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33
북진파들의 항의를 무릅쓰고 당나라로 조공사를 파견한 왕은 곧 만조의 백관들을 거느리고
북방의 졸본(卒本:압록수 북방 환인 지역) 땅으로 행차하여 시조묘(始祖廟:동명성왕릉)에
제사지내고 달포 만에 환궁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의지할 곳을 잃은 북진파들은 자연히 요동으로 을지문덕을 찾아가서
국사를 근심하고 당나라에 조공하는 왕의 처사를 입을 모아 비난했다.
문덕도 기가 막히기는 그들과 매일반이었다.
천하를 호령하던 수나라와도 당당히 맞서 물리친 그로서 아직 내란도 온전히 평정하지 못한
당나라에 조공사를 파견하고 스스로 신하의 예를 갖춘 왕의 뜻은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는 울적하고 답답한 나날을 보내며 찾아오는 사람들과 자주 술을 마시곤 했다.
왕이 요동성으로 사람을 보내어 을지문덕에게 입조할 것을 명한 것은 그럴 무렵이었다.
문덕이 꺼칠한 얼굴로 쌍창워라를 타고 장안성에 이르러 왕을 배알하자
왕은 안색을 부드럽게 하여 말하기를,
“내 이제 수나라를 멸한 논공행상을 하자고 그대를 특별히 불렀네.”
하고서 대뜸 묻기를,
“그대는 지난날 수나라를 물리친 승전의 일등공신이 과연 누구라고 보느냐?”
하였다. 문덕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황공하오나 굳이 일등 공신을 논하자면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창칼을 들어 싸운 30만 이 나라 장정들이 아닌가 합니다.”
문덕의 말에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그 다음으로 논할 이등공신은 누구라고 여기는가?”
“그 다음으로는 오랫동안 편안함을 구하지 않고 견마지로를 다한 요동 8성의 성주들이올시다.”
문덕의 대답을 들은 왕이 다시 물었다.
“그럼 삼등공신은 또 누구인가?”
문덕은 고개를 들어 왕의 얼굴을 한번 올려다보고 나서 대답했다.
“등수를 논할 수는 없으나 전하께서 친히 군사를 이끌고 해포의 수군을 물리치지 않았더라면
일은 어찌 되었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대공을 세우셨습니다.”
그러자 왕의 안색이 돌연 흙빛으로 변했다.
“네 이놈! 네 어찌 나를 이토록 능멸하는가!
요동 8성의 성주라면 너의 부하들이거늘,
하면 내가 너의 졸개들보다 공이 못하더란 말이냐?”
말을 마치자 곧 좌우에 명하여 을지문덕을 옥에 가두라고 명하였다.
실로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얼떨결에 옥에 갇힌 문덕은 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며 나라의 운명과 자신의 앞날을 생각했다.
아끼던 부하 장수들의 목을 치면서까지 뜨겁게 불살랐던 중국 정벌의 꿈이 눈앞에서 한순간에
산산이 부서졌다.
적장의 계책을 한눈에 꿰뚫어보던 을지문덕이었다.
그런 그가 백성들의 영웅으로 떠오른 자신을 제거하려는 왕과 남진파들의 속셈을 모를 턱이 없었다.
무장의 길을 걸을 때부터 이미 일신의 생사 따위는 초월한 그였지만 호태대왕 이후
다시 얻은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친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가슴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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