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 열망(1)
(1169) 열망-1
그 순간 조철봉은 고영민의 두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감동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극은 받았을 것이었다.
근래 들어서 이런 말을 누가 들려 주었겠는가?
한달 월세 35만원을 못내 두달이나 밀려 왔던 영민이다.
월세 보증금 430만원을 갖고 나가 애주는 친정 어머니한테 보내고 전쟁같은 생활고에
시달려야만 할 영민이 아니었던가?
잠깐 긴장을 늦추면 조철봉이 지껄인 몇마디 말은 꿀처럼 달고 오리털처럼 포근하게 들릴 것이었다.
그때 영민이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어금니를 물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머리가 비틀어 올려지면서 당돌한 표정이 되었다.
16년 전에도 그랬다.
조철봉의 가슴이 다시 출렁이며 흔들렸다.
이번에는 그리움이 솟구친 것이다.
16년의 세월, 단 한번의 실수로 어긋난 사랑,
그래서 16년 동안을 잊어야만 했던 여인이여.
“생각해봐.”
정색한 조철봉이 몸까지 바로 세우고 앉으면서 말했다.
“집 바로 비울 필요도 없어. 그러니까 여유를 갖고 생각해도 돼.”
영민이 눈만 깜박였으므로 조철봉은 일어섰다.
오래 주저앉아 꾸물거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할말 다 했으니까 이제는 영민이 그 여운을 음미할 차례가 되었다.
“내가 내일 이 시간쯤 다시 올테니까.”
그러면서 조철봉이 주머니에서 꺼낸 명함을 영민에게 내밀었다.
“내 전화번호야, 그럼.”
엉겁결에 영민이 명함을 받아들었고 조철봉은 애주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애주야, 아저씨가 내일 다시 오마.”
그러나 애주는 힐끗 시선만 주고 나서 인사도 하지 않았다.
외모는 제 엄마를 닮았지만 싸가지가 없는 것은 제 아비 유전자의 영향인 것 같았다.
문 밖으로 나온 조철봉의 뒤로 영민이 따라나왔다.
등 뒤의 문을 닫은 영민이 조철봉을 올려다 보았다.
“애가 제 아빠하고 비슷한 연배의 남자들은 무척 경계를 해요.”
문에 등을 붙이고 선 영민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 아빠가 절 버렸다는 걸 알고 있어서 상처를 많이 받았거든요.”
“저런.”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어깨를 부풀렸다가 긴 숨을 뱉었다.
“애주를 위해서라도 엄마가 옆에 있어 줘야겠구먼.”
그러자 영민의 시선이 내려졌다.
애주를 친정 엄마한테 맡길 작정이었으니까.
박경택이 녹음해온 통화 내용을 조철봉은 직접 들은 것이다.
“이봐, 고영민.”
정색한 조철봉이 바짝 다가섰다.
그러자 영민의 몸에서 옅은 비누냄새와 화장품 냄새가 맡아졌다.
머리 냄새도 났다.
머리 감은 지 꽤 된 것 같았다.
“너하고 나하고 둘이야.”
조철봉이 손가락 끝으로 영민의 가슴께를 가볍게 찌르고는 엄지를 굽혀 제 얼굴을 가리켰다.
“우리, 긴장을 풀자, 응?”
“누가 긴장을 했다고.”
그러면서 영민이 머리를 들어 조철봉을 보았다.
눈이 바로 20센티쯤 앞쪽에 떠 있어서 조철봉은 눈동자에 박힌 제 얼굴을 보았다.
“나한테 기회를 줘, 영민아.”
조철봉이 입술만을 달삭이며 말했지만 복도에는 둘 뿐이어서 선명하게 들렸다.
그러자 영민이 눈을 더 크게 떴고 조철봉은 간절하게 말했다.
“난 16년을 기다렸단다. 영민아.”
