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24

오늘의 쉼터 2014. 8. 18. 16:55

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24

 

 

 

 

수나라로 돌아간 양광은 그 후 두 달에 걸쳐 탁군 방면으로 북상 중이던 반란군을 격파하고

그해 8월이 되어서야 간신히 내란을 평정하였다.

하지만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양현감의 반란을 계기로 수나라 각지에서는 나날이 군도가 날뛰고 농민 봉기가 성행하게 되었다.

철군 이후 그해 연말까지 대략 반년 동안에도 수만에 달하는 지방 반란이 10여 건이나 일어났고,

반란군의 규모가 10만을 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황하 하류와 양자강 하류는 말할 것도 없고, 수도 대흥에서 가까운 부풍(扶豊),

멀리로는 광동(廣東)의 창오(蒼梧) 지역에 걸쳐 수나라 전역으로 내란이 확대되어

그들 중에는 벌써 왕(王)이나 제(帝)를 칭하는 경우마저 나타나게 되었다.

내지의 상황이 이와 같았음에도 양광은 기필코 고구려를 치겠다는 집념 하나로

이듬해인 갑술년(614년) 2월에 자신의 세번째 요동 정벌을 선포하였다.

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있었다.

양광은 만조의 백관들을 부르고 계책과 의견을 물어보았지만 이제는 조정의 중신들조차

아무도 앞에 나서서 말하려는 자가 없었다.

양광은 천하에 조서로써 동원령을 내린 뒤 이 해 3월에 탁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위엄은 이미 땅에 떨어졌고 내지의 기강은 풀어질 대로 풀어져서

각지에서 징발한 대부분의 군사들은 시기를 어기고 오지 않았으며,

탁군으로 오는 도중 대오에서 몰래 도망하는 자들도 속출하였다.

양광은 7월이 되도록 기다렸으나 그때까지 모여든 자가 불과 20만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이들만을 데리고 요서의 회원진에 당도했지만 스스로도 자신감을 잃어

감히 요수를 건너지 못하고 미적거렸다.

그럴 무렵 한 가지 낭보가 회원진의 양광에게 날아들었다.

등주를 출발한 내호아의 수군(水軍)이 동제인들의 도움으로 비사성을 급습하여

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이었다.

비사성이 함락된 것은 갑술년에 접어들며부터 자주 노환에 시달리던 성주 을사구가

하필 그 무렵에 천수를 끝마쳤기 때문이요,

이에 성민들이 모두 부모를 잃은 듯이 슬퍼하며 초상을 치르느라 경황이 없을 때

내호아의 군대가 별안간 바다를 에워싸며 습격하여 손쉽게 성을 수중에 넣은 것이었다.

회원진에 머물며 감히 요하를 건너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양광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비록 내호아가 비사성을 수중에 넣었다고는 하나 20만도 못 되는 소군으로 을지문덕이 지키는

요동을 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 남평양의 장안성으로 사신을 보내 전날 우리를 배신하고

도망간 병부시랑 곡사정이란 놈을 돌려달라고 해라.

저들이 응하면 그를 명분으로 삼아 회군할 것이지만, 만일 응하지 않으면 내호아의 군대만으로

남평양을 칠 것이다.”

그의 명을 받은 사신이 금주에서 배를 내어 장안성으로 갔다.

양광의 사신을 만나 말을 들은 대원왕은 곧 조정의 중신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수나라 사정에 달통한 고추대가 이명신이 말했다.

“양광이 군사를 내어 회원진에 머물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세력은 보지 않아도 오합지졸의

소군일 것이 뻔합니다.

지금 중원은 양광에 반대하는 무리들이 하루에도 수십 패씩 나타나 관가를 파괴하고

폭동을 일으킨다 합니다.

양광의 몰락은 이제 금일 저녁이 아니면 명일 아침의 일이올시다.

그는 이같은 내환을 무릅쓰고 회원진에 왔으나 을지문덕이 있는 요동을 칠 자신이 없으니

회군할 명분을 얻고자 우리에게 사신을 보낸 것입니다.

더군다나 곡사정은 우리나라에 와서 수나라의 내지 사정을 낱낱이 일러주었을 뿐 아니라

군사의 규모와 허실을 제보하여 본조에 끼친 공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양광에게 되돌려 보낸다면 그에게는 다만 참혹한 죽음이 있을 뿐이요,

우리는 만방의 우스갯감으로 조롱과 지탄을 받을 뿐입니다.

마땅히 의로움을 택하여 거절해야 옳을 줄 압니다.”

이명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로 사본이 입을 열었다.

“고추대가의 말은 오직 곡사정의 처지만을 염두에 두고 우리나라의 피폐한 실정은 무시한 것이올시다.

지난 무오년 이래로 우리나라는 단 한 해도 전쟁 없이 조용히 지내는 때가 없었습니다.

특히 임신년 이후로는 수나라의 수백, 수십만 대병과 사투를 벌이느라 백성들은 지쳐 있고 창고는

비었으며 부형(父兄)과 장성한 자식들을 전장에 보내고 근심하지 않는 집이 없습니다.

오죽하면 들에 나락이 익어도 이를 거둬들일 일꾼이 없겠습니까?

단지 곡사정 한 사람의 처지를 고려한다면 보내지 않는 것이 도리이나 폐하께서는

우리나라 산곡간의 수많은 백성들을 먼저 걱정하셔야 옳을 줄 압니다.

더구나 양제도 안팎으로 곤궁한 사정을 겪을 만큼 겪고 비로소 우리와 화친할 의사가 있어

사신을 보낸 것이오니 차제에 묵은 원한을 풀고 양국의 우호와 선린을 도모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