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16

오늘의 쉼터 2014. 8. 18. 16:08

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16

 

 

 

 

 문덕의 서신을 지닌 성민은 요동성에 당도하자 시키는 대로 우화를 만나고자 하였다.

수군들은 그가 백암성에서 온 것을 알자 먼저 장근에게 데려갔고,

장근은 그에게 우화를 왜 보자고 하는지 용건부터 물었다.

성민은 한동안 우물쭈물하며 여러 가지 말을 둘러댔지만

곧 모든 것을 바른대로 실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근은 성민이 품에 지니고 온 서신을 펼쳐 읽었다.

한데 그 구구절절한 글 속에는 실로 놀라운 내용이 숨겨져 있었다.

……일전 요동성을 떠난 후로 우중문의 진채에 가서 거짓 항복을 했으나

다행히 우중문과 상서우승 유사룡이 이를 눈치 채지 못하고 순순히 풀어주어

무사히 내지로 들어갈 수 있었거니와, 비록 내지의 여러 곳에서 수십만에 달하는 수군을 토벌하여

무공을 높였다고는 하지만 어찌 잠시인들 그대의 꽃 같은 얼굴과 옥같이 흰 살결을 잊었겠소.

하여 부랴부랴 그대가 있는 요동성으로 달려와보니

그사이에 고신은 죽고 성은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고 하니 놀랍고 걱정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소.

고신이 죽고 성이 적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야 어찌 내 마음을 이토록 괴롭게 하겠소.

내지에서 돌아온 이후 침식을 잊고 근심하는 바는 오직 그대의 일일 뿐이오.

듣자하니 장근은 그 성질이 모질고 포악하며 여색을 탐하기로 결코 양광에 뒤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혹시 무슨 봉변이나 당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소.

지조도 중하기는 하나 어찌 하나뿐인 목숨에 비하겠소.

나는 그대가 현명하게 처신하고 있을 줄로 믿고 오로지 다시 해후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겠소.

만일 그대에게 나와 같은 마음이 있다면 장근에게 허신하는 척하여 야밤에 독살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오.

나는 백암성에 있으니 언제고 성루에 불을 올려 신호하면 벼락같이 군사를 내어 요동성을 치겠소……

글을 읽어내려가던 장근은 돌연 눈에서 불꽃이 일고 노여움으로 머리털이 곤두섰다.

그러잖아도 우화의 배신에 한가닥 의심을 품고 있던 그였다.

“이 글을 보낸 자가 분명히 을지문덕이렷다?”

그는 글을 끝까지 읽지도 않고 성민을 다그쳤다.

성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근은 부하들에게 당장 우화를 붙잡아 데려오도록 명했다.

영문을 알지 못한 채 우화가 군사들에게 붙잡혀 오자 장근은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들고 소리쳤다.

“네가 고신을 배신하고 그를 독살한 것이 진정 무엇 때문이냐?”

우화는 이미 수십 번도 더 밝힌 것을 새삼스럽게 묻자 왈칵 짜증이 났다.

“을지문덕이 무고한 소첩의 아비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하지 않았나요?”

“그런 을지문덕과 몰래 야합한 까닭은 그럼 무엇 때문이냐?”

우화는 기가 막혔다.

“을지문덕과 야합하다니, 대관절 무슨 소문을 듣고 그러시오?”

우화는 억울하여 묻는 말이었으나 장근의 귀에는 부러 시치미를 떼는 소리로만 들렸다.

간밤에도 한이불 속에서 육허기를 달랜 사이였지만 고개를 쳐들고 거세게 나오는 우화를 보자

장근은 별안간 정나미가 떨어지고 증오심이 일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본시 그처럼 약하고 허망한 것이었다.

“그놈의 구린 입으로 또 무슨 말을 주절거려 나를 속이려 하는가!”

장근은 더 이상 쓸데없는 변명 따위는 듣기도 싫다는 듯이 한달음에 우화의 앞으로 달려가서

단칼에 목을 내리쳤다.

“요망한 계집 같으니라구!”

그는 목이 떨어진 우화의 시신를 내려다보며 침을 뱉었다.

“이년을 장대에 높이 매달아 백암성을 향해 효시하라!”

그리고 그는 우화에게 보낸 문덕의 밀서를 지닌 채로 육합성의 양광을 찾아갔다.

이때 양광은 내지에서 참패하고 돌아온 일곱 장수들을 모조리 옥에 가두고 연일 술을 퍼마시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양광에게 말벗이 있다면 오직 상서우승 유사룡뿐이었다.

양광은 유사룡을 술자리에 불러 처음 한동안은 전열을 가다듬어 내지를 재공략하겠다고

큰소리를 쳐댔지만 유사룡이 기회를 보아,

“을지문덕이 요동으로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돌아가시는 것이 더 이상의 불행을 막는 길이올습니다.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지금 남은 군사들은 칼날과 칼등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요동에서 더 머뭇거리다가는 폐하의 돌아가시는 길까지 위태로울까 걱정입니다.”

하며 간하는 말을 듣고 나서 스스로 생각해도 겁이 났던지 철군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요동성의 장근이 도착한 것은 이럴 무렵이었다.

양광은 장근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또 을지문덕이 썼다는 글을 읽고 나자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분기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는 당장 자신의 유일한 말벗이요 술벗인 우승 유사룡마저 옥에 가둘 것을 명했다.

그리고 장근과 내지에서 용감히 싸운 왕인공을 대장으로 삼아 마침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을 명하니 이때가 임신년 7월 중순, 계묘일(癸卯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