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 열망(3)
(1173) 열망-5
그때 고영민이 일어서더니 방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손에 봉투를 쥐고 있었다.
“저기요.”
조철봉의 앞에 봉투를 내려놓은 영민이 어색한 듯 시선을 돌렸다.
“여기 5백이요. 여기 살도록 해주신다면 보증금은 도로 받아주셔야죠.”
“그래?”
봉투에 시선을 주고난 조철봉이 영민을 똑바로 보았다.
“이쯤 되었으니까 내가 마음 열어놓고 말해도 되겠지?”
영민이 시선을 들었다가 내렸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너, 요즘 어려운 것 같은데 내 앞에서 그만 고집부리고 의지해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말인데, 그 돈은 네가 써.”
“…….”
“그리고 다음달부터 내가 매달 생활비를 보내 줄테니까 그런 줄 알고 있어.”
“…….”
“한달 3백이면 두 식구 사는데 괜찮을까 모르겠네. 그리고.”
조철봉의 목소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차분해졌다.
“내가 중형차 하나 신형으로 뽑아줄게. 마음에 드는 차종하고 색상을 말해.
요즘 사는데 차는 있어야겠더라.”
“…….”
“답답할 때 애 데리고 맑은 공기나 마시러 교외로 나가고 관광지 같은데 다녀오면 기분이 풀려.”
“…….”
“시간이 지나서 애주하고 조금 친해진다면 셋이 외국에 다녀도 좋고.
난 한 달에 절반은 나가 있으니까.”
“…….”
“내가 돈 벌어서 이런데 쓰지 무슨 일에 쓰겠어?
이게 바로 돈 번 보람이지 뭐겠어?”
영민은 시선을 내린 채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지만 조철봉의 기백은 하늘로 솟구쳤다.
제 말마따나 사나이가 돈 벌어서 이런 때 생색내지 않으면 언제 내겠는가?
지금처럼 돈 번 것에 대한 자부심을 느껴본 때가 언제 또 있었던가?
영민의 입장을 이쪽에서 측량해봐도 그렇다.
어떤 덜 떨어진 이혼녀가 이런 제의를 거절하겠는가?
자존심? 자존심 좋아하네. 만일 이런 제의를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고 거절한다면
그 ×은 인간이 아닐 것이다.
돈 대신 바나나를 좋아하는 침팬지라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일단 연립주택에 눌러 살게 해달라고 조철봉에게 손을 내민 이상 영민은
그것이 진흙 뻘이든지 젖과 꿀이 흐르는 강이든지 간에 한쪽 발을 넣은 상태였다.
한쪽 발은 넣고나서 다른쪽 발은 딴데를 짚는다?
그건 위선자다.
그런 성품이라면 상대하기 골치 아픈 부류니 냉큼 손을 떼는 것이 낫다.
영민이 아직 시선도 들지 않았지만 조철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빚쟁이도 아닌데 바로 대답을 독촉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어떻게 금방 네, 하고 대답을 하겠는가?
침묵은 곧 긍정이나 같다.
“참, 나, 내일 아침에 중국에 가서 며칠 있다가 와.”
조철봉이 생각난 듯 말했으므로 따라 일어서던 영민과 시선이 부딪쳤다.
“내 명함에 중국 공장 전화번호도 적혀 있으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그러고는 조철봉이 방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애주야, 아저씨 간다.”
그러자 영민이 몸을 돌리더니 애주를 불렀다.
애주가 방문을 열고 나왔을 때 조철봉도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영민이 거부하리라고 예상하지도 않았지만 거부할 여유도 안주었다.
그리고 이번 기회를 자연스럽게 놓쳤으니 영민도 안도할 것이었다.
(1174) 열망-6
그날 저녁 조철봉은 이영철을 불러 저녁과 함께 술을 마셨다.
이영철은 조철봉하고 고등학교와 대학 동창으로 옛말로 말하면 죽마고우이다.
그러나 소싯적 친구가 나이들어서도 그때처럼 자주 어울리게 되지는 못한다.
