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남자

286. 첫사랑(15)

오늘의 쉼터 2014. 8. 17. 19:55

286. 첫사랑(15)

 

 

 

 

(1167) 첫사랑-29 

 

 

“내 잘못도 있죠.”

조철봉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은 영민이 다시 입술끝을 살짝 올리며 웃었다.

“제가 변덕이 심하잖아요? 주부로서의 책임감도 부족했고.”

그랬다.

 

스물한살 때의 영민은 참 잘 변했다.

 

감수성 때문이었을까?

 

지금도 그 분위기가 조금 남아 있지만 울다가 금방 웃었다.

 

예민했다.

 

꽃피는 봄날이었다가 얼음같이 차가운 겨울이 되었다.

 

그것도 몇십분 사이에, 아무일도 아닌걸 가지고. 그런데 그것이 다 매력인 걸 어찌하랴?

 

그럴수록 더 애가 타고 더 간장을 녹이는 걸 어찌하란 말인가?

 

그때 먹었어야 했다.

 

지그시 영민의 콧잔등을 보면서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물었다.

 

그랬다면 눈에 덮였던 동태 껍질도 벗겨졌고 사물이 제대로 보였을 것이다.

 

또 그랬다면 그런 자신을 보고 영민도 함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염병을 할.

그때 영민이 다시 머리를 들었으므로 조철봉의 생각은 끊겼다.

“참 우연이죠? 우리 말예요.”

영민이 신통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조철봉을 보았다.

“이렇게 만나다니요.”

“글쎄 말이야.”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도 맞장구를 쳤다.

 

이제 영민이 현실로 돌아왔으니 더욱 긴장을 해야만 할 것이다.

 

영민이 이제는 시선도 내리지 않고 말했다.

“아까 부동산 사무실에서는 정말 땅바닥으로 꺼져 들어가고 싶었어요.”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영민이 말을 이었다.

“전 철봉씨를 까맣게 잊고 있었거든요.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다가….”

“정말야?”

조철봉이 정색하고 묻자 영민이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네, 정말예요.”

“정말 서운하네. 난 매일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번쯤은 생각했는데.”

“거짓말.”

“정말이야.”

“그럼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알아보지 않았단 말예요?”

“알아보고 싶었지만….”

말을 멈춘 조철봉이 길게 숨을 뱉고 나서 영민을 보았다.

“날 떠난 여자를 찾아서 뭐 하겠어? 상처만 더 받을 뿐이지.”

“떠나긴 누가 떠나요?”

쓴웃음을 지은 영민이 말을 이었다.

“우린 깨끗한 관계였잖아요? 약속 한 것도 없고.”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조철봉이 시선을 내렸다.

 

그렇다,

 

사정 때문에 그건 못했다.

 

약속한 것도 없다.

 

그렇다면 깊은 관계였다면 약속도 만들어졌을 것인가?

 

그때 영민이 물었다.

“철봉씨 아까 말한 것 들으니까 혼자 살고 계시다던데, 왜 그렇죠?”

“왜라니?”

 

하면서 조철봉은 영민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거짓말을 할 때는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보는 것이 조철봉의 습관이다.

 

언젠가 거짓말을 하는 자는 상대방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영민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했다.

“죽었어.”

차분하게 말한 조철봉의 머릿속에 서경윤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서경윤을 죽이는 셈이었다.

 

전에는 자주 죽였는데 요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애를 낳다가 죽었지. 애는 살았고.”

재수없게 영일이를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
 

 

 

 

 

(1168) 첫사랑-30 

 

 

“어머나.”

고영민이 놀란 외침을 뱉더니 눈을 크게 떴다.

 

그 외침을 듣는 순간 조철봉은 목이 메는 느낌을 받으면서 손으로 앞을 가렸다.

 

사타구니를 가린 것이다.

 

전에는 안 그랬다.

 

영민의 목소리나 표정, 동작에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언 16년이 지난 지금, 귀에 익은 영민의 외침 소리를 눈앞에서 듣는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몸의 반응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철봉이 벌떡 곤두선 것을 말한다.

“어떡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영민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그러고는 뒷말을 기다리는 것이다.

 

조철봉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애는 걔 이모가 키우고 있어,

 

그 이모는 이혼을 하고 혼자 살고 있기 때문에 마치 엄마처럼 키워주고 있지.”

졸지에 친모가 이모가 되었지만 잘 짜여진 스토리였다.

 

만에 하나 현장이 발견되더라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또한 서경윤을 다시 살아나게 해서 양심에 걸리는 문제를 조금 해결하는 효과도 있다.

“그런데.”

조철봉이 눈으로 방쪽을 가리켰다.

“애는 수줍음을 타나? 왜 밖으로 나오지도 않지?”

“그래요. 저 애는 낯을 가려.”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선 영민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곧 딸을 데리고 나왔다.

“인사해라, 아저씨다.”

영민이 딸에게 말했다.

“엄마가 대학다닐 때 친구였던 아저씨야.”

그러자 딸이 힐끗 조철봉을 보더니 다시 외면했다.

 

그 눈빛이나 행동이 예전의 영민을 떠오르게 했으므로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얘 이름은 애주예요. 홍애주, 초등학교 5학년인데 벌써.”

이제 영민의 태도는 자연스러워졌다.

 

조철봉한테서 받은 충격으로부터 거의 회복된 것이다.

 

조철봉이 노렸던 것도 이 분위기였다.

 

먼저 경계심이나 자존심, 부끄러움 등이 가셔야 작업에 이롭다.

 

딸 이름이 홍애주이며 지금 학원비가 없어서 학원도 다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조사해 알고 있는 조철봉이었지만 시치미를 뗀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응, 엄마를 닮아서 예쁘구나. 앞으로 아저씨를 자주 보게 될 거다.”

조철봉이 외면하고 있는 애주에게 말했지만 실은 영민한테 하는 소리였다.

“아저씨가 피아노도 사주고 외국 구경도 시켜주마.

 

네가 하고 싶은 건 다 해주지. 왜냐하면.”

정색한 조철봉이 여전히 애주에게 시선을 준 채로 말을 이었다.

“네 엄마가 이 아저씨를 이렇게 만들어준 은인이기 때문이란다.

 

 이 아저씨는 네 엄마를 떠올리면 기운이 났어.

 

뭔가 이루고 나서 네 엄마를 한번 봐야겠다는 꿈을 꿔왔지.”

“거짓말.”

영민이 조철봉의 말을 잘랐지만 얼굴에는 웃음기가 떠 있었다.

“철봉씨, 그동안 많이 변했어요.

 

어쩜 이렇게 능청스러워졌지? 전혀 딴 사람이 된 것 같아.”

“변한 게 아냐. 이게 내 참모습이야.”

여전히 정색한 얼굴로 조철봉이 머리까지 저었다.

“난 이제 놓치지 않겠어. 이렇게 다시 다가온 기회를 또 놓칠 수는 없어.”

영민이 어느덧 긴장한 얼굴로 눈을 크게 떴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신이 다시 만들어주신 기회야.”

 

 

 

<다음 열망 계속>

 

 

'소설방 > 강안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88. 열망(2)  (0) 2014.08.17
287. 열망(1)  (0) 2014.08.17
285. 첫사랑(14)  (0) 2014.08.17
284. 첫사랑(13)  (0) 2014.08.17
283. 첫사랑(12)  (0) 2014.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