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2
한편 압록수를 건너 세 갈래로 남진한 수군들은 복병과 결사항전이 있을 것을 예상해
추행진을 만들어 조심스레 행군하고 몇몇 성곽 앞에 이르면 속임수를 써가며 시일을 끌기도 했는데,
막상 교전이 시작되자 성주들은 약속이나 한 듯 너무도 쉽게 항복하고 나오므로 오히려 싱겁고
허무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우중문은 처음에는 무슨 간계가 있을 것을 경계하여 성주들을 다그치기도 하고,
사람을 풀어 유심히 낌새를 살피기도 했지만 특별히 수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자
곧 이를 내지의 국력이라고 믿게 되었다.
“요동에 비하여 지나치게 허약하지 않소?”
우중문의 말에 우문술이 우쭐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요동으로 모든 군사와 기재가 다 빠져나갔으니 당연할밖에요.”
우중문과 우문술은 굶주린 군사들의 배를 불리는 일이 가장 시급했다.
그런데 점령한 성의 창고를 열자 양곡이라곤 쌀 한 톨이 남아 있지 않았다.
성고(城庫)뿐 아니라 성안의 민가를 뒤져도 사정은 매한가지였다.
성을 점령하면 무엇보다 먹을 것이 생길 거라며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던 수군들로선
가슴을 치며 통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실망하고 낙담하는 것은 보기에도 측은할 정도였다.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성안에 먹을 것이라곤 씨가 말랐으니 그 사유를 말하라!”
우중문은 항복한 성주를 닦달했다.
“성안에 먹을 것을 두고 산 지가 하마 옛날이올시다.
지난 겨울에 왕명을 받은 관리들이 나와서 곧 전쟁이 날 거라며 곡식이란 곡식은
썩은 콩에 좁쌀 낟알갱이까지 훑어서 모다 요동으로 실어갔습지요.
그 후로도 걸핏하면 두어 달 꼴로 시찰을 나와 성고는 고사하고 백성들의 뒤주까지 뒤지는 판국입니다. 어서 가을이 와서 나락이 여물 때를 학수고대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하면 너희는 여태 무얼 먹고 살았느냐?”
“그거야 이루 말로 다 할 수 있습니까?
여북하면 농사짓는 소에 군마까지 잡아먹었겠습니까.
장정들은 차라리 실컷 얻어먹기라도 하겠다고 군역을 자청해 요동으로 가는 바람에
지금 성안에 남정네라곤 육칠순 지난 노인과 코흘리개 어린아이밖에 없습니다.”
우중문이 보니 과연 성안에 남자라는 남자는 씨가 말랐는지라
성주의 말을 안 믿을 도리도 없었다.
“다른 성의 사정도 이곳과 매한가지가 아니겠느냐?”
그가 걱정스럽게 묻자 성주가 대답했다.
“크게 다를 바는 없으나 어쩌면 도성 쪽으로 갈수록 사정이 여기보다는 낫지 싶습니다.”
“그것은 어째서 그런가?”
“이곳은 벽지의 박토요,
도성 쪽으로 갈수록 사람도 많이 살고 땅도 좋으니 아무래도 좀 낫지 않겠습니까.
소문에 남살수 이남으로는 더러 배불리 먹는 경우도 있다고 합디다.”
성주의 말은 한시라도 빨리 수군들을 쫓아내기 위한 계략이었다.
과연 우중문은 낙담한 군사들을 모아놓고 행군을 독려했다.
“제군들은 들으라! 이곳에는 먹을 것이 없다!
그러나 남쪽으로 갈수록 형편이 좋다고 하니 어찌 잠시인들 지체하겠는가?
살수를 건너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을 때까지 사력을 다해 진격하라!”
군사들은 허탈하고 맥이 빠졌지만 살수를 건너가면 먹을 것이 있다는 말에
다시 한가닥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우물가에 둘러서서 물로 배를 채운 다음 밤길도 마다하지 않고 그대로 남진했다.
이와 같은 사정은 세 갈래로 흩어진 수군 진영이 모두 마찬가지였다.
군사들은 극도로 피로했으며, 이들이 남살수 북변에 당도했을 때는 허기에 못 이겨
등이 죄 활처럼 휘어 있었다.
우중문 일행이 비가 내리는 살수 강변에 서서 건너편을 바라보니
한 떼의 병마가 진을 치고 있는 게 어슴푸레 보였다. 그는 책사 자할을 불러 물었다.
“군사들이 너무 지쳐 있으므로 이곳에서 하루쯤 쉬었다가 움직이는 것이 어떠한가?”
그러자 자할이 대답했다.
“지금 군사들이 지친 것은 굶주림 때문이올시다.
굶주림 때문에 잠도 오지 않고 오직 머릿속에는 먹을 것에 대한 일념뿐입니다.
이곳에서 하루를 쉬게 한다고 회복될 병이 아닙니다.
또한 저 강만 넘어가면 먹을 것이 있는데 군사들이라고 여기서 쉬는 것을 바랄 턱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할은 궂은 날씨를 가리키며 이렇게 덧붙였다.
“아무래도 빗발이 심상치 않습니다.
지금은 아직 강물이 불어나지 않았으므로 강을 건너려면 이때 건너야 합니다.
나중에 물이 불어나면 그러잖아도 지친 군사들이 더욱 힘을 소진하게 될 것이요,
어쩌면 아예 도강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만일 비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면 우리는 물이 줄어들 때까지 이곳에 기한 없이
발이 묶여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일은 더욱 낭패가 아니겠습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눈물을 머금고 철군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잠시도 머뭇거릴 틈이 없으니 시급히 명령을 내리소서.”
우중문이 생각하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는 즉시 제장들을 불러모으고 말했다.
“그간 우리는 적의 세력을 너무 과하게 판단하여 쓸데없이 기운을 낭비하고 시일을 끌었다.
제장들도 겪어 알겠지만 내지의 군사력은 요동 지역들과는 판이하다.
별다른 전술과 교전 없이도 몇 번 고함만 지르면 능히 성을 빼앗고 땅을 장악할 수 있을 정도다.
비록 군사들이 피로하고 굶주렸다 하나 어찌 반나절인들 지체하겠는가?
이곳에서 적의 도성인 장안성까지는 불과 하루나 이틀 거리다.
하루이틀 뒤에는 대궐의 용상에 걸터앉아 고구려왕을 오라에 묶어놓고 아리따운 고구려 궁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밤을 새워 주지육림에 파묻힐 수 있을 것이다.
그대들은 마지막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지친 군사들을 독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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