 신은 살아서 나라와 조정의 앞날에 방해만 될 따름이요,

구차하고 치욕스러운 꼴을 당할 뿐이며, 끝내는 넉 자 이름에 먹칠을 할 일만 남았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음부에서 대왕마마의 마부로나 지내게 해주옵소서!”

마치 피를 토하듯이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문덕의 간하는 바를 묵묵히 듣고 있던 대왕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나라의 백만 군대를 물리친 것처럼 그대가 아니면 누구도 하지 못할 일이 한 가지가 남았다.

후일을 기약하고 물러나 때를 기다리라. 때는 반드시 올 것이며 그 시기는 과히 머잖았느니.”

그리고 대왕은 마상에서 손을 내밀었다. 문덕이 황공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국궁하자

대왕이 말에서 내려 친히 문덕의 손을 붙잡고 이르기를,

“문덕은 용기를 잃지 말라. 과인은 늘 그대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하고서,

“불원간 장송(長松)의 씨를 얻을지니 잘 길러보도록 하라.”

말을 마치자 다시 마상에 올라 무리를 이끌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문덕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대왕의 철렁거리는 말발굽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지고 난 뒤였다.

수상한 꿈이었다. 아니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선명하고 신비로운 체험이었다.

그가 호태대왕의 향기에서 미처 벗어나지 않았을 때 옥문지기가 다급히 와서 문을 열며,

“장군님, 전하께서 찾아 계십니다요.”

하고 연통하였다.

뒤이어 나타난 내관을 따라 문덕이 편전에 이르자

건무왕은 전날 노발대발하던 것과는 달리 안색을 부드럽게 하여 물었다.

“간밤에 잠자리는 불편하지 않으셨는가?”

“불충한 말로 구업(口業)을 지은 자가 어찌 잠자리 탓을 하겠나이까.

신은 본래 태생이 천박하여 어디서건 태평히 지내는 재주가 있습니다.”

문덕의 대답을 들은 왕은 돌연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한참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