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 열망(2)
(1171) 열망-3
조철봉은 그야말로 난데없이 덮쳐왔다. 이것은 사건이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아직 감도 못잡겠고 지금 기분은 길을 가는데 어떤 미친 종자가
그냥 머리 위로 물을 쏟아버린 것하고 비슷했다.
날벼락처럼, 그것이 조금 시간이 지나니까 좋은 일 같기는 한데 아직 실감이 안난다.
그래, 조철봉의 말마따나 16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조철봉한테는 미안하지만 이쪽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부동산사무소에서는 이쪽이 먼저 알아보았지만 말이다.
남자들은 다 그런가? 아니면 16년 세월이 지나면서 내 얼굴이 변했기 때문일까?
조철봉이 금방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를 한동안 생각하던 고영민은 머리를 흔들고
잡생각을 떨어내었다.
오전 11시, 애주는 조금 전에 머리핀을 산다면서 2천원을 받아 가게로 갔다.
시골 할머니한테 함께 가는 줄로만 알고 있어서 애주는 오히려 더 좋아하고 있다.
“어떡하지?”
방 구석에 앉아 무릎 위에 턱을 고인 자세로 영민이 혼잣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하면 좋아?”
방안에 울리는 제 목소리를 제 귀로 듣고나서 영민은 어금니를 물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선택만 하면 공주같은 인생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45평 아파트에 풍족한 생활, 내가 내놓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순간 영민은 자신의 볼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고는 숨을 삼켰다.
그러자 곧 눈 주위도 화끈거렸다.
내놓을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몸이다.
조철봉은 아무말 안 했지만 결국은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다시 무릎에 턱을 붙인 영민이 나란히 놓인 자신의 맨발을 바라보았다.
이제 기억이 난다.
16년 전의 그날밤.
여관방에 들어간 조철봉은 왠지 주춤거렸다.
전에는 기회만 엿보던 남자가 그날 밤에는 조심스러워졌다고 할까?
그렇지. 그말도 기억이 난다.
산에 올라가는 건 힘들지만 내려올 때는 허무하다고 했던가?
그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헛소리는 분명한데 너무 심각한 면상을 하고 있어서 기억한다.
그리고 또 있다.
널 아껴주고 싶다고 했지.
항상 발정난 개처럼 침을 흘리던 작자가 갑자기 공자님 행세를 해서 기가 막혔었다.
그날은 주려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었는지 어쩐지 기억나지는 않는데
어쨌든 그날 밤이 지난 지 얼마되지 않아서 조철봉과 헤어진 것 같다.
그때 다른 남자가 생겼으니까.
오준영이든가?
아니면 김동철이든가?
다시 진정이 된 영민이 무릎에서 턱을 떼고는 두 다리를 길게 뻗었다.
명함에 커다란 회사가 여러 개였고 외국에도 사업체가 있는 걸 보니
조철봉은 사업가로 성공한 것 같았다.
그 얼뜨기가 이렇게 되다니.
다시 길게 숨을 뱉은 영민이 혼란스러워진 머리를 저었을 때였다.
휴대전화가 울렸으므로 영민은 서둘러 집어들었다.
발신자 번호를 보자 영민의 표정이 밝아졌다.
유근수의 번호였던 것이다.
“오빠.”
영민은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근수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때 근수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영민아. 너, 가게 나오는 거 안되겠다.”
더듬거리며 말한 근수가 길게 숨을 뱉는 소리가 들렸다.
한숨이었다.
“내가 가게를 그만두게 되었어.
사장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는 너도.”
영민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가 다음 순간 진정을 했다.
바로 조철봉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1172) 열망-4
고영민의 집앞에 선 조철봉의 심사는 복잡했다.
그놈의 갈비집에서 영민을 어떻게 해보려던 지배인놈 목을 오늘자로 잘라버린 것은 일도 아니었다.
갈비집 사장의 친구되는 작자를 시켜 모함을 했기 때문인데 그 내막을 그놈이 안다면 기가 막혀서
죽을 것이었다.
이 세상은 선한 일만 하는 선한 사람도 있지만 더럽고 비열한 짓을 하면서도 잘만 사는 놈들도
많은 것이다.
조철봉은 유근수를 함정속에 처박은 것에 대해서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이제 영민은 궁지에 몰렸다.
그리고 머리만 끄덕인다면 밝고 찬란한 내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심호흡을 한 조철봉은 벨을 눌렀다.
오후 2시반이었다.
“어서오세요.”
곧 문이 열리면서 영민이 조철봉을 맞았는데 뒤에는 애주도 서있다.
“안녕하세요.”
건성이었지만 애주는 인사까지 했다.
그러나 곧 몸을 돌리더니 방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영민이 억지로 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집안으로 들어선 조철봉이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집안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삿짐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다.
“방안에 쌓아 놓았어요.”
조철봉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주던 영민이 외면하고 말했다.
“저기요.”
하고 영민이 불렀으므로 조철봉은 잠자코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머리를 숙인 채 영민이 말을 이었다.
“저, 여기서 그냥 살게 해주시면 안될까요? 그러면.”
“아니, 왜.”
영민의 말을 막은 조철봉이 목소리를 높였는데 의도적이다.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려는 것이다.
“이왕이면 45평짜리 내 빈집으로 옮겨가라니까 그러네. 거기 교육환경도 좋고.”
“싫어요.”
영민이 머리를 저었다.
“여기만 해도 고마운데 그렇게까지.”
“아니, 정말 그렇게 계속 어색하게 할래? 제발 그러지 마.”
“그래도….”
“영민씨가 정 그렇게 하겠다면 일단은 여기서 살아.
하지만 그 아파트는 비워져 있으니까 언제든지 옮겨갈 수 있어.”
조철봉이 벽에 등을 붙이고 앉더니 다시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내가 여기 가끔 들려도 되지?”
“네.”
앞쪽에 앉은 영민이 조철봉의 시선이 닿기전에 서둘러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조철봉은 영민의 숙인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
그러고보니 영민은 얼굴에 옅게 화장을 했다.
입술에 연주황색 루즈도 발랐고 눈썹도 살짝 그렸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슴이 서서히 벅차오른 조철봉은 어깨를 부풀리며 숨을 들이켰다.
“앞으로 날 의지하면 돼.”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했다.
“그렇게 해주면 나도 보람있는 인생을 살게 될거야.”
이번에는 커다랗게 소리내어 숨을 뱉은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사업에 바쁘다 보니까 여자를 잊고 살았어. 가정도 거의 돌보지 않았어.”
“…….”
“웃겠지만 일년이 가깝도록 섹스도 하지 않았어. 그런데.”
조철봉의 목소리에 열기가 띠어졌다.
“영민이를 보고나서 다시 남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야.
감동이 살아났고 가슴이 뛰어. 그리고.”
그리고 철봉이 오랜만에 섰다고 거짓말을 하려다가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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