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22

오늘의 쉼터 2014. 8. 18. 16:43

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22

 

 

 

 

양광은 전날 패전의 경험을 거울로 삼아 제장들에게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도록 재량권을 주었고,

요하를 건넌 군사들도 부여도와 요동도, 양평도의 세 곳으로만 진격하도록 했다.

이는 옛날 현도군의 요지인 신성과 중앙의 요동성만을 집중 공략하기 위해서였지만 한편으론

이 두 곳이 임신년에 자신들이 잠시 점령했던 곳이기도 해서 다른 곳에 비해 지형에 익숙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양광은 요동 전역을 장악하려 했던 전날의 무리한 계획을 스스로 깨닫고 우선 동북방을 확보한 뒤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려는 전략을 구사했다.

또한 그는 지난번처럼 굳이 요동 지역에만 연연해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우문술과 양의신에게는 각기 5만의 정병을 주어 고구려의 내지로 향하는 길을

열도록 하는 한편 미리 내호아를 불러 수군(水軍)의 동원령을 내리며 말하기를,

“작년에 우리가 패한 이유는 수륙 양군의 손발이 맞지 않은 탓이다.

그때 내호아가 패하여 물러나지 않고 평양성 밖에 진을 치고,

우문술의 제군과 더불어 양쪽으로 성원상접만 하였더라도 살수의 낭패는 없었을 것이다.”

하고서,

“이번에는 미리 신호를 정하고 이를 어김없이 시행하되 반드시 여름이 오기 전에

평양성에 이르러 수공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고 명하였다. 물론 그는 고구려의 성곽들이 높고 견고한 것에 대한 대비도 등한히 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수군은 충제(衝梯), 어량대도(魚梁大道), 8륜누차(八輪樓車)라는 기구들을 제작하여

가지고 갔다.

충제는 새로 조직한 효과라는 군대의 심광(沈光)이란 자가 만든 것으로 기다란 사다리에

밧줄을 매달았는데 그 높이가 물경 15장(丈)이나 되었다.

어량대도는 흙으로 채운 포대 백만여 개를 가지런히 쌓은 것으로 넓이가 30보(步)요,

8륜누차는 여덟 개의 바퀴가 달린 수레인데 자체 높이만 해도 성보다 훨씬 높았다.

이것을 어량대도 위에 고정시키고 수레 위에 궁수들을 배치하면 제아무리 높은 성곽이라 하더라도

성안을 훤히 내려다보며 활을 쏠 수가 있었다.

그밖에도 각군마다 비루(飛樓:이동식 망루), 동(성문을 부수는 기구), 운제(雲梯:구름사다리),

지도(地道:땅굴을 파는 기계) 등을 지급하여 싸움에 활용토록 하였다.

임신년의 대병이 수백만 인마(人馬)로 이루어진 것이었다면, 계유년의 대병은 엄청난 물량의

군자(軍資), 기계(機械), 공구(攻具)들로 형성된 것이었다.

4월 하순에 요하를 건넌 양광은 왕인공에게 5만 군사를 주고 부여도로 진군해 신성을 치도록 한 뒤

자신은 위문승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요동성을 공략했다.

이때 신성의 방비는 양만춘이 맡고 있었으나 요동성은 을지문덕이 지키고 있었다.

피눈물을 머금고 스스로 부하 장수를 참수하면서까지 요동 일대의 기강과 군율을

칼날같이 세우고 있던 을지문덕이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을 리 만무했다.

오히려 문덕은 이번에야말로 양광의 목을 베어 지루한 전란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눈에 불을 켠 채 벼르고 있었다.

요동에서 한판 격돌은 불가피한 셈이었다.

위문승은 양광이 지켜보는 앞에서 충제를 만든 심광과 함께 성문을 향해 달려갔다.

심광은 성문 앞에 도착하자 15장이나 되는 충제의 끝으로 올라가서 성 위에 다다라

단병접전으로 십수 명을 단숨에 해치웠다. 이를 본 고구려 군사들이 다투어 공격하자

심광은 밧줄을 타고 날렵한 원숭이처럼 재빨리 몸을 피했다가 다시 기회를 보아 위로 올라가서

접전하기를 되풀이하였다.

이 바람에 성루에 있던 고구려 군사 수십 명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이를 본 양광은 크게 기뻐하며 당석에서 심광에게 조산대부(朝散大夫)의 벼슬을 내리고 격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