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14
본래 을지문덕에게는 양광의 대병을 물리칠 3차에 걸친 계획이 있었다.
그 첫째가 요동에서 시일을 끄는 것이었고,
두번째가 이들을 내지로 유인하여 남살수에서 수장(水葬)시키는 것이었으며,
도망하는 양광을 뒤쫓아 요하와 북살수에서 섬멸하고 내친 김에 서경 대흥까지
밀어붙여 아예 중국 대륙 전체를 토평하겠다는 것이 마지막 계획이었다.
문덕은 만일 양광이 살아서 돌아간다면 그의 성격과 됨됨이로 미루어 기필코
다시 군사를 내어 설욕전을 펼치리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나라의 오랜 근심을 뿌리째 없애고 후일을 편안히 하자면 차제에 반드시
양광을 사로잡거나 죽여야 했고, 그것이 성사되고 나면 이긴 여세를 몰아
수나라 도성인 대흥을 쳐서 대륙을 수중에 넣는 것쯤은 문제도 아닐 것 같았다.
수나라의 국력은 그야말로 온통 요동에 쏠려 있었기 때문에 수도 대흥이 비어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수백만 군사를 동원한 양광이 패전하였다면 그 사실만 가지고도 어렵잖게
중원을 평정할 수 있을 것이었으며, 아들이나 형제를 잃은 수나라 방방곡곡의 흉흉한 민심을
감안하면 양광이 망하였다고 크게 저항할 세력도 없을 게 분명했다.
중국은 어차피 수많은 인종과 종족들이 뒤섞인 어지러운 곳이었다.
문덕은 처음에 돌궐을 설득하여 협공할 생각까지 품었지만 시일이 흐르면서 혼자서도
능히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해 그만두었을 정도로 자신에 차 있었다.
그는 이때야말로 수나라를 아우르고 중원의 광활한 지역을 고구려의 속토로 삼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보았다.
이것이 고구려 장군 을지문덕의 원대한 포부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이 포부를 실현시킬 만한 치밀한 계책과 무엇보다도 20만이 넘는
조의(早衣) 출신 맹졸들이 요동 8성에 구름처럼 운집해 있었다.
이와 같은 문덕의 계획은 두번째까지만 해도 한 치의 차질도 없이 현실로 나타났다.
이제 남은 일은 패주하는 적군을 뒤쫓아 요하와 북살수에서 모조리 소탕하고 사로잡은
양광을 앞세워 대흥으로 진격하는 것뿐이었다.
물론 그에 대한 계책은 사전에 이미 마련하여 요동 각 성의 성주들에게 지시해둔 터였으므로
그는 우문술과 우중문 일행이 압록수를 빠져나가는 즉시 우민을 데리고 요동성으로 달려왔다.
내지에 비를 뿌리던 장마구름은 아직 요동에는 이르지 않고 있었다.
한데 문덕이 막상 요동성에 당도해보니 태산같이 믿었던 요동성 성루에는 난데없는
수군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고, 성문을 지키는 군사들도 모두 수나라 복색을 하고 있었다.
문덕의 계책이 처음으로 어긋나는 순간이었다.
“대체 저것이 어찌 된 일이냐?”
문덕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요동성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면 성곽의 형세를 이용해 진법을 구사하려는
그의 계책은 근본부터 심대한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요동성과 안시성은 온전해야 하거늘 이런 낭패가 어디 있단 말이냐!”
그는 우민을 데리고 황급히 요동성에서 가까운 안시성으로 향했다.
다행히 안시성은 멀쩡했다.
문덕이 성안으로 들어서자 그때쯤 북살수에 가 있어야 할 고각상이 맨발로 달려나오며
문덕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문덕은 고각상과 마주앉자 북살수로 떠나지 않은 까닭부터 물었다.
“요동성이 적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성을 비우기가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잖아도 어째야 좋을지를 몰라 밤잠을 설쳐가며 오로지 장군이 오시기만을 학수고대하였는데,
이제 장군께서 오셨으니 성을 맡기고 군령대로 따르겠습니다.
역부들은 이미 징발해두었으므로 비사성에서 배를 타고 금주로 간다면 사나흘 안에 강물을 막고
능히 수중보를 설치할 수 있을 겁니다.”
각상의 대답은 과연 문덕이 짐작했던 대로였다.
문덕은 비로소 요동성의 일을 물었다. 이에 각상이 매우 침울한 얼굴로 문덕이 없는 동안
요동성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대강 설명했다.
“요동성이 망하고 고신이 죽은 것은 불과 닷새 전의 일로, 이는 모다 고신의 첩으로 있던
우화(禹花)라는 거란족 계집 때문이올시다.
그 계집이 성밖의 수군과 내통하여 고신을 몰래 독살하고 그 공으로 지금은 성을 차지한
장근의 노리개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각상의 설명하는 말을 듣고 나자 문덕은 눈을 감고 주먹을 불끈 쥐며 크게 통탄했다.
“아, 이는 나의 불찰이다! 고신을 죽인 사람은 그 계집이 아니라 바로 나다!”
영문을 알지 못하던 고각상이 조심스레 까닭을 물었다.
“수년 전 내가 요동에 처음 왔을 때 고신의 실덕과 악행이 성안에 파다하여
아무도 그를 좋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요동성에 이르러 사람을 살펴보니 고신은 비록 악덕과 조명이 자자하다고는 하나
그 부모를 섬기고 자식들을 살뜰히 보살피는 것이 마음만 고치면 능히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이요,
고신의 책사인 노가라는 늙은이는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딸을 팔아먹는 자로,
이런 위인은 그 근본을 믿기 어려웠다.
게다가 고신을 나쁜 길로 인도하여 그 실덕과 악행의 팔구 할이 바로 노가한테서 비롯된 것이라
내가 취한 것을 핑계로 노가의 목을 벤 일이 있었다.
바로 그 노가가 거란족 출신이며, 그의 딸이 우화라는 계집이니,
이 어찌 나의 불찰이 아닌가!”
문덕이 지나치게 상심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각상이,
“그것이 어찌 반드시 장군의 불찰이겠습니까.
굳이 따지자면 수신제가에 실패한 고신의 불찰이올시다.”
하며 위로하자 문덕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가 노가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 딸이 고신을 배신했을 리 없고,
만일 노가를 반드시 죽여야 했다면 그 딸을 함께 죽여 후환을 없애거나
적어도 고신에게서 멀리 떼어놨어야 옳았다.
내 평시만 같았어도 분명히 그랬을 테지만 정신이 온통 전쟁에만 쏠려 있어
이를 등한히 했더니 결국은 오늘과 같은 참변을 당하고 말았구나!
아아, 고신은 내가 죽인 것이나 진배없다!”
하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성격이 괄괄하고 호방한 각상은 문덕이 안시성에 있을 때 역적으로 몰려 죽은
단귀유의 아들을 흔쾌히 데려다 양자로 삼는 것을 보고 한 차례 감동하였으나
이때 또 한번 가슴이 찡했다.
“상장군께서는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허락만 내리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군사들을 이끌고 요동성을 공격하여 우화라는
그 계집년을 갈가리 찢어죽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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