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34
사실 문덕은 그즈음 요동벌을 찾아오는 북진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수시로 깊은 회의에 빠져들곤 했다. 다시 조공을 하고 중국의 눈치를 보자면 무엇 때문에 그토록 기를 쓰며 사투를 벌였는지,
돌아보면 볼수록 가슴이 터지고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기필코 대륙을 쳐서 토평하겠다던 원대한 포부도 나날이 희미해져가서 이제는 오래전에 꾼 꿈처럼
가물거릴 따름이었다.
하물며 남진파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꼴사납게 설쳐대는 것을 보고 듣는 일도 귀찮기만 했다.
“뜻은 세웠으나 때를 얻지 못하는구나! 시운이 어찌 이리도 불우하더란 말인가!”
백성들의 영웅이 되었다고는 해도 문덕은 5부 출신의 욕살이 아니었기 때문에 임금과 대적할 만한
정치 세력을 갖지 못했다.
제아무리 신망이 두터워도 그는 그저 일개 장수에 불과할 뿐이었다.
문덕은 밤새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오랜 야망을 펼치자면 꼭 한 가지 방법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충절을 중히 여겨온 문덕으로서
역모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역모까지는 아니더라도 북진파의 뜻을 결집하고 5부의 욕살들을 찾아다니며
설득을 해볼까도 생각했으나 그로 말미암아 국론이 분열되고 내란에 휩싸인다면 나라 형편은
더욱 어려워질 게 불을 보듯 뻔했다.
워낙 광활한 중국 대륙이라 호태대왕 때처럼 국력을 한곳으로 결집해 왕과 백성들이
한덩이가 되어야만 정벌의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인데,
싸우기도 전에 내분이 일어난다면 도리어 자멸할 위험마저 있는 일이었다.
새벽녘에는 편전에 이르러 머리를 짓찧으며 피눈물로 충간을 해볼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간 자신이 겪은 건무왕의 인품에다,
공연한 트집을 잡아 자신을 옥에까지 가둔 처사를 감안하면 그 역시 보나마나한 노릇이었다.
임금은 기껏 일개 장수에게 보내는 백성들의 호의와 신망까지도 투기하고 경계하는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구차하게 욕된 목숨을 이어가거나 그게 싫으면 스스로 자결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왕이 터무니없는 일로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려 한다면 차라리 장부답게 목숨을 끊으리라
결심했다.
“아아, 하늘이여.
이 불초한 문덕의 복으로는 정녕코 호태대왕과 같은 성군을 만날 수 없다는 말씀인지요!”
문덕은 하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하다가 동이 완전히 트고 난 뒤에 설핏 잠이 들었다.
꿈에 문덕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추범동과 우민이었다.
나란히 검은 옷을 입고 목에서 뚝뚝 피를 떨구며 나타난 두 장수는 문덕을 향해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한 다음 사뭇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상장군께서는 어찌 이토록 처량한 신세가 되셨습니까?”
“저희는 자나깨나 장군께서 중국 대륙을 토평하여 우리 두 사람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일념으로 바랐거니와 이제 상장군의 상심한 모습을 뵈오니 통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두 장수의 말에 문덕이 지그시 눈을 감고 한참을 앉았다가,
“자네들을 볼 낯이 없네. 나도 조만간 자네들 곁으로 갈 테니 우리 구천서 만나 회포나 푸세.”
하고 침통한 어조로 대답했다.
어디선가 요란한 말발굽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와 동시에 문덕의 앞에 서 있던 두 장수가 갑자기 상체를 땅에 붙이고 부복하였다.
문덕이 기이하게 여기며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자
눈이 부시도록 찬연한 광채와 함께 한 장수가 일군의 무리를 이끌고 나타났는데,
펄럭이는 만색 휘장 위에 ‘영락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永樂 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란
글자가 선명하였다.
순간 문덕은 그가 자신이 그토록 흠모해온 호태대왕의 현신임을 알아차렸다.
“아, 대왕마마……”
문덕이 추범동과 우민을 따라 맨땅에 부복하니
어느새 그의 앞으로 다가온 대왕이 짐짓 다정한 어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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