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20
문덕은 우민을 향해 다시 일렀다.
“너는 허물을 덮을 만한 공이 있으나 굳이 처벌을 자청한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너의 일은 네 스스로가 판단해 선택하라.”
문덕의 말에 우민은 잠시 묵묵히 앉았다가,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범동과 저는 과거 조의 시절부터 생사고락을 같이하기로 맹약하고
결의주까지 마신 바가 있습니다.
그가 군령을 어긴 죄로 죽임을 당하는 판에 제가 어찌 살기를 바라오리까.
상장군의 말씀대로 범동과 저는 같이 죄를 지었으나 다만 저는 운이 좋아
뒤에 약간의 공을 세웠을 뿐입니다.
범동을 굳이 벌하시겠다는 상장군의 뜻은 저 또한 능히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으니
차제에 저를 같이 벌하여 군법과 군율의 지엄함을 칼날같이 세우고 저에게는
범동과 맺은 약속을 지켜 우리 두 사람의 이름을 아름답게 해주십시오.”
하며 죽음을 자청하였다.
문덕도 거기에 이르러서는 마음이 흔들리는지 잠자코 두 눈을 내리감았다.
양광을 죽이지 못한 것이 더욱 가슴을 치는 대목이었다.
“정녕 그래야 옳겠는가……”
문덕은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윽고 어금니를 깨물며 눈을 부릅뜬 그는 좌우를 둘러보며,
“우민의 소원을 들어주도록 하라.”
하고 말하였다.
이로써 요동성은 승전의 기쁨보다는 걸출한 두 장수를 잃은 슬픔과 비통함에 빠져
침울한 기운만 감돌았다.
문덕은 성옥 뒤편의 공지에서 두 장수가 나란히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황급히 형장으로 달려나가 시신을 붙들고 통곡했다.
날이 저물고 밤이 깊어도 문덕의 통곡은 그치지 않았다.
보다못한 성주들이 문덕을 찾아가서 위로하며 마음을 달래려 하였으나
그럴수록 문덕은 더 슬피 울었다.
승전을 자축하기 위해 요동성에 마련되었던 술상은 사람들이 앉아보지도 못한 채 철거되었고,
들떠 있던 장졸과 성민들도 숙연한 분위기에 빠져들어 삼가고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문덕은 뒷날 아침이 될 때까지 눈이 붓도록 울고 나서 두 장수와 먼저 죽은 고신의 시신을 거두어
북산에 후히 장사지내고 나머지 성주들을 불러 말하였다.
“양광이 살아서 도망갔으므로 전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승전과 패전이 어찌 있겠소?
양광은 서경으로 돌아가는 즉시 다시 군사를 끌어모아 설욕을 하려 들 게 뻔합니다.”
“양광은 백만의 대군을 일으켰다가 패하여 돌아갔습니다.
과연 그가 다시 군사를 모아 쳐들어올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고각상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조심스레 말했다.
개모성의 방고도 각상과 생각이 같았다.
“지난 무오년에 30만 군사로 패하여 돌아간 양견도 요동 정벌은 죽을 때까지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양광이 제아무리 미쳐 날뛴다고는 하나 과연 그럴 힘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문덕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자신 있는 소리로 대답했다.
“양광은 서경으로 돌아가는 즉시 반드시 또 군사를 일으킬 것이오.
이는 그로서도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가 제 아비 양견을 살해하고 제왕의 자리를 찬탈할 적에 으뜸으로 삼은 명분이
바로 요동 정벌이었소.
그런 그가 백만의 군사와 수십만의 역부들을 징발하여 우리를 쳤다가 실패했으니
만일 다시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지는 것이오.
그런 까닭에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기어코 양광의 목을 취하려 했던 것인데
결국 하늘의 뜻을 얻지 못하여 실패하고 말았소.”
“저도 상장군과 의견이 같습니다.
그는 반드시 반년 안에 다시 군사를 일으킬 게 틀림없습니다.”
지모가 뛰어난 백암성 성주 해찬도 문덕의 말에 공감을 표시했다.
문덕이 수심에 가득 찬 얼굴로 성주들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양광은 이번의 경험으로 양측의 허실을 정확히 간파하고
자신의 패인을 교훈으로 삼을 것이 분명하니 다음에 그를 막아내는 일은
결코 이번처럼 쉽지 않을 것이오.
내가 근심하는 바가 바로 그 점입니다.
다음에는 오직 소수의 정병만을 추려 요수를 건너려고 들 것인데,
실은 그것이 더 무섭소.
공들은 단 하루도 시일을 허비할 여유가 없습니다.
서둘러 임지로 돌아가서 손상된 성곽과 시설을 손보고 무기와 기계를 수리하여
군사들과 성민들이 잠시도 한가해하거나 해이한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하시오.”
성주들은 문덕이 제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감수하면서까지 한사코 두 장수를
읍참한 속뜻을 그제야 훤히 알아차렸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요동성 성문을 나서며 성주들은 입을 모아 말하고 한결같이 혀를 내둘렀다.
문덕은 신성과 오골성의 방비를 북부 출신의 양만춘(楊萬春)과 고연수(高延壽)를 뽑아 맡겼는데,
두 사람이 모두 조의(早衣) 출신으로 기개가 출중하고 무예와 지략을 겸전하여 벌써부터
주위에서 명장 재목으로 손꼽히던 젊은 장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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