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5

오늘의 쉼터 2014. 8. 15. 22:16

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5 

 

 

 

군사들은 다시 탈진한 몸을 이끌고 바위를 들어내고 나무를 뽑았다.

군영을 설치하는 작업은 초저녁부터 시작해 물경 이경이 가까워서야 겨우 끝났다.

비가 내리니 천지에 어둠은 빨리 깃들고, 달도 없는 데다 불마저 밝히기가 어려워

시간이 무척 지체되었다.

수군들은 군영을 짓고 나자 아무 데나 픽픽 쓰러져서 코를 골았다.

우중문과 신세웅도 기진맥진하기로는 군사들과 매일반이었다.

한밤중이 되자 빗발은 다소 수그러졌다.

그런데 돌연 평양성에서 하늘을 찌르고 땅을 가르는 듯한 함성이 일고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다.

“적이 침략하여 온다!”

평양성의 동정을 엿보던 당보군이 진채를 돌며 소리쳤다.

가까스로 눈을 붙였던 수군들은 혼비백산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중문도 황급히 군장을 갖추고 군막 바깥으로 나와 평양성의 동태를 살폈다.

하지만 성은 다시금 조용해졌고, 특별히 이상한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한참 머리털을 곤두세우고 성 쪽을 주시하던 우중문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는 적들이 우리의 피곤한 것을 알고 쉬는 것을 방해하려는 수작이다.

다들 안심하고 들어가서 눈을 붙이도록 하라.”

막상 그런 판단을 내리면서도 혹시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기습에 대한

우려를 완전히 떨칠 수는 없었다.

“당보군들은 눈에 불을 켜고 성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말라!

어쩌면 적들은 우리가 방심하기를 기다렸다가 다음번엔 실제로 군사를 낼지도 모르겠다!”

우중문이 진채로 들어가서 막 자리에 누우려 할 즈음 또다시 성에서는 함성이 일고

북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는 한참을 계속되었지만 당보군이 좀 전처럼 야단법석을 떨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이번에도 속임수가 틀림없어 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속임수일지언정 잠이 달아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이와 같은 일은 밤새 대여섯 차례나 계속되었다.

그 바람에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운 수나라 군사들은 이튿날 아침이 되어도

제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도대체 저놈의 성안에서 이따위 알량한 수작을 꾸미는 자가 누구란 말이냐?”

우중문은 핏발이 벌겋게 선 눈으로 짜증을 부렸다.

“글쎄올시다. 어쩌면 을지문덕이 아닐는지 모르겠습니다.”

자할이 역시 자지 못해 붉게 충혈된 눈을 끔벅이며 대답했다.

우중문은 을지문덕이란 말에 더욱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있던 요동성은 반년이 지나도록 꿈쩍하지 않았으니

만일 저 성안에 을지문덕이 있다면 이거야말로 큰 낭패가 아닌가?”

“항차 비가 내려 성벽마저 미끄러우므로 공략할 방법도 마땅치 않습니다.”

“비야 언제 그쳐도 그치겠지만 먹을 것이 없어 하루도 견디기 힘든 판이니

대체 이 노릇을 어찌한단 말인가?”

“평양성이 저토록 높고 견고할 줄은 차마 몰랐습니다.

고구려의 축성술은 가히 일품이올시다.”

우중문과 자할이 머리를 맞대고 장차의 일을 걱정하고 있을 무렵 밖에서

군사 하나가 서신 한 통을 들고 들어섰다.

“대장군께 아뢰오. 방금 평양성에서 사신이 나와 이 서찰을 반드시

대장군께 전해 올리라 하고 돌아갔습니다.”

우중문은 궁금한 마음으로 군사가 가져온 서찰을 급히 열어보았다.

귀신 같은 책략은 천문을 꿰뚫고
묘한 계략은 지리를 통달하였구나
싸움마다 이겨서 공이 이미 높았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만 그치는 것이 어떠한가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우중문은 읽기를 마치자 서찰을 가져온 군사에게 물었다.

“이 서신을 내게 보낸 자가 누구라고 하더냐?”

“을지문덕이라 하였나이다.”

순간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짧은 신음을 토했다.

그리고 현기증이 나는 듯 손으로 이마를 짚고 비틀거렸다.

“아, 그가 내지로 돌아온 게 사실이구나.

그렇다면 소로의 길목마다 군사를 놓아 칠전칠패한 것도 미리 계산된 책략이었단 말인가……”

우중문은 그제야 자신이 문덕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깨달았다.

문덕이 없어도 난감한 판인데 그가 지키고 있는 평양성의 철벽이 중문의 눈에

더욱 험고해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곳까지 끌어들인 것이 이미 계략이라면 자신들을 공략할 방책을

별도로 마련하지 않았을 리도 만무했다.

우중문은 비로소 퇴로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장안성을 토평하는 것은 고사하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는지,

마침내 왈칵 두려운 느낌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