각각 교육의 정도부터 성장 과정, 사회생활에서의 수준, 재력의 차이 따위가 부각되면서
친했던 친구가 떨어지고 동창인줄도 몰랐던 친구하고 친해지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영철은 건설회사 부장인데다 재산 축적을 잘해서 친구들 사이의 소문을 들으면
아파트가 5채에 땅이 수만평이나 되어서 100억이 넘는 재산가라고 했다.
그러나 본인은 질색을 하고 부인을 했는데 차도 15년된 똥차를 모는데다 지갑에
카드는 물론 없고 현금 2만원 이상을 넣고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조철봉도 본인의 말을 믿었었는데 2년쯤 전에서야 그것이 새빨간 거짓말인것을 알게 되었다.
영철이 장인상을 당했다고 해서 찾아갔다가 안면이 있던 영철의 처남한테서 내막을 들은 것이다.
영철은 친구들이 말했던 이상의 재산가였다.
거기에다 와이프가 장인한테서 물려받은 수만평의 땅까지 보태면 수백억이 되었다.
영철은 장인의 땅 문제로 처남들과 소송중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조철봉도 영철과 거리를 두었다.
한마디로 재수없는 놈이었던 것이다.
수백억 재산가였으면서 15년된 똥차 타고 다니는건 괜찮다.
그러나 영철은 지금까지 한번도 술값은 커녕 밥값을 내본적도 없는 것이다.
한마디 더 보태면 거지같은 놈이었다.
그런데 오늘 조철봉은 다시 영철을 불러 내었다.
아직도 영문을 모르는 영철은 반색을 하면서 내달려 왔는데 오늘도 얼굴이 반지르르 했다.
만나면 꼭 룸살롱이나 나이트로 데려갔으니 여자들한테 잘 보이려고 조철봉과 약속을 하면
꼭 이발소나 사우나에 들렸다가 나오는 것이 놈의 버릇이었다.
물론 그것만 제 돈을 낸다.
“그런데 갑자기 웬일이냐?”
소주잔을 든 영철이 팔목시계를 들여다보는 시늉을 하면서 또 물었다.
저녁 8시반이었다.
놈이 시계를 보는 시늉을 하는 이유는 이렇게 일식집에서 귀중한 밤 시간을 때우는 것은
아깝지 않으냐는 표현이었다.
일찍 예약을 하지 않으면 룸살롱의 예쁜 아가씨는 다 놓치니까,
조철봉은 소주잔을 들고 한모금에 술을 삼켰다.
그러고는 영철의 반쯤 대머리가 된 이마를 노려보았다.
“너, 고영민 알지?”
그러나 영철이 눈을 가늘게 떴다.
놈을 2년만에 불러낸 이유는 이것이다.
대학시절에는 이놈과 아침 저녁으로 붙어다녔는데 둘 다 돈이 없었다.
그래서 이놈이 그런 놈이 될줄은 예상하지도 못했다.
“고영민?”
하면서 영철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때, 고영민과의 사연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놈이 이놈인 것이다.
이놈한테 임질 때문에 먹지 못했다는 이야기만 빼고 다 해주었다.
그리고 영민이 떨어져 나갔을때 이놈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찾아가 이유를 물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간단했다. 싫어서 떠났다고 했다.
“아아.”
하고 영철이 탄성을 뱉었으므로 조철봉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놈의 머리는 좋다.
공부도 꽤 잘했다.
“그 고영민 말이냐? 그 기집애?”
하고 묻는걸 보면 놈은 제대로 짚었다.
16년이나 지났는데,
그냥 이름 석자만 듣고서도,
조철봉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래, 그 고영민이다.”
“걔가 왜? 만났어?”
불쑥 영철이 그렇게 묻자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이놈한테 그대로 말해주면 안된다.
'소설방 > 강안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91. 열망(5) (0) | 2014.08.17 |
---|---|
290. 열망(4) (0) | 2014.08.17 |
288. 열망(2) (0) | 2014.08.17 |
287. 열망(1) (0) | 2014.08.17 |
286. 첫사랑(15) (0) | 2014.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