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12
실로 눈 한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참담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저항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그토록 허무하게 대군이 흔적 없이 전몰한 예가 또 있었으랴.
뒤늦게 강의 남편에 당도한 우문술 일행도 이 끔찍한 광경 앞에서 넋을 잃기로는 매한가지였다.
그들은 흐르는 강물에 뒤섞여 수면으로 치솟았다가 사라지곤 하는 수천, 수만 개의 새카만 투구와,
사지를 버둥거리며 무자맥질을 거듭하는 말의 몸뚱어리를 보면서 약속이나 한 듯 벌린 입들을
다물지 못했다.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져 차마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자칫했으면 자신들 역시 같은 신세를 면치 못했을 거라는 생각에 간담이 서늘하고 등골이 오싹했지만,
그 다행스러움도 패장의 수모와 몰패의 기막힘을 달래지는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물과 함께 뒤섞였던 수많은 인마며 군장을 실은 수레의 흔적은 물살만큼 재빠르게
자취를 감추었고, 눈앞에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강물이 굽이쳤다.
굽이치며 흐르는 도도한 강물 위로 무심한 빗방울만 적하(滴下)의 파문을 그으며 떨어져내릴 뿐이었다. 우문술은 자신이 혹시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우리가 본 것이 꿈인가, 생신가?”
그의 말에 아무도 선뜻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이것이 설마 생시의 일은 아니겠지.”
그가 혼잣말로 재차 중얼거리자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던 형원항이 침통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생시는 아닌 게지. 아무렴, 아니고말고.”
그리고 한참 사이를 둔 뒤에 이렇게 덧붙였다.
“하나 비록 꿈이라 해도 선제를 따라 30여 년 전장을 누비는 동안
오늘같이 지독한 악몽을 꾸어보긴 처음인 것 같소.”
이때 수장된 군사의 숫자는 20만이 훨씬 넘었다.
하지만 그 숫자보다도 희생자들이 하나같이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가
자랑하던 일당백의 정병(精兵)들이라는 게 더 치명적이었다.
양광의 백만 대군이 살수에서 무너졌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훗날 뒷사람 가운데 고려조의 문충공 조준(趙浚:1346-1405)이라는 이가
명나라의 사신 축맹(祝孟)과 더불어 안주(安州)의 백상루(百祥樓)에 올라
도도히 흐르는 누하의 살수를 굽어보며 다음과 같이 시 한 수를 읊었다.
살수는 탕탕히 흐르며 푸르고 허하거늘
수군 백만이 이곳에 이르러 고기밥이 되었던가
어부와 나무꾼들은 지금도 그때 일을 웃으며 말하노니
채우지 못한 정복자의 한낱 헛되었던 옛꿈이여
한동안 맹위를 떨치며 강변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휩쓸어간 남살수 강물은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둑을 범람했던 강물이 다시 잦아드는 데는 채 반식경이 지나지 않았다.
사방에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리자 우문술 일행은 가까스로 난혼을 수습하고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너고자 했다.
바로 그럴 무렵 홀연 등뒤 쪽이 소란스러워지며 한패의 군마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문술을 위시한 수나라 장수들은 보나마나 을지문덕이 보낸 추격병이라고 판단했다.
“허, 고구려땅 남살수가 우리들의 명줄이 끝나는 사지였구나.”
우문술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마지막 결전을 각오하고 칼을 단단히 고쳐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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