(1170) 열망-2
다음날 아침 조철봉은 회사에 출근했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조철봉의 심복이자 후배이며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약점을 잡히고 있는 최갑중이
마침 중국에서 돌아와 있었지만 부르지 않았다.
고영민에 관한 사항은 그 어떤 것도 나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고민이 있으면 나누려는 본능이 있다.
그것이 혼자 삭이는 것보다 낫기도 하다.
병은 알릴수록 낫다는 말도 있으며 털어놓는 사이에 제 스스로가 방법을 찾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은 아니다.
고영민에 대한 모든 것은 그것이 무엇이 되더라도 혼자 품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쁨은 말할 것도 없고 고통이나 수모, 희생, 다 혼자 겪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혼자서 지근지근 씹으면서 견딜 것이었다.
조철봉에게는 영민으로부터 닥치는 모든 것이 새로운 역사가 될 것이었다.
누런 고름이 질금질금 나오던 밤,
달라붙어 안기는 영민에게 산에 올라가는 것은 쉽지만 내려올 때는 허무하지 않으냐는
개소리로 얼버무리면서 엉덩이를 뒤로 빼지 않았는가 말이다.
뭐? 너를 아끼고 싶다고? 개 같은 놈,
파이프만 새지 않았다면 네놈은 개침을 흘리면서 올라탔을 것이다.
만회를 해야만 한다.
결재 서류도 제쳐놓은 조철봉의 얼굴은 굳은 결의에 차 있었다.
이번에 만회하면 내 인생에는 새로운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16년동안 기억에서 지우려고만 했던 내 첫사랑이여,
나는 16년 세월을 뛰어 건너 과거사를 새롭게 작성할 것이다.
그래서 친일파의 누명을 벗을 것이다.
인터폰이 울렸으므로 조철봉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조철봉이 버튼을 눌렀을 때 스피커에서 비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장님, 박경택씨가 오셨습니다.”
“응, 들어오라고 해.”
그러자 곧 용역회사를 운영하는 박경택이 들어서더니 허리를 꺾어 절을 했다.
“앉아.”
눈으로 앞자리를 가리킨 조철봉이 시선을 주면서 기다렸다.
그러자 자리에 앉은 경택이 입을 열었다.
“고영민씨는 모레부터 천안에 있는 식당에서 일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낸 경택이 보면서 말했다.
“역앞에 있는 서울갈비집인데 숙식을 제공받고 월급 85만원을 받는다는 조건입니다.”
“…….”
“서울갈비집은 종업원이 30명 정도 되는 대형 갈비집으로 종업원용 숙소도 있습니다.
현재 숙소에는 조선족출신 여종업원 5명과 한국여자 3명이 들어가 있는데 사장 오덕팔씨는
서울갈비집을 14년째 운영하고 있습니다.”
“…….”
“고영민씨는 2층 경리를 맡기로 되었는데 지배인 유근수가 추천했기 때문입니다.”
힐끗 조철봉의 눈치를 살핀 경택이 말을 이었다.
“유근수는 고영민씨 사촌오빠의 친구인데 서울갈비집에서 9년째 근무하고 있습니다.
나이트클럽 웨이터를 하다가 옮겨왔지요.
지금은 사장 오덕팔의 신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자 폐에 남아있던 숨을 길게 뱉은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그놈의 갈비집에 못나가게 해.”
경택이 눈만 껌벅이자 조철봉의 표정이 굳어졌다.
“갈비집에 불을 지르든지,
사장한테 고영민이 도둑질한 경력이 있다고 찌르든지 해서라도 못가게 하라구.
무슨 수단을 써도 좋아. 어서 서두르라구.”
'소설방 > 강안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89. 열망(3) (0) | 2014.08.17 |
---|---|
288. 열망(2) (0) | 2014.08.17 |
286. 첫사랑(15) (0) | 2014.08.17 |
285. 첫사랑(14) (0) | 2014.08.17 |
284. 첫사랑(13) (0) | 2014.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