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21

오늘의 쉼터 2014. 8. 18. 16:38

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21

 

 

 

 

한편 전무후무한 대병을 일으키고도 숙원의 대업이었던 요동 정벌에 실패하고

오히려 일패도지하여 수도 대흥으로 쫓겨간 양광의 분함과 노여움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그는 귀경하는 즉시 패전의 책임을 물어 상서우승 유사룡과 황문시랑 배구를 참형(斬刑)하고

우문술을 비롯한 제장들을 모조리 삭탈관직하여 서민(庶民)으로 격하시켰다.

특히 남살수의 패장 우중문은 가혹한 처벌을 당한 뒤 이를 고민하다가 분사(憤死)하였으며,

오로지 형부상서 위문승과 그의 부장 왕인공만이 퇴로에서 행한 결사항전의 기개와 공을 인정받아

가까스로 문책을 모면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패전의 책임을 장수들에게 돌리는 것만으로 양광의 끓어오른 분노와 구겨진 자존심을

달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부제(父帝)를 죽이고 등극한 초기부터 황하(黃河), 회수(淮水), 양자강(揚子江)을

연결하는 대운하를 완공하고, 북방의 유림(楡林:산서성의 경계)에서 이동(以東)에 이르는 대장성을

쌓았으며, 밖으로는 동서 돌궐국과 임읍(林邑:베트남 동해안), 부국의 일부(티베트족이 세운 나라),

유구(流求:대만) 등지의 사방 제국들을 무력으로 정벌하여 천하에 그 위세를 자랑해왔던 터였다.

“고구려는 한줌도 안 되는 오랑캐의 무리들로서 상국을 심히 모만(侮慢)하였다.

나는 지금 바닷물을 빼고 산을 들어 옮기는 일도 마음만 먹으면 능히 해낼 수 있는데 하물며

이 조그만 오랑캐 무리쯤이야!”

양광은 조정의 백관들을 모아놓고 입술을 짓씹으며 연일 이를 갈았다.

이듬해인 계유년(613년) 정월,

그는 드디어 수나라 전역에 동원령을 내리고 군사를 징발하여 탁군으로 모이도록 하는 한편,

백성들을 모아 효과(驍果)라는 군대를 만들고 고성(古城)을 수리해 군량을 저축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의 불타는 복수심과는 무관하게 나라 안의 민심은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대운하를 완공하고 대장성을 쌓는 동안 무리하게 노역에 동원됐던 수나라 백성들은

요동 정벌의 실패를 계기로 그 불만이 극에 달했는데, 양광이 다시 조서를 내려 병력과 군량을

탁군으로 집결시키자 마침내 참고 참았던 울분과 분노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이때는 남살수 대전에서 대패한 공포심이 수나라의 민심을 더욱 흉흉하게 휩쓸고 있었다.

그리하여 산동(山東) 지방의 백성들 사이에서는 ‘요동에 가서 개죽음을 당하지 말자’는

내용의 ‘무향요동랑사가(無向遼東浪死歌)’라는 노래가 널리 유행하였고,

삼오(三吳:항주와 남경 방면) 지역에서는 일부 농민들과 징발된 장정들이 합세하여

조직적인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지난해 천하가 전성했을 무렵에도 고구려 원정길에 올랐던 우리 부형들이 태반은 돌아오지 못했다.

이제는 피폐가 더욱 심한데 또다시 요동으로 간다면 우리는 뼈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삼오 지역 반란군들의 마음이었는데, 여타 지역의 민심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토록 민심이 흉흉하자 조정 중신들은 요동 정벌을 고집하는 양광을 설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융적(戎狄)이 예도를 잃는 것은 신하의 일입니다. 천근의 활은 생쥐 한 마리 때문에 화살을 쏘지

않는 법인데 어찌하여 폐하께서는 만승의 위엄을 저버리고 친히 작은 도적을 대적하려 하십니까?”

좌광록대부 곽영(郭榮)이 양광을 추켜세우며 극간하였지만 양광이 이 말을 들을 리 만무했다.

중신들의 한결같은 만류와 반대를 무릅쓰고 그는 2월에 서민으로 내쫓았던 우문술을 다시 복직시켜

장수로 삼고 위문승, 양의신(楊義臣), 왕인공 등을 앞세워 이번에도 친히 제장들을 거느리고

탁군으로 향했다.

그러나 수나라 전토에서 탁군으로 모여든 군사는 기껏 30여 만에 불과했다.

양광은 이들을 이끌고 3월에 탁군을 출발했으며, 을지문덕이 차지했던 요서 지역

일부의 땅을 회복하고 4월에는 다시금 요하를 건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