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25
사본이 지적한 고구려의 형편은 사실이었다.
거대한 수나라의 대병을 상대하여 번번이 이를 물리쳤다는 뿌듯한 자긍심 때문에
별다른 동요 없이 견디고는 있었지만 피폐하고 곤궁한 백성들의 살림은 수나라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대원왕은 나름대로 논리를 갖춘 두 사람의 말을 깊이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본래 평강왕의 태자로 있을 때부터 백성들을 편안하게 돌보는 것을
임금의 최고 덕목으로 꼽아왔던 인물이었다.
이명신의 말보다는 사본의 진언에 더욱 마음이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왕이 선뜻 명을 내리지 못하자 좌장군 건무가 덧붙였다.
“내호아의 수군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지난번처럼 신이 나가서 물리치면 그뿐이지만
대개는 사본의 말을 가납하시는 편이 옳을 듯합니다.
을지문덕을 비롯한 요동성의 성주들도 사람인 이상 어찌 피로하고 고단하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비사성 성주 을사구가 급사하여 성이 함락된 것도 그가 연로한 탓도 있지만
수년째 전쟁을 치르느라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지금 장안성에 와 있는 양제의 사신에게 말하여 곡사정을 보낸다면 빼앗긴 비사성을
분명히 되돌려주겠다는 확답을 받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만 해두면 곡사정 한 사람쯤 희생시키는 것이야 애석하지만 하는 수 없는 일이 아닐는지요.”
그 후로 몇 사람이 더 진언을 하였는데 중론은 대개 사본이나 건무의 그것과 일치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대원왕은 마침내 수나라 사신을 불러 양광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비사성을 되돌려줄 것을 말하였다. 사신이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대왕께 감히 청합니다. 실은 저도 양쪽의 소득 없는 싸움을 막고 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드리는 말씀이온데 대왕께서 우리 황제의 체면을 좀더 세워주신다면 일이 한결 수월하리라 믿습니다.”
“어찌하면 황제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이겠는가?”
“황송하오나 항복을 청하는 서찰을 한 장 쓰시고 이를 사신에게 들려 저와 함께 황제를 뵙도록
해주신다면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겠나이다.”
사신은 왕의 눈치를 살피며 극히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원왕은 사신의 제의를 쾌히 받아들였다. 곡사정은 가지 않으려고 엉버티며 눈물로 호소했지만
대의를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수나라 사신은 곡사정을 줄로 꽁꽁 묶어 배에 태우고 고구려 사신과 함께 양광이 기다리는
요서의 회원진으로 돌아갔다.
이때 항복을 청하는 대원왕의 서찰을 지니고 간 사신은 대로 사본이었다.
양광은 사본을 만나 대원왕이 보낸 항서를 읽자 소리를 내어 웃으며 크게 기꺼워하였다.
그는 당장 지절사를 비사성에 보내어 내호아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회원진의 군사들을 거두어 탁군으로 돌아가니 이때가 갑술년 8월로, 군사를 일으킨 지
달포 만의 일이었다.
양광은 그해 10월, 수도 대흥으로 귀환하였다.
그는 만조의 백관들을 거느린 채 고구려 사신 사본과 압송해간 곡사정을 내세워
태묘(太廟)에 고한 다음 만인이 보는 앞에서 곡사정을 찢어 죽였다.
산더미 같은 기계와 공구들을 앞세운 계유년의 출병을 한순간에 무위로 돌려놓은
배신자 곡사정에 대해 양광은 하늘을 찌를 듯한 분노와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곡사정의 육신을 처참하게 찢어죽이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백관들로 하여금
시육(屍肉)을 씹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여골(餘骨)을 다시 불에 태워 가루로 만들었다.
한동안 광분하던 양광은 사신으로 간 사본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대는 대원왕에게 가서 서둘러 짐에게 입조하여 그간 미뤄온 신하의 예를 다하고
전날 거두었던 봉작을 직접 받아가도록 이르라.
그렇게 한다면 나는 그간에 불충한 죄를 한순간에 사면할 것이나 만일 내 명을 어긴다면
기어코 다시 군사를 일으켜 응징할 것이다!”
사본은 두려움으로 모골이 송연하였으나 대답을 미룰 형편이 아니었다.
즉시 분부대로 전하겠노라 말하고 황급히 귀국하여 대원왕에게 이 사실을 고하기는 하였는데,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사본 자신조차도 전언의 말미에,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망발이오나 다만 그런 소리를 들었기에 아뢰는 것이오니
폐하께서는 조금도 마음 쓸 일이 아니올습니다.”
하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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