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36
“과인이 어제 화를 낸 것은 일기가 불순한 탓이었네.
그러하고 공으로 말하자면 그대가 단연 으뜸이지! 내 어찌 그것을 모르겠는가?”
“당치 않습니다. 신에게는 그저 군사들을 배치한 약간의 공이 있었을 뿐입니다.”
문덕이 국궁한 채로 겸손히 대꾸하자 왕이 짐짓 태도를 고쳐 입을 열었다.
“그간 나라에서 입 달린 자들은 모다 그대의 무공이 높은 것을 말하고
마땅히 벼슬과 관작을 높여주어야 한다고 청하였지만 과인이 이를 듣지 못한 척 미루고 있었던 까닭은
진실로 그대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고자 한 때문일세.
그대가 요동의 험지로 떠난 것이 대체 언제인가?
정묘년에 갔으니 올해로 10년하고도 다시 석삼 년이 더 흘렀네.
그토록 북방의 오지에서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아니한 채 보냈으니
어찌 편안히 쉬고 싶은 마음이 없을 것인가?
벼슬과 관작을 높여주는 것도 좋으나 나는 아무래도 그것이 진정으로 그대를 위하는 일은 아닐 듯싶네. 항차 나라가 예전처럼 풍전등화의 신세라면 또 모르되 이제는 그럴 걱정도 없어지지 않았는가?
수나라는 망하고 미치광이 양광은 죽었으며 새로 대륙에 들어선 당나라는
우리 사신을 극진히 환대하고 형제의 나라처럼 각별히 지내자는 뜻을 서신으로 알려왔네.
요컨대 그대와 같은 영웅호걸이 한가롭게 지내도 될 태평한 호시절이 찾아온 것일세.”
겉으로는 문덕을 위하는 척 말하지만 속뜻은 이제 전시가 끝나고 태평지절이 왔으니
물외한인으로 물러나 달라는 얘기였다.
문덕이 그 진의를 알아듣지 못할 턱이 없었다.
“전하의 깊이 살피시고 널리 헤아리심이 그곳까지 이를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실로 성은이 하해와 같습니다.”
“하면 그대의 뜻도 정녕 그러한가?”
왕이 용상에서 무릎을 당겨 앉으며 묻자
문덕은 당하에 엎드린 채 우렁찬 소리로 대답했다.
“신도 사람이온데 어찌 편안하게 쉬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신의 짐작에도 폐하께서 방금 말씀하신 것과 같이 당분간 요동벌에서는
큰 변고나 전란이 없을 것 같습니다.
조용하고 외진 곳에서 한가롭게 글이나 읽으며 지내도록 해주신다면
신으로선 더 바랄 나위가 없겠나이다.”
그것은 문덕의 진심이었다. 세상사에 시시콜콜 마음을 쓰고 사느니
차라리 풍광 좋고 물 맑은 곳에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글이나 읽는다면 그 아니 좋으랴.
왕의 말을 듣기 전만 해도 스스로 그런 뜻은 없었으나 막상 듣고 나서 생각하니
한순간에 가슴이 후련하고 머리가 맑아졌다.
문덕이 의외로 쾌히 동의하자 왕도 크게 기뻐했다.
“내 그대에게 양전과 수백 섬 곡식을 내리고 세포(細布)며 말 서른 필,
노비와 포로 3백 명을 하사하여 평생 동안 걱정 없이 지내도록 할 것이니 그대는 사양하지 말라.
또 한동안 지친 심신을 추스르고 나거든 반드시 과인의 곁으로 돌아와 나라의 병권을 맡도록 하라.”
문덕은 왕의 호의를 정중히 사양했다.
“지금 나라는 궁핍하고 백성들은 굶주려 그 어려움이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신에게 주실 상이 있으면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십시오.
신은 다만 밖에 세워둔 말과 입은 옷 한 벌이면 족합니다.”
“그래도 나라의 일등 공신을 어찌 포상하지 않을 수 있는가?
문덕은 사양치 말고 과인의 호의를 받으라!”
“신은 편안한 곳으로 갈 것이옵니다.
땅과 곡식, 말과 노비는 도리어 짐이 될 뿐입니다.
정 그러시면 세포 두어 필만 받아 가겠습니다.”
왕은 거듭 권하였지만 문덕은 끝내 고개를 저었다.
하는 수 없이 왕은 문덕에게 세포 열 필을 하사하고
임금의 권위를 내세워 따로 비단 닷필과 금 닷냥만을 보탰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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