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남자

285. 첫사랑(14)

오늘의 쉼터 2014. 8. 17. 19:54

285. 첫사랑(14)

 

 

 

 

(1165) 첫사랑-27 

 

 

조철봉은 스스로 내기를 걸었다.

 

고영민한테 그렇게 말했을 때 받아들일 확률에다 건 것이다.

 

사람은 변한다.

 

제 아무리 자존심이 강한 성품이라도 세파를 겪고 나면 타협하게 되는 것이다.

 

영민은 지쳤다.

 

그래서 손만 뻗으면, 아니, 머리만 끄덕이면 팔자가 변하게 되는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만일 받지 않는다면 영민을 그대로 놔둘 것이다.

 

손도 안대고 놔 둔다는 말이었다.

 

그러고는 앞으로 남은 평생도 고영민과 임질을 같이 떠올리면서 부끄럽게 살아갈 작정이다.

 

그때 영민이 시선을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됐어요. 보증금이나 줘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조철봉은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목이 메었다.

 

그래서 얼른 눈을 치켜뜨고 천장의 형광등을 쏘아 보았는데 두개 중 하나가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그래?”

여전히 천장에 시선을 준 채로 말했던 조철봉이 헛기침을 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주머니를 뒤져 봉투를 꺼낸 조철봉이 영민에게 내밀었다.

 

미리 준비한 5백만원이다.

“여기 있어.”

“고마워요.”

두손으로 봉투를 받은 영민이 2초쯤 망설이더니 봉투 안을 열고 수표를 확인했다.

 

그것을 본 순간 조철봉의 가슴에서 다시 투지가 일어났다.

 

떨어졌던 심장이 다시 붙더니 세차게 고동쳤다.

 

누가 돈의 위력을 당해 내겠는가?

 

 다시 헛기침을 한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방배동에 45평짜리 아파트가 한 채 있는데 비어 있어.

 

내가 부동산 가격이 오를 줄 알고 사놓았다가 이번에 부동산조치로 그냥 놔둔건데.”

이제 조철봉의 목소리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영민은 시선을 내린 채 가만있었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괜찮다면 그 아파트에서 살아도 돼. 애 교육 환경도 좋을테니까.”

“….”

“내가 왜 이러냐고 물을 필요 없어.

 

네 가족 관계는 잘 모르지만 난 지금 혼자 살고 있으니까 내 문제는 신경 안써도 돼.”

“….”

“넌 자존심이 강한 여자였지. 당돌하고 똑똑했지.”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앞쪽의 벽을 향한 채 말했다.

 

그동안 머리를 숙이고 있던 영민의 시선이 세번이나 스치고 지나는 것을 조철봉은 감지하고 있었다.

 

조철봉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우리는 6개월 만나다가 순수하게 헤어졌지만 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때만큼 아름다웠던 시절이 없었어.”

“….”

“솔직히 널 잊고 있었지. 그러다가 일년에 한번,

 

삼년에 한번쯤 널 생각하면 가슴이 평온해지는거야.”

거짓말이다.

 

영민을 떠올릴 때마다 그놈의 위선, 그놈의 임질,

 

아침에 영민과 헤어져 마이신을 사먹으려고 약국으로 뛰어갔던

 

그 추억이 전과 기록처럼 따라붙는 것이다.

 

그것이 지워진다면 몇억원도 아깝지 않다.

 

영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들끊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러나 조철봉은 평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사업체가 몇개 있어. 그래서 말인데 네 남편이나 네 직장을 만들어 줄 수가 있어.

 

내일 당장이라도. 그러니까 남편하고 내가 준 아파트에 살면서 직장에 나가.

 

그냥 받기가 싫다면 그 직장에서 벌어서 갚아.

 

애를 위해서라도 내 제의를 받아 들이는 게 어때?”

이만하면 넘어가지 않는 여자가 있겠는가?
 

 

 

 

 

(1166) 첫사랑-28

 

그때 고영민이 머리를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눈빛은 예전처럼 맑았으나 당당하지는 않다.

 

그때는 이쪽에서 저 시선을 2초도 받아내지 못했다.

 

조철봉은 숨을 멈췄다.

 

눈이 마주친 순간은 3초쯤 되었을까?

 

이번에도 조철봉이 먼저 시선을 내렸지만 가슴이 막혔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것이다.

 

지금은 100초도 견딜 수 있다.

“철봉씨, 부자예요?”

영민이 그렇게 물었을 때 조철봉은 온몸에 찬 기운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머리를 든 조철봉은 영민의 두눈이 흐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물기가 배어 있다.

 

그때 영민이 다시 물었다.

“돈 많이 벌었어요?”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어깨를 펴고 말했다.

“열심히 일했어. 그리고 운도 좋았고.”

정색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자존심 상하면 안돼. 그럴 필요가 없단 말이야. 나는….”

“그만요.”

가볍게 머리를 저은 영민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떠올랐으므로

 

다시 조철봉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영민이 이제는 차분한 표정이 되더니 말했다.

“호의는 고맙게 받겠어요. 저는 이것으로 됐어요.”

방바닥에 내려놓은 봉투를 집어든 영민이 조철봉을 보았다.

“제가 월세 두달치를 안내서 70만원을 까야 하거든요?

 

그런데 500을 그대로 가져 오셨네요.”

“아아.”

“30분만 기다려주시면 제가 돈 바꿔서 드릴게요.”

“아니, 그건….”

“참, 내 정신 좀 봐.”

그제서야 생각이 난 듯 영민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 드시겠어요? 커피하고 녹차가 있는데요.”

“아, 난 커피로….”

“그럼 커피 마시고 계세요. 제가 은행에 가서….”

“아. 서둘지 말고.”

이맛살을 찌푸린 조철봉이 손을 저었다.

“그렇게 안해도 돼. 나중에….”

“그럼 계좌번호를 알려주시면 보내드릴게요.

 

제가 500 받았다는 영수증 써드리고 70을 보내드린다는 각서까지.”

“염병.”

마침내 조철봉의 입에서 평시와 같은 욕설이 터져나왔다.

 

짧고 낮아서 영민은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영민은 주방쪽으로 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욕설 한마디를 전환점으로 조철봉의 컨디션은 회복되었다.

 

말하자면 영민을 카바레나 노래방에서 만난 여자와 대등하게 취급하게 된 것이다.

 

아이는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으므로 조철봉은

 

주방에 서 있는 영민의 뒷모습을 마음 놓고 보았다.

 

허리는 아직도 가늘고 엉덩이는 탱탱했다.

 

서른여섯이면 한창 나이인 것이다.

 

성감이 가장 강렬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민은 순조로운 성생활을 하지 못했다.

 

30대 초반부터 거의 5년 동안 전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까.

 

부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양쪽 다 조금씩 문제를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남편뿐만 아니라 영민 또한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영민이 몸을 돌렸으므로 조철봉은 서둘러 시선을 옮겼다.

“저, 이혼했어요.”

커피잔을 들고 다가오면서 영민이 마치 남의 일처럼 말했다.

“그래서 아이하고 둘이 살아요.”

조철봉은 잠자코 머리만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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